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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8장 12-20절
나는 세상의 빛이니
지난주 살핀 음행 중에 잡혀온 여자가 용서를 받는 사건은 율법을 통해 정죄를 받고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가 정죄를 받지 않고 저주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는 말씀을 하시지만 그 길을 제공해 주시는 분이 누구시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래는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율법의 정죄와 저주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만드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와 저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해서 죄를 가볍게 볼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과 함께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죄를 범하는 자가 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았다면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감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2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음행 중에 잡혀온 여자가 용서를 받는 사건과 그대로 연결이 되면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라는 말이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8장 9절에 보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다 나가고 성전 안에는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어떤 이들은 음행 중에 잡혀온 여자가 용서를 받은 사건이 문맥상 매끄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요한복음의 기록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초막절 중간부터 시작해서 초막절 끝나고도 계속해서 성전에서 가르치셨다고 할 때 하루가 흘러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해 오신 것처럼 다시금 성전에서 가르치실 수도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문맥상으로도 매끄럽지 않다고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과 오늘 본문 12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는 것은 앞에 있는 사건과 무관하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밝히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밝힌 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보시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요, 창조하셨다면 마땅히 섭리를 행하시는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 안에 무엇이 있는가? 생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합니다(요1:4). 이런 빛과 대조되는 것이 어둠인데, 요한복음 1장 5절에 보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합니다. 빛과 어둠에 대한 일반적인 현상은 빛이 비치면 어둠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달리 표현하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생명을 상실했기 때문에 빛을 비춰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대한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이 9절 이하 11절에서 증거 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고발할 조건을 찾아 예수님을 해하려고 하는 부류가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만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모두가 다 영접하지 않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나 영접하였다고 할 때 그들이 영접한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어지는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빛이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고자 하시는 바가 생명을 주기 위한 일이라는 것이고, 그러나 이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하기에 나를 영접하지 않는 일이 빈번하다고 알리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접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 혈통이 남달라서 영접하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육정, 다시 말해 육체의 의지, 욕망이 남달라서 영접하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사람의 뜻, 사람의 의지가 남달라서 영접하는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 무엇인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셔서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아들로 삼기로 하신 자들, 그들이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음행 중 잡혀온 여자가 여기에 속합니다. 음행 중 여자를 잡아온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려 고발한 조건을 찾기 위해 왔습니다. 더불어 율법에 따라 여자를 정죄하기 위해 왔습니다. 마치 자신들이 심판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왔습니다. 그러나 여자만 죄인이 아니라 여자를 데리고 온 너희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여자만 정죄를 받아야 할 죄인이 아니라 너희도 정죄를 받아야 할 죄인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돌을 들어야 하는 자들이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 떠나고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가 되어서야 심판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사실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얼마든지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그런 분이 여자의 죄에 대하여 더 이상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혈통이 있습니까? 여기에 무슨 육체의 의지, 사람의 뜻이 있습니까?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깨닫지도 못하는 상태에 있는 자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깨닫게 하시고 빛 가운데로 나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보면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고 기록합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가 땅 끝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이후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난 시므온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2:32) 결국 이런 모든 내용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둠으로 있는 세상의 빛이요, 그 빛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자에게 그 길을 열어주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를 믿는 자, 그를 영접하는 자, 그를 영접하여 그를 따르는 자, 이것을 위해 믿음을 주시기로 하신 자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 그들에게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는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요 결코 어둠 가운데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은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과 맞물려 있습니다. 죄를 범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죄와 반대되는 것을 행하며 사는 것, 죄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며 사는 것, 이것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빛을 얻는데 그 빛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는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소유하고, 나아가 생명을 나타낼 수 있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빛이 되어 생명을 줄 수 있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5:14-15)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빛을 너희의 착한 행실이라고 설명합니다(마5:16). 여러분, 우리를 빛이라고 하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본래 우리는 어둠에 속한 자였습니다. 어둠에 속하여 어둠의 일만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어둠에 속하는 자들인지 빛을 비춰도 빛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할 정도로 모든 감각이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의 감각을 살려주셨고, 그래서 빛을 보게 하셨고, 빛을 믿게 하셨고, 빛을 따르게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이제는 우리를 빛이라고까지 하십니다. 