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영] 미스 코리아 살인사건 15-16.
범인은 없다 6.
오부장과 임국장은 방송국 정문을 나올 때까지 서로 시선을 피한 채 침묵을 치키고 있었다. 주차장에 당도하자 임국장이 먼저 입을 떼었다.
"어떠셨습니까, 테이프를 본 느낌은요?"
임국장은 텅 빈 광장을 보면서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장과장 말대로 범인이 없더군요."
"오부장님께서 무대포인 그 사람 좀 타일러주셨으면 합니다.
진범일 수 없는 사람을 진범이라니... 이거야 원,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지..."
"그건 그렇고, 그 캠코더 기사를 만나셨을텐데, 그냥 테이프만 전해받았습니까?"
"호텔 방에서 잠깐동안 몇 마디 얘기를 나눈 게 고작이었습니다. 테이프를 검토해 봐야 했기 때문에 별로 얘기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 기사에게 얼마를 지불했습니까?"
오부장은 궁금한 눈빛으로 물었다.
"생각보다는 큰 액수는 아닙니다."
임국장은 정확한 액수를 밝히길 꺼려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선은 있지 않겠습니까?"
"처음엔 턱도 없는 액수를 부르더군요. 당연한 거죠. 그러다가 현실을 인정했는지 딱 잘라서 삼백만원을 요구하더군요."
오부장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삼백만원을......"
"그 기사로서도 테이프 내용에 불만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가장 중요한 범인의 행동이 찍혀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무척 속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범인의 살인 순간이 포착되어 있었다면 우리 방송국에 장사를 할 필요없이 범인에게 직접 거래를 했을텐데 말입니다. 그나마 미스코리아 진의 마지막 모습이 화면에 담겨져 있어서 상품가치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그자가 더 많은 액수를 끝내 고집했다면 우리도 그의 요구를 수용했을거요......"
임국장은 고소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때 복제 테이프를 든 서류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장과장이 승용차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보도국장이 이 테이프를 주면서 협조 좀 해달라고 그러더군요."
"장과장은 서류봉투를 타고온 순찰차 안에 넣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임국장은 여전히 불쾌한 시선으로 장과장을 쏘아보면서 입술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장과장님은 아직도 내가 범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오?"
임국장은 바지 주머니에서 양손을 찔러넣으며 격앙된 음성으로 물었다.
"임국장님뿐만 아니라 권중혁 의원님도 마찬가집니다."
장과장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오부장님, 대나무처럼 곧은 부하를 두셔서 참으로 든든하시겠습니다. 속이 텅 비어서 문젭니다만 말입니다. 두 분 다 안녕히 가십시오. 장과장, 당신 후회할 날이 있을거요."
임국장은 등을 돌리면서 거칠게 한 마디 내뱉고는 방송국 안으로 사라졌다.
"이런 걸 무언의 압력이라고 합니까, 부장님?"
장과장은 밤하늘에 뿌옇게 떠 있는 하현달을 쳐다보면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나도 뭐가 진실인지 잘 모르겠어."
"저도 부장님의 의견과 상치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그러나 권의원이 진범이라고 밝혀졌을 경우, 그때는 누가 그 통한의 책임을 집니까? 설사 무관하다고 밝혀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범인이 없습니다. 그 점이 제겐 가장 중요한 문젭니다."
오부장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고뇌하는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그래, 지금은 범인이 없어. 그 분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소신대로 일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어. 나도 장과장의 범인 없음에 찬성하겠네. 그리고 범인은 여덟 사람 중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합니다, 부장님."
"가지, 장과장. 현장으로 내려갈건가?"
"보고서를 써야 하니까 시경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러게. 그 다음 일은 위에서 알아서 하겠지."
오부장은 장과장의 어깨를 치며 승용차 운전석에 앉았다.
"난 집에 가서 한숨 자야겠어. 보고서는 내 책상 위에 놓아두게."
오부장의 차는 광장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장과장은 한참동안 희뿌연 하늘을 올려보다가 방송국 건물로 시선을 돌렸다. 성난 임국장의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방송국 앞에 잠시라도 서 있을 기분이 없어졌다.
"임국장, 내 사전에는 후회라는 단어가 없소이다."
정과장은 패트롤카를 거칠게 회전시켜서 광장을 질주했다.
폭로, 미스코리아 진은 자살했다 1.
