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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27장 30-40절
결코 주어지지 않는 복
창세기 27장은 이삭이 야곱에게 선택과 관련된 은혜의 내용을 축복하는 장으로 이미 창세기 25장에서 말씀하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내용의 성취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뜻과 달리 야곱이 아니라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는 이삭의 뜻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리브가의 경우 야곱에게 축복이 돌아가도록 하려고 했지만 거기에는 거짓이라는 잘못된 방법이 동원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야곱은 그런 어머니의 뜻에 동조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었습니다. 즉 이삭의 잘못을 보게 되고, 리브가의 잘못을 보게 되고, 야곱의 잘못을 보게 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잘못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성취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해해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뜻을 성취하고야 마시기 때문에 인간의 잘못에 대하여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래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성취하시고, 저래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성취하시기 때문에 굳이 내가 하나님의 뜻에 맞춰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매 순간 그렇게 역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잘못한 것에 대하여 징계하시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야곱의 경우는 그의 잘못으로 인하여 형을 피해 도망하는 신세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바로 앞에 서게 될 때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험악한 세월을 보낸 것으로 표현합니다. 어떤 면에서 죄에 대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다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성취되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잘못에 대하여 괜찮은 것처럼 여길 수 없고, 오히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그리고 무엇이 하나님을 뜻을 성취하는 올바른 방법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다만 종합적인 이해 속에서 볼 때 지난주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란 존재가 끊임없이 점과 흠과 죄악된 것을 내놓는 존재임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것은 에서와 관련해서입니다. 우선 에서의 경우는 창세기 27장 전체로 볼 때 그나마 가장 나은 자라 할 수 있습니다. 본성적으로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에서를 축복하려고 한 이삭과 같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축복을 빼앗기 위해서 거짓을 동원한 리브가나 야곱과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이삭이 자신에게 축복하려고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냥하러 나갔을 뿐입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가장 큰 피해를 본 자가 바로 에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본래부터 에서에게 주어질 축복이 아니라 야곱에게 주어질 축복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정해 놓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야곱에게 있어서는 결코 빼앗길 수 없는 복으로 있었지만, 에서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을 복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인간은 자기 것이 빼앗겼다고 생각합니다.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때로는 분노를 내기도 합니다. 본래부터 자기의 것이 아닌데도 주어질 수 있었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에서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아 하나님의 뜻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실행될 때 분노와 같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차분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어쨌든 이런 이해 속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우선 30절과 31절에서 사냥을 나갔던 에서가 돌아와 축복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의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조금 전에도 설명했지만 창세기 27장 안에서 에서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칭찬할 것 외에는 없습니다. 아버지인 이삭이 불러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할 때 그 요구에 따를 뿐입니다. 리브가와 야곱처럼 집에 있는 짐승을 잡아서도 별미를 만들 수도 있었지만, 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냥을 나갔고, 나가서 잡았습니다. 그리고 잡은 짐승을 가지고 와서 별미를 만들었습니다. 반면 야곱은 이런 에서의 노력과 수고와는 달리 집에 있는 짐승을 잡았습니다. 자신이 별미를 만든 것이 아니라, 어머니 리브가가 별미를 만들어 줬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7장 전체를 볼 때 누가 축복을 받느냐? 야곱입니다. 에서의 경우 노력과 수고하여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였지만, 그리고 아버지께서 축복하겠다고 하신 것을 주시도록 축복해 달라고 하고 있지만, 결국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는가? 처음부터 선택과 관련된 복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기로 하신 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씀은 로마서 9장에서 볼 때 예정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즉 야곱은 선택을 받았지만 에서는 유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택과 유기에 있어 인간에게 어떤 조건이나 원인이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로마서 9장 11절은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고 말씀합니다. 무선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만이 원인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27장은 이 말씀을 더욱 분명히 해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행위로 보자면 에서가 축복을 받는 것이 너무나도 합당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말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순종을 위하여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아올 뿐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떻습니까? 노력과 수고가 전혀 없습니다. 거짓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자신이 에서인 것처럼 해서 축복을 가로챈 것입니다. 행위로 하자면 누가 축복을 받아야 합니까? 당연히 야곱이 아니라 에서입니다. 그러나 선택과 유기는, 그리고 선택과 관련된 축복의 내용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무선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만이 원인으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렇게 살아도 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징계하신다는 것도 기억해야 하지만,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그리고 그 영광을 위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으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선택이 우리의 행위와 아무런 관련 없지만 선택하신 목적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죄에 대하여 징계하시는 것이 있는 겁니다. 한 면만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을 향한 축복 이후 에서가 돌아오게 되고, 이삭이 말한 축복을 달라고 요구하지만 에서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당황스러운 일로 인하여 이삭은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있다가 다시금 눈을 뜨게 되는데, 32절과 33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이삭이 심히 크게 떨었다는 것은 전후 사정을 알고 난 뒤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실수, 다시 말해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했는데 야곱에게 축복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겁니다. 