108. 신앙 40년 회고 (1949년 77 생조에)
나의 신앙을 촉진(促進)케 한 자는 우인(友人)도 아니오 친척도 아니라 을사보호조약이 나를 회심케 하여 벽해( 碧海)이 상전( 桑田 )으로 변하는 세상이라 무엇 믿을 것이 있느냐 함이다. 규암(珪庵) 민보국(閔報國)이 백도(白刀)로 자재(自裁)하던 날 경성은 눈물의 바다로 화하였고 처처(處處)에 곡성이 진동하던 때, 나는 안동여사(安東旅舍)에서 혼자 눈물을 흘리고 실컷 울고 보니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마침 우인(友人) 오준영(吳濬泳) 군이 찾아왔다. 또한 같이 음읍(飮泣)하며 시사를 토론하다가 그날이 마침 수요 삼일 기도일이다. 오군(吳君)과 약조(約條)하고 그날 저녁에 같이 승동교회(勝洞敎會)에 가서 예배회에 참예하고 처음 믿기로 작정하였다. 몇 주일 지난 후 저녁예배를 보고나서 교회사무실에 들어가니 서(徐) 장로라 하는 노선생이 있었다. 그때 나의 마음에는 비분강개로 가득차서 방향을 모르는 때 누구든지 이 문제를 해결하여 줄 이가 있으면 하고 기독교회에 들어가 무슨 시원한 소리나 들을까 하고 다니는 중이다.
나는 그 장로에게 묻기를 “지금 민영환(閔泳煥) 씨가 백도자재(白刀自在)하여 죽었으니 교회에서는 어떻게 생각 하는가”고 물었다. 그 장로는 지혜 없는 대답을 주었다. “민영환 씨는 하나님 앞에 역적이라” 한다. 나는 그 대답이 진리가 있는 것을 모르고 깜짝 놀라며 “그게 무슨 말씀이오”, “민공(閔公)은 역적이지요” 한다. 나는 더 묻지 않고 생각하기를 예수교인(耶蘇敎人)은 다 무사상(無思想) 무장공자(無腸公子)들만 모인 데라 생각하고 신앙을 단념하고 다니지 않다가 얼마 전에 나는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 입회하여 회동(會同)에만 다녀 보았으나 그때 선생들의 연설은 예수교의 진리가 아니요 모두 시사의 격렬한 말 뿐인 고로 신앙에 해혹(解或)될 말은 듣지 못하였다. 나는 서(徐) 장로의 말을 들은 후 마음이 괴로워 조선의 진정한 애국자가 누구인가 하고 의문을 가졌을 때라. 최후로 상동(尙洞)에 가서 전덕기(全德基) 씨를 보고 물어 보리라 하고 갔다.
한훤(寒暄) 후에 서(徐) 장로와 문답하던 이야기를 하고 진실한 해답을 청(請)하였다. 전 목사는 그때 나를 위로하여 하는 말이 선생은 얼마나 낙심하셨을까요. 서(徐) 장로의 말이 진리지만 알아듣지 못하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 앞에 역적라는 말은 우리 인간들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사람이 마음대로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처분대로 삽니다. 그런데 민보국(民報國)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여 죽었으면 하나님이 용서하시지요. 나는 그때 비로소 마음속에 있던 의혹이 사라졌다.
그때부터 나는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다니기로 작정하였다. 전 목사는 나더러 조선역사를 아는가 하고 묻는다. 능하지는 못하여도 좀 안다고 답하니 그러면 우리 학교 곧 공옥학교(攻玉學校)와 청년학원(靑年學院)에 조선역사를 좀 가르쳐 달라 하여 그때부터 학교 근무하여 상동교회에 예배를 보았다. 한 일 년 후에 전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수년 후에 속장과 권사의 직을 허락하여 교회에 주일공과를 인도하고 겸하여 교회 일도 살펴보았다.
그때 상동에서 전 목사에게 양육을 받은 자는 나뿐 아니라 김태현(金泰鉉), 이필주(李弼柱), 최성모(崔聖模) 씨인데 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생활로 나아갔다. 나는 그때 이상한 생각이 있었다. 협성신학(協成神學)에 공부하여 장차 연회 회원도 되고 목사도 되어 전로(前路)를 개척할 것이어늘 그렇지 않고 그 길을 단념하였다.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그때 감독 해리스 씨는 일본에 있으며 조선교회를 감독하는 해씨의 행동과 사상은 순전히 일본화 하여 조금도 조선에 이로운 인물이 아니오 도리어 조선의 적이라 할 수 있도록 보여졌다. 나는 해씨 산하(傘下)에 들어갈 마음이 없고 차라리 평교인으로 있는 것이 났다고 생각하였다.
그때 신흥우(申興雨) 씨가 마침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명성이 있던 때라 해씨와 가깝고 또 해씨의 주선으로 조선연회에 입회를 청하였다가 입회거절을 당한 이유는 해씨와 장자가 연하였다 함이다. 나는 그것을 보고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
그 후로 나는 서적을 사가지고 자유로 신학을 연구하고 또 사상은 전목사와 동일하였다. 예수를 믿으면 참으로 믿고 나라를 사랑하면 참으로 사랑하자 함이오 또 신앙은 국가를 떠난 신앙은 죽은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그때 시란돈(施蘭敦) 목사가 상동 건너편에 개업하고 있었는데 나는 전 목사와 같이 또 다른 교직으로 더불어 시란돈 목사에게 신학을 배웠는데 취미 양양(洋洋)하였다. 보호조약하던 날 우리 일동은 울었고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고 참 믿고 하나님께 구하시오 하였다.
그 후에 나는 평교인으로 있지 못하고 경성지방회(京城地方會)에서 권사와 전도사의 직첩(職帖)을 주어 받았다. 전 목사 별세 후에 나는 신민회(新民會)의 직무를 보다가 배재중학 교원으로 피선(被選)되어 시무 전도하다가 3.1운동 시에는 일인(日人)들의 압박으로 있지 못하고 2년간 인천교회(내리교회) 담임으로 있는 동안 나에게 목사 안수를 허락한다.
그 후 아펜셀러 씨가 도로 배재교장(培材敎長)이 된 뒤에 다시 나를 청하여 배재에 시무케 되어 배재에 전후 19년 6개월간 교목으로 있다가 다시 청진지방에 파송을 받아 준 8개년 간 있었고 다시 상경하여 지금은 경성북지방 목사로 있게 되었다. 그간에 병으로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나 교회 담임은 그만 두려고 해도 교회, 곧 궁정교회(宮井敎會)에서 허락하지 않고 설교할 수 없을 때까지 같이 있자하여 오늘 또 77생일을 당하여 두어마디 감상을 적노라.
* 참조 :상전벽해 -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으로, 세상 일이 몰라볼 정도로 변하는 상황을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