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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는 왕인데 잠행중이다>의 줄거리:
임금들이 신분을 숨기고 다니며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는 잠행에서, 화려한 용포 대신 남루한 평상복을 입게 될 경우 이를 미복잠행(微服潛行)이라 했습니다. 선민의 삶은 바로 이러한 미복잠행입니다. 내 형편과 처지 신분 외모까지, 모두 왕 된 신분을 숨기기 위한 미복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선민이 미복잠행을 하는 중에 그만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잊게 되었습니다. 남루한 미복을 곧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지금 잠행중임을 일깨워야 합니다.
나는 왕인데 잠행중이다
(에스겔 46:1~24)
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안뜰 동쪽을 향한 문은 일하는 엿새 동안에는 닫되 안식일에는 열며 초하루에도 열고
2. 군주는 바깥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와서 문 벽 곁에 서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요 군주는 문 통로에서 예배한 후에 밖으로 나가고 그 문은 저녁까지 닫지 말 것이며
3. 이 땅 백성도 안식일과 초하루에 이 문 입구에서 나 여호와 앞에 예배할 것이며
8. 군주가 올 때에는 이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오고 나갈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9. 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백성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지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 대로 나갈지며
10. 군주가 무리 가운데에 있어서 그들이 들어올 때에 들어오고 그들이 나갈 때에 나갈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는 왕인데 잠행중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는 왕인데 잠행중이다’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임금님들의 잠행에 관한 이야기가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이 잠행에 종종 미복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미복잠행(微服潛行)이라고 합니다. 임금이 신분을 숨기고 다니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는 잠행에서, 화려한 용포 대신 남루한 평상복을 입게 될 경우를 미복잠행(微服潛行)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미복잠행과 연관된 한 민담이 있습니다. 상가승무노인탄(喪歌僧舞老人嘆)으로써 상주는 노래하고 스님은 춤추고 노인은 탄식한다는 뜻입니다. 옛날 숙종 임금이 미복잠행을 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저녁 한 고을을 지나가는데 마침 상가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주는 노래하고 여승이 춤을 추고 노인이 탄식하며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신기하게 여긴 임금님이 그 연유를 물으니 노인이 대답하기를 오늘이 아내의 제삿날인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 며느리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서 제물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아들은 노래를 부르고 삭발한 며느리는 춤을 춘다고 합니다.
부모를 극진히 모시고자 하는 아들 내외의 효성에 감탄한 임금은 이 아들에게 나라에서 별과가 시행된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아들이 시험장에 가보니 시제가 상가승무노인탄(喪歌僧舞老人嘆)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의미를 알 수가 없었지만 아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빗대어 글을 지어 장원급제하였고 높은 벼슬에 올라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적으로 보자면 선민은 민담 속에 나오는 숙종 임금의 위치에 서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선민들이 미복잠행에 빠져서 자신이 왕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지금의 처지나 형편, 외모나 신분, 건강상태 등은 잠행을 위해 걸친 미복 즉 남루한 옷입니다. 이것들은 진정한 나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섭리자로서 이 땅을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내가 왕인 이유는 내 마음을 예수님에게 드렸더니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을 하나님 우편까지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 마음이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 있으므로 하나님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나의 아래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직장인이라면 예수님께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 우편에 있는 예수님의 자리까지 올라간 내 마음에 대해서 직장 전체는 내 아래에 있게 됩니다. 이렇게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왕의 위치에 있게 됩니다. 물론 삶이 진행되는 모습은 제각각일 것입니다. 회사에서 과장의 위치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잠행을 위한 미복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이 왕의 직분을 잊고 미복잠행하는 모습에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신입사원에서 대리로 대리에서 과장으로 과장에서 부장으로 바꿔 입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마크 트웨인의 단편 소설 “왕자와 거지”를 보면 똑같이 생긴 왕자와 거지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으면서 삶이 바뀌게 됩니다. 왕자는 거지의 삶을 살게 된 후에도 자신이 왕자라는 신분의식을 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무리 왕자임을 주장하여도 거지의 옷을 입었기에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선민은 내가 지금 왕으로써 전부 내 밑에 있다는 것을 망각한 채, 단지 이 세상에서 내 몸이 처해있는 위치와 신분과 처지와 환경의 미복을 입고 마치 그런 사람인 줄로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왕자와 거지에서 거지는 왕자의 옷을 입고 왕자라고 했지만, 선민은 자기가 왕인 줄 알고 거지 옷을 입은 채 거지인척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거지처럼 여길지라도 상관하지 않고 왕으로써 미복잠행을 해나가야 합니다.
