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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이규현목사/오직 나의 신으로 (슥 4:6)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방법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의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흔히 노하우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세상은 늘 노하우, 방법론을 따집니다. 서점을 가면 방법론과 관련된 책으로 빼곡합니다. 그런 방법론을 찾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원리가 잡혀있는 사람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논리가 잡혀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방법론이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도 노하우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룬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발한 방법으로 승리했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할 때는 전술이 없었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을 때도 전략도 의논한 것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승리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주 무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관점으로 그것을 간파하기란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다 깨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경이 유독 순종을 요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순종을 먼저 요구하시고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가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라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신자로 살 때 붙잡아야 할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을 보면 주님이 스룹바벨의 경험을 이야기하시는데 스가랴에게 환상이 보이기 전에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한 번 성전재건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재건에 실패했고 그 뒤에 이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너희의 힘과 능력으로 하려고 했지만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말씀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적인 능력을 자랑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려고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젊을수록 더 강합니다. 또 자신의 것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더 그렇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거나 똑똑하거나 갖춰져 있고 준비되어있는 사람은 야심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이 나를 쓰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과대망상증이 다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조금 꺾여서 그렇지 자신이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쓰임 받을 때가 안 된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열정은 있는데 열정에 혈기가 있습니다. 비전은 너무나 아름답고 좋은데 들어보면 그 안에 인간적 야망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밀 카메라에 잡히게 되어있습니다. 비전이 아무리 좋아도 그 비전을 이루는 사람 안에 혈기와 인간적 야망이 있으면 일이 되다가도 반드시 문제가 터지게 되어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도 실패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힘을 믿고 하나님의 일에 뛰어들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대표적입니다. 40세까지 세계 최강이었던 애굽의 왕실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라면서 최고의 학문을 통달하고 아주 높은 프라이드가 있었기 때문에 민족의 해결사가 될 것이라는 과대망상증에 빠져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충분히 준비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력을 갖추고 대단한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되지만, 그 안에는 혈기가 있었습니다. 세상 학문의 허점은 아무리 공부해도 혈기를 다루는 학문은 없다는 것입니다. 기를 세워주고 자만하게 하는 학문이지 자기의 존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혈기를 가진 열정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전에 자기가 먼저 다칩니다. 사울왕도 자신이 가진 것이 많았습니다. 외모도 다른 사람보다 크고 인물도 좋았고 리더십도 있었지만, 자신 안에 있는 치밀어 오르는 혈기를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의 제사를 드릴 때 사무엘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드렸습니다. 혈과 야망이 있어서 못 기다린 것입니다. 분노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이루려는 혈기가 결국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도 혈기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에너지를 쏟아야 할 때 쏟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쏟았습니다. 삼손도 하나님께 받은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나실인으로 부름 받아 멋지게 하나님의 목적으로 쓰임 받아야 할 사람인데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해 자신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내가 어떤 능력과 재능과 돈과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 자체로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야망과 혈기가 처리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쓰실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사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신자는 드러나지 않지만, 은근히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우리에게는 인본주의적 위험이 있습니다. 인본주의는 무슨 일을 할 때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결정합니다. 자아의 혈기, 자의지가 발동해서 결정하고 내 인생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은근히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인본주의입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일하실 공간을 내어드리지 않습니다. 열심히 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배제된 열심히 아주 무섭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역하면서 열심히 하는 교인들에게 그 열심히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늘 메시지를 통해서 말합니다. 열심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의 내면이 어디서 나오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열심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면 반드시 사고 치게 되어있습니다. 