방송국에 테이프를 건네주고 난 이튿날, 박만하는 3년 전에 사진기자로 근무한 적이 있던 "퀸서울"사를 찾아갔다. 주로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추적해서 흥미위주로 기사를 내는 주간잡지사였다. 5년 전에 창간할 때는 적자 운영을 면치 못하던 잡지사가 지금은 흑자에 넘쳐 더 큰 빌딩으로 이전을 서두르고 있을 정도로 발행부수가 엄청난 퀸서울이었다.
박만하는 3년 전에, 그 잡지사 사진기자로 입사한 지 1년이 채 되지 못해서 모델에게 금품갈취를 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하고 말았다. 신인 여배우겸 CF모델로 막 꽃봉우리를 터뜨리기 시작하는 신인 여배우의 수영복 입은 반나체를 화보에 담기 위해 청평에 있는 계곡으로 떠났다. 현장에 도착해서 모델을 넓적한 바위 위에 앉혀 무릎을 세우게 하고 섹시한 포즈를 취하게 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성에 굶주린 여자처럼 요염해지는 것이었다. 불타오르고 있는 계곡의 단풍을 배경으로 해서 셔터를 열댓 번 누른 다음 그녀에게 다가가 새로운 포즈를 취하게 했을 때도 모델의 숨소리는 거칠어져 가고만 있었다. 그 순간 그는 계곡에 거의 다 도착해서 모델이 승용차 옆자리에서 캔과 함께 마신 약봉지가 생각났다. 모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목을 힘껏 끌어당겨 허벅지 사이로 파묻었다. 결국 그날의 사진 촬영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환각에서 깨어난 모델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에게 수표 한장을 건네주면서 비밀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닷새 후, 땅딸이 사장은 그를 직접 사장실로 불러 면전에서 파면 통보를 했다. 순진한 모델에게 향정신성 의약을 먹여서 돈을 갈취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조용히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땅딸이 사장 옆에 앉아 있는 모델과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모델은 3개월 후에 사장과 결혼식을 올렸다. 열 아홉 나이로 군대 간 두 아들의 계모가 된 모델이었다. 그러나 그 모델은 일년 전에 캔에다 청산가리를 타서 마시고 자살해버렸다.
박만하가 편집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서 원고를 검토하고 있던 편집장이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이게 누구야, 박기자 아니야?"
편집장은 악수를 청했다.
잡지사에 들어오기 전에 전화를 건 목적이 이 인간을 이렇게 반갑게 대해주는 속물로 만들었겠지. 파면당한 나를.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편집장은 방문객에게 담배 한 개비를 권하면서 자신도 한 대 피워물었다.
"캠코더 기술 좀 배워서 인천에 있는 예식장에서 목구멍에다 풀칠 좀 하다가 지금은 조그만 사업 좀 해볼까 구상중입니다."
박만하는 한 모금을 빨고는 담배맛이 없다는 듯 재떨이에다 거칠게 비벼껐다. 편집장이 재떨이의 짓이겨진 담배를 슬쩍 내려다보면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알다시피 내일이 마감이기 때문에 기자들이 총동원되었어."
편집장은 텅 빈 사무실을 보면서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퀸서울이 꽤 유명해졌더군요. 물론 내가 있을 때도 그랬지만요."
"그만큼 더 힘들어. 몸이 열 개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야."
편집장은 탐색하듯 그를 보면서 말했다.
"사장과는 연락이 되었습니까?"
박만하는 손목시계를 보면서 물었다.
"물론이지. 투고 내용이 특보감이라면 자네가 요구한 액수를 지불해 주라고 하더구만. 그리고 사장님 말씀이, 자네가 원한다면 우리 잡지사에 다시 채용하고 싶으시다더군. 그리고 조금 아까 나리따 공항에서 전화가 왔는데, 저녁 7시쯤이면 김포공항에 도착하신다더군. 자네 생각은 어때? 사장님 한번 만나볼 의향은 없나?"
"내가 듣고 싶은 건 액수일 뿐입니다."
박만하는 코웃음을 치며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네. 신빙성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에 하는 얘긴데, 익명의 투고나 우리 잡지사 기자 이름으로 기사를 내보낼 수는 없다는 점이네. 그러니까 자네 이름으로, 뭐 전 퀸서울 사진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