설령 돈이 없을지라도 나의 정체성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왕입니다. 실제로 세상 모든 것이 내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이라는 옷을 입고 잠행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잠행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입니다. 심지어 배우자도 자녀도 나의 미복입니다. 아내로써 남편으로써 관계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엄마로써 아빠로써 자녀들과 관계할 때에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한 왕의 잠행이 됩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조건이 이와 같습니다. 외모가 못난 것은 나의 실제 정체성이 아닙니다. 반대로 외모가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그것 또한 정체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에 베드로는 산 아래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을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그러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어서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과 성령님과 함께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연예인들의 외모를 부러워하지만 하늘나라에서 약속되고 결정된 나의 신분의 옷을 생각하면 남루할 뿐입니다. 실제로는 이들 또한 똑같은 잠행을 위한 미복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선민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선민은 곧 성전을 생활화하는 사람입니다. 성전 생활화를 통해 마음을 하나님 우편으로 보내어 하늘의 시점에서 땅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입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위치에 갈 수 있는지 죄송스럽고 두렵고 황송할 따름입니다. 이 성전 생활화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완성 되었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마음을 보냄으로써 하늘의 시점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 믿음 하나로 우리는 대단한 일을 하지 않고도 하나님 우편에 예수님과 함께 앉게 됩니다. 세상의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 존재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왕입니다. 성전 생활화를 하는 선민의 모습이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고 살아가는 모습이기에 왕이라는 것입니다.
왕에 대한 언급이 계속되는 가운데 백성들의 모습이 살짝 곁들여져 있습니다. 왕으로써 삶의 현장에서의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왕이 미복으로 갈아입고 잠행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앞서 보았던 45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신년절, 유월절, 장막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고, 본문에서는 안식일과 월삭과 상번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모든 절기에 대한 이야기들은 결국 성전을 생활화하기 위한 규정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민수기 등에서 언급되는 제사와는 다르게 제사장이 아닌 왕이 제사를 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왕은 이렇게 하고 백성들이 같이 한다, 백성들이 갈 때에 왕도 함께 한다, 왕은 어디에 서있고 백성들도 거기에 서서 제사를 드린다는 식입니다.
2~3절을 보면 ‘군주는 바깥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와서 문 벽 곁에 서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요 군주는 문 통로에서 예배한 후에 밖으로 나가고 그 문은 저녁까지 닫지 말 것이며 / 이 땅 백성도 안식일과 초하루에 이 문 입구에서 나 여호와 앞에 예배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제사가 이루어지는 성전은 에스겔이 환상에서 보았던 가로 세로 275m의 정방형의 모습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왕이 들어오는 문은 남문이나 북문입니다. 바깥 동문은 닫아걸었습니다. 한편 제사장이 번제를 드리는 안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문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바깥뜰에서 안뜰로 들어오는 동문은 평소에는 닫아두었다가 안식일에는 열어두었습니다. 왕은 문을 완전히 넘어 안뜰로 들어가지는 않고 문간에 서서 제사가 드려지는 모습을 보며 제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백성들도 왕의 곁에 서서 제사에 참여합니다.
선민 각자가 성전을 생활화할 때에 선민다움은 주어지고 유지될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은 역사상 세워진 적이 없던 성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성전의 환상은 곧 죽으시고 부활하실 예수님의 몸을 가리킵니다. 이 성전을 생활화한다는 것은 곧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생활화에 대해 왕을 기준으로 백성들의 이야기가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 되시는 예수님에게 마음을 드림으로써 연합하는 자들의 마음이 왕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택하신 족속은 곧 성전을 생활화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성전을 생활화하는 자들이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또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일반 백성 각자가 성전 생활화함을 통해 왕이 되는 것을 나타내고 있음이 본문의 말씀과 상통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의 몸을 성전삼아 성전 생활화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의 시점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이 땅을 살아감에 있어서 원하지 않았음에도 모든 대상이 항상 내 밑에 있게 됩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적용해봅니다. 가정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때에 내가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면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우편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면 하늘의 시점을 갖게 되어 위치상 부모님도 내 아래에 있게 됩니다. 나보다 높은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십니다. 자녀로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잠행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학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부모공경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왕처럼 된 우리를 향해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참 선민이라면 이웃을 사랑함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럴 때에 진정한 사랑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을 전파하다 산헤드린공회에 붙잡히게 됩니다. 이들에게서 더 이상 예수를 전파하지 말라는 협박을 당하고 매를 맞게 됩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산헤드린공회는 유대사회의 최고의결기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지 않은 자들이었고,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서 빠져나간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원들은 유대사회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이 위치한 하늘에 비해서는 하늘 아래의 뫼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와 요한은 이들의 말을 들어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직장에서 신입사원이기 때문에 상사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아입니다. 나의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 회사에 다니며 순종하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잠행 중에 왕으로써의 정체성을 잊어버린 선민들이 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모습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드립니다. 그래서 이 남루한 모습을 벗어버리기 위해 남보다 더 많이 갖고자 노력합니다. 