게으른 사람도 문제지만 게으른 사람보다 더 큰 문제는 잘못된 열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모든 역사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그래서 역사를 history라고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의 어떤 부분을 떼어서 보아도 하나님 없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인간이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어떤 성경도 해석되지 않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일, 여리고를 무너뜨린 일, 요단강을 가른 일, 가나안을 정복한 일, 광야를 지나는 모든 길, 한나의 이야기, 사무엘의 이야기, 다윗의 이야기, 이스라엘의 구원사를 이끌어가는 모든 일 한가운데 그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하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서 오늘 교회가 여기까지 서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작품이고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능력이고 열심이라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앉아있는 것은 감동적인 일입니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 중에서 귀퉁이에 숨어있는 조선에 복음이 들어와 근대사 100년 동안 온 세계가 깜짝 놀랄 만큼 기독교가 왕성한 나라가 일어나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우상의 도시에 수영로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부르신 것도 오묘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반대로 인간의 역사를 보면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만들어진 것은 역사 속에서 늘 망가뜨려 졌습니다. 차라리 인간이 손을 데지 않았더라면 좋았다고 생각됩니다. 문명이 들어가면 좋아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더 악해집니다. 성경에서도, 인류의 문명사에서도 보면 도시의 문화는 항상 바벨론 문화로 상징됩니다. 요한 계시록에도 보면 바벨론의 음녀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성과 대조를 이루면서 현대 세속 도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도시로 가면 자녀를 잃어버린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 도시 안에서 영혼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가 점점 좋아져 가는 것이 아니라 나빠져 가고 있습니다. 현재 환경만 봐도 끔찍합니다. 죄로 인한 인간의 탐욕이 망가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타락이 나오면서 11장 바벨탑 사건까지 보면 죄악이 관영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오늘 도시 문명의 사회악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역사는 늘 실패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실패의 자리에서 늘 하나님은 구원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이유는 인간의 타락과 자만심을 최대한 막고 하나님의 역사와 영광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는 인간이 만들어낸 악과 타락, 반하나님적 문화와 맞대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바벨론의 문명이 화려하고 거대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볼품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열어서 보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고 태가 닫혀 소망이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시고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일으키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일으키시고 신앙의 교회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도도하게 이어가게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움직여 나가셔서 작은 자가 천을 이루는 기적을 허락하셨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를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나옵니다. 새로운 왕은 전체국가를 만들고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압제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니까 산파에게 히브리 남자아기를 다 죽게 하는데 애굽의 왕이 하나님의 백성을 탄압하고 죽이려고 하지만, 히브리 민족은 창대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세를 일으키시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십니다. 이것이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과의 팽팽한 기 싸움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 세속 도시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고 하나님이 구원사를 이끄는 야무진 백성으로 세워져 가야 할지 고민합니다. 정치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혈과 육으로 살려고 하는 인본주의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살아가려는 신본주의의 싸움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육으로 살 것인가 영으로 살 것인가 두 개의 세계가 내 안에서 치열하게 싸웁니다. 혈기가 앞서면 세상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세우면 인간의 방법과 술수가 판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는 살인과 강도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내세우는 인본주의, 하나님의 지혜를 순종하기보다 나의 재주와 나의 이성을 더 우선시하는 것이 더 무서운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 힘, 나의 혈기, 자아 중심적 의지를 꺾는 것입니다. 힘으로도 안 되고 능력으로도 안된다는 말씀이 우리 가슴에 깊이 와 닿아야 합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마음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고 내가 쌓아왔던 것으로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아야 하는데 인간이 쉽게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습니다. 자아가 강해서 혈기가 죽을 때까지 잘 꺾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내 힘으로 안 된다는 철저한 자기 절망을 만난 이후에라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됩니다. 내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그것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완전히 밑바닥까지 가야 하는 경험, 출구가 없는 경험을 해야 힘을 뺍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는데도 온전한 복종을 하는 사람이라면 큰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모세는 값비싼 대가를 통해 자아 중심적 혈기가 죽고 이스라엘 백성을 데라고 갔습니다. 모세를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시려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묻혀 있었던 사람을 끌고 나온 하나님의 의도는 기가 막힙니다. 거친 노예 생활로 잔뼈가 굵어 잘못하면 돌로 죽이려 하고 반역과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면서 모세는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전혀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민수기서를 보면 모세의 모습은 언제나 무릎을 꿇습니다. 이것은 미디안 40년을 통해서 자아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거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신약의 사도행전에서도 그 비슷한 상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사람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추정된 곳에 가보니 120명이 들어가기는 어려운 방이었습니다. 꼼짝하지 않고 모여서 기도만 한 것입니다. 