본래 빛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데,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분만이 ‘참 빛’(요1:9)이라고 하는데, 그분의 빛 가운데 행하는 자를 이제 빛이라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안에서 양자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분은 본성적으로 아들이시지만 우리는 은혜로 아들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성적으로 참 빛이십니다. 빛으로서 그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로 빛이라 칭함을 받습니다. 그의 빛을 받아서 빛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할 때 이 모든 것이 사실은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빛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은혜 없이 우리가 어떻게 어둠에 다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은혜 없이 우리가 어떻게 빛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동일하게 음행하다 잡힌 여자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으로 정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사의 내용으로 우리의 마땅한 바를 알리시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에 부합된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위하여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의 뜻을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땅한 바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이 땅에서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는 자로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안에는 아직까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 이상 율법으로 정죄를 받지 않는 자들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자리에 가기까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데, 어떻게 해서 그 방향으로 갈 수 있는가?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7장 38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롬8:17)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우리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의 것이 고스란히 우리의 것입니다. 그를 아들이라고 부른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고, 그를 빛이라고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빛이라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거룩하기에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성도라고 부릴 수 있는 것이고, 그가 영광스럽게 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될 자로 있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말씀에 대하여 오늘 본문 13절에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반박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지금까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계속해서 반박했지만 그런 반박이 힘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율법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7장 23절과 24절을 보시면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율법을 따라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것으로, 간단히 말하면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으로 시비를 걸지만, 안식일조차 율법을 범하지 않기 위해 할례를 받는 일이 있다면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 그의 몸과 영혼을 고치는 일이 어떻게 율법을 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다고 할 때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은 참과 거짓의 여부를 따질 수 없는 게 보편적인 법칙입니다. 그러나 그런 보편적인 법칙을 넘어 율법은 한 증인이 아니라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의 증인을 통해 그 사건을 확정하라고 말씀합니다(신19:15). 그러므로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증언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단 요한복음 5장 31절로 가면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요5:32). 그럼 그가 누구냐?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5:34)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아닌 자, 그러나 그의 증언은 참될 수밖에 없는 자,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요한복음 5장 31절과는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을 하십니다. 14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을 하신다고 해서 반대되는 말씀이 아니라, 요한복음 5장은 내가 나를 증거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증거 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요, 특별히 자신의 낮아지신 신분과 관련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8장에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이 말하기를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한다면 그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보편적인 법칙을 따라 보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보편적인 법칙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다고 하심으로 자신이 단지 낮아지신 신분으로만 계신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만약 예수가 어디서 오며 오디로 가는지 알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을 통해 예언한 메시아가 예수임을 확신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들을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외모로만 판단할 뿐 그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가 성부로부터 왔다는 것과 성부로부터 사명을 받아 이 땅에 계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사명을 완성하시고 난 뒤에는 다시금 성부에게로 가신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요한복음 17장 5절의 말씀처럼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를 가지고 아버지와 함께 계실 것임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명확하게 아는 분으로서 자신이 자신을 증언하더라도 결코 거짓된 것이 아니라 참되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저들은 모릅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도 모르고 하나님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 그들의 말을 통해 무엇을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는 자가 어떻게 참된 것을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율법은 두 세 증인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율법이 두 세 증인을 요구한다고 할 때 사람의 수에 따라 진리가 증거 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800명이 한 목소리를 말한다 할지라도 800명이 거짓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엘리야와 대립했던 800명의 거짓 선지자는 자신의 신들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숫자는 800명이 많지만 누구의 말이 참되다고 증거 되었는가? 엘리야의 말이 참되다고 증거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 세 증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되게 말하는 것입니다. 두 세 증인이 합심해서 거짓을 말하고 그 거짓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일이 있다면 율법의 참된 의도와는 달리 율법을 가지고 거짓을 일삼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다수가 거짓을 말한다할지라도 자신만으로도 자신이 참되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저들이 모르는 것을 아는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도 무지하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하나님도 알 뿐만 아니라 그분의 율법에 대해서도 다 알고 계십니다. 저들보다 좀 더 아는 정도가 아니라 모르시는 게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앎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증언이 참되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15절을 보시면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다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7장 24절에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셨지만, 저들은 외모를 판단할 뿐입니다. 육체를 따라 판단할 뿐이요,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할 뿐입니다. 결코 공의롭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진리에 따라 판단하지 않습니다. 