만약 그런 실수라고 생각했다면 두려움이 아니라 야곱에 대한 분노를 나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삭은 심히 크게 떨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인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가지신 뜻이 있었는데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 뜻은 무시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두려움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야곱을 축복한 이상 그가 반드시 그 복을 받을 것이라고 다시금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마음은 여전히 에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행동을 보자면 더더욱 사랑스럽고 축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속였지만 에서는 아버지 말에 순종한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내가 실수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축복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임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교회 앞에 들려지는 모든 약속이 이와 같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말씀 사역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떤 자들이냐? 모든 성도와 마찬가지로 점과 흠이 있는 자들입니다. 부패성을 가진 인간이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이 없다면 지극히 나약한 자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이때 부패성을 가진 인간이 말한 것이기 때문에 약속의 말씀이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역자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의 신실성과 능력과 효력을 파괴시키지 못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정당한 말씀을 사역자를 통해 말씀하실 때는 사역자 개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말씀의 신실성과 능력, 효력은 결코 감소될 수 없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사역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역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정당한 말씀을 바라봐야 합니다. 사역자를 바라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 비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점과 흠이 있는데, 부패함이 있는데 어떻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사역자는 점과 흠이 내비춰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로 서야만 합니다. 실수해도 괜찮다가 아니라 실수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역자를 바라보는 것은 언젠가 실망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라보고 붙들 때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성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효력 있는지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때 실망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성, 능력, 효력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 없음이 문제가 될 뿐입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께 나의 믿음 없음과 믿음을 더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정당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의 말씀은 언제나 신실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신정통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에게 뭔가 와 닿아야지만, 감동이 되어야지만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동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분명한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내 기분에 따라 효력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효력이 좌우될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만을 붙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삭의 말이 그것입니다. 이삭이 축복한 것이 그러한 축복이란 것입니다. 34절로 오시면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여기서 우리는 에서가 얼마나 아버지의 축복을 바라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어떤 감정으로 울면서 축복해 달라고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분별할 필요가 있는데, 적어도 참된 경건의 모습으로 이렇게 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눈물과 커다란 부르짖음을 이끌어 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에서의 통곡과 부르짖음은 본래 자기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것으로 여겨서 빼앗겼다는 억울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36절에 의하면 ‘나의 장자의 명분’, ‘내 복’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7절에 보시면 에서와 관련하여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 바로 앞 16절에 이런 말씀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그러니까 에서의 경우 장자의 명분을 팔았는데, 창세기 25장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까닭이라 설명합니다. 그리고 난 뒤 그것에 대한 결과가 창세기 27장으로 나타날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거절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울었다고 할 때 참된 회개의 모습으로 울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칼빈은 히브리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죄인이 탄식할 때는 언제나 주께서 기꺼이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마다 누구나 그 자비를 얻지 않는 자가 없다.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기 때문이다(마7:8). 그러나 에서의 눈물은 소망이 없는 인간적인 눈물이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흘린 눈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그렇게도 슬퍼하고 한탄하면서도 하나님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뉘우침이 아닌 것입니다. 그가 축복해 달라고 말한 것 역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에 대한 갈망이 아닌 것입니다. 내 것을 빼앗아갔다는 억울함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믿음 안에서 행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믿음과 상관없이 행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에서에 대해 이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5절을 보시면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여기도 보면 이삭이 에서에게 ‘네 복’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자칫 본래는 에서에게 주어질 복이었지만 야곱이 속여 빼앗은 것처럼, 다시 말해 본래부터 하나님의 뜻이 그런 것처럼 생각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해석하게 된다면 33잘에서 이삭이 심히 크게 떨었다는 부분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해석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이삭이 35절처럼 표현한 것은 에서를 의식하여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래부터 ‘네 복’이라는 의미에서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네게 축복하고자 했던 그런 복이라는 의미에서 ‘네 복’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빼앗았다는 것은 야곱의 잘못을 드러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이삭이 에서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면도 있는 겁니다.
