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에 들어서서 먼저 만나는 곳은 윤선도문학관이다
그러나 대개 문을 닫아 놓는가 보다
조금 더 차로 이동하면 학교가 나오고 학교를 돌아가면 세연정 입장 매표소가 나온다
입장료는 성인 1인당 3000원이다 먼저 실내 전시관으로 통해져 있다
원림은 사적 제368호 보길도윤선도유적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월 8일 보길도윤선도원림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명승 제34호로 재지정되었다.
유물전에서 나가면 세연정으로 이어져 있다
이 섬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격자봉(格紫峰)을 중심으로 하여 동북 방향으로 아름다운 계류가 흐르고 있는데, 윤선도는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이 일대에 정사(亭舍)와 연못을 축조하여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였다.
화담 서경덕의 화담, 율곡 이이가 조성한 석담구곡 등이 나라 안에 조성된 대표적 정원인데 완도군 보길도에 있는 윤선도가 조성한 세연정도 그 한 자리를 차지한다.
고산 윤선도가 완도의 보길도에 자리를 잡은 것은 병자호란 이후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세상에 환멸을 느껴서 제주도로 가는 길에 보길도를 발견하고 지은 정원으로 이곳에서 윤선도는 글을 쓰면서 풍류를 즐겼다.
고산은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닭울음 소리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한 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후 네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악공들을 거느리고 석실이나 세연정에 나가 자연과 벗하며 놀았다.
낙서재는 고산 윤선도가 이곳에 유배할 당시 살았던 곳으로 윤선도가 살았을 당시에는 초가였던 곳을 후손이 기와집으로 개축하였는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어쨌든 이곳 세연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이 조성된 보길도는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윤선도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윤선도는 1587년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후사가 없었던 윤씨 종가에 입양된 윤선도는 특별한 스승 없이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병자호란이 끝나면서부터였다.
해남에 있던 윤선도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구원병을 모아 배를 이용해 강화도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강화도마저 함락된 뒤였다.
할 수 없이 배를 돌려 귀향하는 길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실의에 찬 그에게 서인들로부터 ‘남한산성에서 임금이 고생하고 있을 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비난까지 빗발치듯 들려왔다. 그는 세상을 다시 보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고 제주도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풍랑이 거칠어 보길도에 오게 된 윤선도는 이 섬의 아름다운 경치와 아늑한 분위기에 매혹되어 제주행을 포기하고 기암절벽과 동백나무가 어우러진 보길도에 머물게 되었다.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하고, 정치 싸움에서 찌들고 멍든 마음을 이곳에서 풍류로써 달랬던 듯하다.
바위틈에서 솟는 물을 막아 연못(세연지)을 만들고 가운데에는 섬을 조성해 큰 바위와 소나무들을 옮겨놓았으며, 그 둘레에 정자를 세우고 세연정洗然亭이라 이름 지었다.
윤선도의 5대 손인 윤위가 보길도를 방문한 뒤 쓴 <보길도지>에 윤선도가 보길도의 세연정에서 지냈던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일기가 청화(淸和)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하였다. 학관(고산의 서자)의 어머니는 오찬을 갖추어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侍立)하고 기희(妓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
그리고 남자아이에게 채색 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어부사시사>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에게 동·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또는 옥소암(玉簫岩)에서 춤을 추게도 하였다.
이렇게 너울너울 춤추는 것은 음절에 맞았거니와, 그 몸놀림을 못 속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칠암(七岩, 세연지에 잠긴 바위들)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동·서도(양쪽 연못 안에 있는 섬)에서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무민당에 돌아왔다. 그 후에는 촛불을 밝히고 밤놀이를 하였다.
이러한 일과는 고산이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으면 거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며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세연정에서 부용리 쪽으로 약 1.5㎞쯤 들어가면 낙서재(樂書齋) 건너편 산비탈에 동천석실(洞天石室)이 있다. 이곳은 1,000여평의 공간으로 석문(石門)·석담(石潭)·석천(石泉)·석폭(石瀑)·석대(石臺)·희황교(羲皇橋)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윤선도는 1637년부터 85세로 죽을 때까지 일곱 차례나 보길도에 왔다갔다 하면서 13년 동안을 머물렀다. 이곳에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겼다.
그렇게 세연정과 이별하고 다시 보길도를 나와 노화도에서 점심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