잠행중임을 기억한다면 지금 주어진 처지나 형편에 대해 불평이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는 곳마다 이루어지기 위해서 잠행을 하고 있는 것이고 잠행에 필요한 행색을 갖춘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떤 신분과 직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설령 대통령 직분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시점에서 본다면 이 또한 남루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렇게 보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나라에서 제일 높은 지위일지라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들의 지위보다 높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 자리는 고사하고 조그만 권력이라도 얻어 보겠다고 평생을 물고 뜯고 싸우는 이유는 잠행임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직업이 마찬가지이고, 내게 주어진 모든 처지와 형편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께 마음을 드림으로써 예수님이 누리시는 모든 특권과 지위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미복잠행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땅의 삶에서 하늘에 존재하는 예수님의 모든 특권과 지위가 주어진다면 하나님의 어떤 뜻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황홀경에 빠져서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살자고 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지금 비록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은 아니고, 한 사람의 배우자로 사는 것이 당신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잠행을 하는 왕의 정체성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잠행을 동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된 언급이 8~10절에서 나타납니다. 선민들은 성전에 올 때에 동문은 닫아걸었기 때문에 남문이나 북문을 통해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제사가 끝난 후에는 자기가 온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온 길로 돌아가지 말고 계속 진행해서 남문으로 들어 온 사람은 북문으로 나가고, 북문으로 들어 온 사람은 남문으로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성전을 한 바퀴 돌아서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왕은 백성들과는 달리 남문으로 들어 왔으면 남문으로 나가고 북문으로 들어 왔으면 북문으로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선민 각자가 왕의 모습과 백성으로써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앞서도 왕의 이야기가 나타나며 백성이 언급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일터에서 살아가고 왕은 왕궁에서 살아갑니다. 선민들은 왕의 마음으로 잠행을 하면서 살아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이 백성과 왕이 한 자리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왕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모습은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있는 상태로부터 백성에게로 보내지는 자임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하다가 백성을 대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왕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은 잠행하기 전에 성전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으로 채워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선민이 왕이라는 신분에 대한 의식과 자각이 분명해 질 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아래에 위치한 자들을 대할 때에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을 만난 후에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 온 길로 돌아가는 모습을 통해 나타납니다.
청나라에서 조선에 파견된 대사는 조선의 왕 앞에서 예의를 지키지만 왕의 말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대사가 따르는 자는 오직 청나라 황제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잠행을 떠난 자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한편 백성들은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고 다른 문을 통해서 빠져나갔습니다. 이것은 한 순간도 하나님께 등을 돌리지 말고 계속해서 하나님 향하기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향함이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민에게 주어진 왕과 백성으로써의 두 가지 모습입니다.
왕은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일을 반복합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하나님 이외에는 필요한 다른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의식을 되풀이하며 자각하는 것이 왕으로써의 정체성입니다. 돈이 없어서 가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난한 모습은 잠행할 때에 입는 미복입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나의 삶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아는 것이 왕의 의식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왕이 된 자들은 마음이 반드시 하나님 우편까지 가서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 불평하고 몸이 아파서 걱정한다는 것은 왕의 정체성을 잊은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땅에 머물게 된 결과입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십자가를 붙잡고 왕 된 신분을 되찾아야 합니다. 세상을 발아래로 볼 수 있는 하나님 우편으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선민이 대하는 세상에서는 대기업의 총수나 대통령조차도 반드시 내 발 아래에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온전히 활성화 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활성화 된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된다면 세상은 내 발 아래에 놓이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받아들이시듯이 나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받아들여서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고 가족이나 직장 등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필요로 하는 자이기에 왕입니다. 또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갖기 위해 되돌아가는 자입니다.
또 백성은 한 방향을 유지하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모습이 백성입니다.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만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좋은 상황이 주어질 수도 있고 궂은 상황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바람이 불든 비가 오든 오직 하나님이 계신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뜻을 가질 필요가 없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선민은 왕과 백성이라는 두 기둥을 붙잡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하나님 이외는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가지면 왕 같은 마음가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스스로 원해서 왕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믿음을 가질 때에 원하지 않더라도 왕의 위치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왕의 마음의 기쁨과 만족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해결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채워진 마음에서는 세상을 발 아래로 보게 됩니다. 내 발로 짓밟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양육하고 회사를 다닙니다. 왕이 미복잠행을 하듯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왕입니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에서 거지가 왕자의 옷을 입고 왕자를 자처하는 것과 반대입니다. 왕이지만 미복잠행하며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잠행의 의식을 잃지 않고 왕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이 세상의 모든 형편과 처지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내가 왕이기에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나를 얽매이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나의 삶의 환경과 처지는 잠행을 위한 미복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각자가 이 세상을 발밑에 둘 수밖에 없는 왕 같은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높아지기 위해서 왕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셨습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께 마음을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함께 높이십니다. 지금 이 땅의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 왕의 미복잠행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왕으로써 미복잠행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나의 왕 됨을 되찾을 수 있게 해주셔서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 땅의 삶의 처지를 미복잠행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