그러자 36절에서는 에서가 아버지의 말을 받아 야곱의 잘못을 말함으로 자신의 원통함을 아룁니다.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러나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에서 본 것처럼 야곱의 잘못이 지적되는 것이 아니라, 이삭의 믿음 없음 그리고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없는 것이 지적될 뿐입니다. 물론 야곱이 속인 것은 맞습니다. 장자의 명분도 빼앗았고, 지금은 아버지 이삭이 자신에게 축복하려고 한 그 복도 빼앗았습니다. 분명 잘못된 행동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에 대하여 가볍게 여겼다는 것, 그리고 이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았는가? 이미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고 할 때 장자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지만 큰 자에게도 은혜를 내 비취셨습니다. 이삭 가정에 장자로 있다는 것은 오늘날 교회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노출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는 불신자와는 다른 겁니다. 물론 불신자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정할 수 없도록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신성과 능력을 그 만물을 통해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일반계시가 아니라 특별계시의 말씀을 듣는 자로 있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형교회 안에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소홀히 생각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그것을 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36절에서 에서의 원통함을 볼 수 있지만, 그리고 그가 말한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런 자로 있는 것은 아닌가 살펴봐야 합니다. 사실 교회 안에 머물러 있다고 할 때 우리 모두는 이사야의 말씀처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는 말씀 앞서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늘 문이 우리에게 열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늘 문을 향해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구원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갈급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은 듣고 있지만 그 말씀이 마음 판에 새겨지지 못하고 뿌리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로 하자면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쁨으로 받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은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는 넘어집니다. 말씀을 듣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때문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살펴가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에서는 여전히 자신에게 돌아올 할 복이 없느냐고 아버지께 묻습니다. 여기에 대해 에서는 37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사람이 복을 빈다고 해서 빌었던 복이 그대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저주한다고 해서 그 저주가 그대로 그 사람에게 임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삭이 야곱에게 준 복은 자신의 개인적인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변하신 선택과 맞물러 있습니다. 복을 빈 자는 자신이지만 자신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란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마지막에 축도를 합니다. 이것은 결코 개인의 축복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역자를 세워 자신을 대신하여 복을 비는 것입니다. 말씀을 강론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워 그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지만, 그리고 그런 점에서 참된 말씀으로 이탈하는 경우들도 있지만, 정당한 말씀이 선포된다고 할 때 그 말씀은 결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사역자는 하나님의 입으로서 성도들 앞에 서는 것입니다.
지금 이삭이 그런 자입니다. 한 가정에 아버지이지만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그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불변하신 뜻을 축복하였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즉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대답할 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다시금 소리 내어 울면서 축복해 달라고 합니다. 38절을 보시면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앞서도 말했지만 그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믿음 안에서의 요구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칼빈은 이 부분에서 에서가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데는 태만하면서 돼지처럼 자기 육신의 요구에만 전력을 다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우려고 하기 보다는 본래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집착이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가 다시금 소리를 높여 우는 것을 보게 되는데, 억울함과 그것에 대한 분노가 이렇게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주 살피게 될 41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이런 에서에게 아버지 이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9절과 40절을 보시면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이 말씀과 야곱에게 축복하신 말씀을 비교해 보면 에서에게 한 말이 결코 복된 내용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우선 야곱에게는 어떤 축복을 했습니까? 28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합니다. 반면 에서에게는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에게 축복한 것과는 반대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심지어 야곱에게는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라고 말씀하셨지만(29절), 에서에게는 네가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아무리 울고불고 해도, 아무리 축복 받기를 원한다고 소리를 높여도 처음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신 이상, 처음부터 택자가 아니라 유기자로 정하신 이상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여기 보면 너는 네 칼을 믿고 생활할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나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약속하신 나라는 창세기 18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강대한 나라이지만 그 강대함이 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 것으로 있기 때문입니다(창18:18-19). 이런 측면에서 에서에게 들려지고 있는 내용은 소위 세상이 힘으로 삼고 있는 것을 동일하게 힘으로 삼는 나라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하시는 것이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간단히 말해 자기 자신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에서는 결국 자기 갈 길을 가서 세상이 힘으로 삼는 것을 동일하게 힘으로 삼으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느냐?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칼을 믿고 생활한다, 에서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중간에 어떤 말씀이 있느냐 하면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는 말씀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들이 태 중에 있을 때부터 그의 부모에게 들려 주셨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시는 그 영적인 나라가 결국 모든 나라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살펴가겠지만 야곱에게 주신 약속, 그리고 에서에게 말씀하신 모든 내용은 그들에게서 성취된다기보다는 한 참 이후에 성취되던가 아니면 아직도 성취되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 살폈던 내용,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피고 있는 내용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택자에게 주고자 하시는 복은 반드시 택자가 받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택자가 받아야 할 복을 유기자가 받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모든 복의 내용, 그리고 그 복의 근원이시요 복 자체이신 하나님이 유기자에게 주어지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유기자의 경우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로 있기 때문에 그 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로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지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나타나셨고 그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그 은혜를 차버린 꼴로 있기 때문에 그 은혜 머물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 택자는 어떻습니까? 동일하게 죄인입니다. 어떻게 보면 에서보다 야곱이 더 큰 죄인처럼 있습니다. 창세기 27장에 나오는 두 사람을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로 말미암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택자이기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에 하나님께서 그 복을 택자에게 주시겠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서와 관련된 내용을 보면서 에서와 같은 자가 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특히 히브리서 12장 17절 말씀을 다시금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장자권을 팔고 난 뒤)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눈물을 흘리며 구하는 자로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자로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에서와는 달리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여기며, 그것을 세상의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팔아서는 안 됩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고 세상의 유익들이 있다고 할 때 그 유익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등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시험을 받으시면서 신명기 8장으로 이겨 내신 것처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 알고 그 말씀을 붙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