왜 저들은 외모로 판단하고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가? 요한복음 7장에 있는 내용으로 하자면 율법의 참된 뜻보다 율법의 외면적인 면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었으나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7:19). 뿐만 아니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요7:28). 하나님을 올바르게 안다면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겠지만(요7:18),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영광만을 구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 영광이 다 외면적인 것으로 확인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판단하는 것처럼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나의 판단은 너희와는 전혀 다른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판단은 무엇에 근거한 판단인가? 16절을 보시면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5절에서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은 결코 공의에 합당한 판단이 아닙니다. 반면 예수님의 모든 판단은 참된 판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 없으신 참 사람일뿐만 아니라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잘못된 판단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그의 판단의 근거가 저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판단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나를 보내신 이, 즉 성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그를 통해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 판단해도 내 판단을 참될 수밖에 없지만, 내 판단을 증언해 주실 분이 계신데 그가 나를 보내신 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14절에서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인이 참된 이유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동일하게 내가 판단하는 모든 것은 참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판단이 참되다는 것을 증언해 주실 분이 있는데 그가 누구냐? 나를 보내신 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안다고 할 때 성자이신 예수님은 성부로부터 오셨고 결국 성부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성부께서 보내셨고 보내신 목적을 성취하고 난 뒤에는 다시금 돌아갈 것입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해 주실 분이 하나님이시란 겁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17절과 18절을 보시면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율법은 두 세 사람의 증언을 통해 참되다고 기록합니다. 일반적으로라면 자기가 자신을 증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증거 할 수 있는데, 그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자신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고, 또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도 자신을 위하여 증언함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더 중요한 것은 참된 것을 말하느냐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참된 것을 말씀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 반복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적어도 예수님보다 많습니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다수라고 할 때 다수가 한 목소리로 당신의 증언이 거짓되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참됨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를 증언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증언하시기 때문입니다.
혹 여기에 성령에 대한 표현이 없다고 해서 성령은 증언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분리할 수 없는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부가 증언하시고 성자가 증언하신다면 성령 역시 증언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는 분은 인성을 입으신 자신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을 증언하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증언자이신데 누가 그를 거짓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출처로 가지는가가 중요합니다. 물론 저들도 하나님을 출처로 가진다고 말할 것입니다. 율법을 가르치지 않는가? 가르칩니다. 그러나 참되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가르치지만 하나님을 출처로 한 가르침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늘날 동일하게 성경을 가르친다고 할 때 목사로서 누가 성경을 가르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을 가르칠지라도 그 출처가 하나님께 있느냐, 아니면 사람에게 있느냐로 나눠집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것으로 사람의 말을 가르치느냐? 이렇게 나눠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물러야 할 자리는 하나님께서 보증해 주시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출처로 하는 것에 있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것으로 사람의 말을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다시금 묻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19절을 보시면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육체를 따라 판단하자면 육신의 아버지 요셉을 의식하면서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것이지만, 지금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을 종종 말했기 때문에 네가 말하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네 아버지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너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하는데, 그런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겠지만 내가 나를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즉 저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지라도 나를 믿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고 참되게 부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유일한 중보자로 여기지 않는 한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길과 진리요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 한 말로는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참되게 믿고 섬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로 오시면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는데, 헌금함 앞에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헌금함 앞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빛임을, 자신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인해 바리새인들과 논쟁한 것도 많은 사람이 듣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잡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은 잡고자 하나 잡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말씀하신 바 있는 것처럼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잡고자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그의 말씀의 권위가 그를 잡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고, 그렇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앞선 말씀에 근거하자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죽어야 할 때도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의 죽음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모든 사명을 다 완수하시는 때입니다. 그때까지는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하나님 지식에 합당하게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다면 어떤 거짓에도 굴복하지 않고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다수일 수 있습니다. 다수일 뿐만 아니라 세상 힘에 있어서도 저들 편이 더 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지식과 그 지식에 합당한 것만을 갖추고 있는 그들 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하나님만 경외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지식의 풍성함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그 지식의 풍성함만이 우리로 하여금 참된 것을 말하고 참된 것만을 따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을 출처로 하는 가르침에만 머물러야지, 그 외에 다른 것으로 우리의 생명을 삼아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