회의를 하거나 대책을 세운 흔적은 없습니다. 기간을 정해놓은 것도 아닙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기도만 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 일이 이루어지지 그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스가랴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구약이나 신약 모두 동일한 원리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과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는 똑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 종말론과 성령의 연관성을 말씀합니다. 특히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말세의 특징은 정신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모스에도 사람들이 굉장히 빨리 왕래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KTX, 비행기, 고속도로, 터널을 뚫어 얼마나 빨라졌는지 모릅니다. 편리해졌다는 말은 아주 분주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말세는 영적, 도적적으로 부패합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심각성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극장에 들어갔을 때 영화가 시작되었다면 깜깜해서 더듬거리며 들어가게 되지만, 미리 들어가 앉아있는 사람은 어둠에 금방 익숙해져 있습니다. 오늘 세상은 총체적으로 타락하고 어두워져 있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 듣게 되면 둔감해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주 많이 있었지만, 선지자들의 말을 심각하게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노아 홍수의 시대에 살았다면 홍수 직전에 나는 노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심각함이 사라졌다는 것은 위험한 징후입니다. 말세는 영적나 모든 면에서 어려운 시대적 환경에 있습니다.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간절히 찾고 붙들어야 할 것은 인간의 욕망과 혈기와 우리 중심적인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입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을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은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 생각과 열심이 앞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 방법으로 서두르지 않고 성령께 시간을 충분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기다려야 합니다. 신자는 기다리는 태도를 습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시도록 기다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의 지상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늘 새벽 미명에 기도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을 보면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얼마나 큰 성령의 감동 가운데 계셨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가장 힘들고 가장 좋은 사역입니다. 혈기가 나오면 기다리지 못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있는데 하늘 결제를 기다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신자의 능력은 나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그냥 시간을 보내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 힘을 빼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 49절에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성령의 임하심이 없는 삶은 자신의 힘에 자신이 무너집니다. 성령이 나를 주장하지 않으면 육신의 소욕이 나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내 안에 있는 육은 무력해지고 죄의 본성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를 보면 이런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힘, 역동성이 있습니다. 성령이 한 것과 사람이 한 것은 너무도 다릅니다. 사도행전에서 일어나는 역동성은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하나를 보면 열두제자가 한 번도 본적도 생각해 본적도 없는 길로 이끌어갑니다. 나중에는 베드로마저도 성령이 임하셨지만, 너무 빠르게 데리고 가니까 성령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찾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3번이나 환상을 보이셨습니다. 성령이 너무도 강하게 끌고 가시는데 자신의 문화와 관심의 틀 안에 갇혀 따라가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달라졌습니다. 그를 위협하는 거대한 체제도 그를 위협하지 못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모든 것이 물이 흐르듯, 바람이 불 듯, 불이 타는 것처럼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도도, 사람의 평가도 아닌 성령이 주체가 되어 각 사람에게 임하셔서 끌고 가십니다. 나를 움직이고 춤을 추게 하고 생명을 걸게 하는 것이 성령이 되도록 나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나의 영으로’ 되는 일은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가 생각지 못한 파격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말세에 남녀여종에게 영을 부어주신다고 하셨는데 평범한 사람에게 주의 영이 임해서 사도들과 똑같은 분량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는 선한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선한 일은 위에서부터 임합니다. 내 힘으로, 내 혈기로 한 일은 나중에는 다 물거품이 됩니다. 일을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내 손에서 벗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하시면 우리는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편견과 지역과 인종을 다 넘어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것은 성경의 확실한 증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기 원하는데 문제는 내 자아와 내 재주와 경험, 혈기입니다. 그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성령을 사모하시고 기다리십시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춤을 추십시오. 성령이 나를 데리고 가실 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령이 책임지십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혈기를 빼고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에 내어 맡기고 성령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나아가면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 길로 걷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내 삶에 일어나고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의 역사 속에 우리를 사용하셔서 영광스러운 백성이 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밤에 여러분의 혈기를 다 내려놓으십시오.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주의 영이 임하셔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분께 맡기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기이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새로운 역사가 쓰이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혈기, 힘은 빼고 주님의 주권에 온전히 맡기고 성령의 말씀에 춤을 추는 인생이 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