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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 추수되면 심판은 없습니다. / 2022년 11월 20일 주일 예배
본문 / 창세기 50:1-26
추수감사절에 사람들은 감사가 생각나는지 몰라도 저는 먼저 심판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뿌린 씨와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셨습니다. 농부가 가을이 되면 열매를 추수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열매로 그 나무를 심판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거두는 추수는 곧 그 나무가 어떤지를 판단하는 심판인 겁니다. 예수님은 좋은 열매를 맺으면 좋은 나무고 또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고 또 나쁜 열매가 맺으면 나쁜 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지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추수는 장차 이 세상에서 내 인생을 마치고 그 죽음으로 육체를 벗고 내 영혼이 천국과 지옥의 결정되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세상에 뿌리고 심은 농부이신 하나님께 그 영혼과 믿음을 추수하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추수감사절에 추수한 열매를 놓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선별하는 농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이 강단에 채소나 과일을 장식해 놓고 헌금 좀 드리고 밥 먹고 좋아하는 날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의 끝이요 추수꾼들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추수는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앞으로 내 영혼을 추수하여 그 믿음을 심판하는 두렵고 떨리는 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농부가 추수하는 밭에는 농부의 마음에 들지 않아 버려진 것들이 있습니다. 썩은 열매나 속이 빈 쭉정이는 밭에서 불에 태우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람의 그 영혼을 추수할 때에도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은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고 하신 겁니다. 그 고통이 상상이 됩니까? 영원히 그 불 못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인생은 단지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의 구원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추수할 그 날을 준비하지 않는 자들은 미친 자들인 것입니다.
지금은 살아 숨을 쉬고 있으니 죽음이 실감이 안 나지만 우리는 지금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고 그 육체의 죽음은 추수 곧 심판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마지막 50장이 야곱의 장사와 요셉의 죽음으로 즉 추수로 끝이 납니다. 생명으로 시작한 창세기가 그 마지막은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생명으로 시작하였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타락한 죄인들의 고통스런 실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는 야곱과 요셉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은 그 죽음 즉 추수를 통해 사망과 심판을 이기는 복음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14절까지는 야곱의 죽음과 장사에 관한 말씀이고 22절부터 26절까지는 요셉의 죽음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죽음과 요셉의 죽음에 관하여 증언하는 창세기의 관점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죽음과 장사에는 그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애곡과 슬픔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야곱의 죽음에 대하여 칠십 일을 애곡하였다고 합니다. 야곱의 시신을 가나안으로 운구하였을 때에도 사람들은 칠일 동안 애곡하였습니다.
야곱은 애굽 사람들에게 이방인입니다. 야곱은 147살에 죽었고 애굽에서는 17년을 살았습니다. 147살에 죽은 외국인을 위해 칠십일이나 슬픔이 나오겠습니까? 야곱과 뭔 정이 들었다고 말입니다. 아무리 슬퍼도 사람의 감정은 곧 바닥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왜 애굽 사람들은 야곱의 죽음에 대해 칠십일이나 애곡하는 것일까요?
야곱의 죽음과 장사에는 타락한 인간의 깊은 실존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타락하여 그 생명의 근원을 떠나 정녕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 없는 존재로 떨어진 인간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곱은 죽어 하나님 나라에 갔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죽음과 장사로 생명 없는 자로 타락한 인간의 고통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생명 없는 자가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소망 없는 자들이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실존을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이 야곱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 무리를 향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애통이 아닌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을 의미하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모른척하고 살아서 그렇지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며 고통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죽음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내 죽음을 내가 애통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보기 때문에 죽음을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죽음 앞에서 큰 소리를 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빨리 죽으면 빨리 천국 가는 것 아니냐? 새파랗게 젊은 목사가 죽는 게 뭐가 두렵냐고 더 살려고 하지 말고 빨리 천국에 갈 생각을 하라고 하니 죽음이 멀지 않은 노인들은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이 들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자 죽음이 두려워 벌벌 떠는 제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죽음이 별 것 아닌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가 제 삶의 현실로 다가오자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알았습니다. 내가 성도들에게 죽음이 뭐가 두렵습니까? 죽으면 천국 아닙니까? 자신만만하게 말하였지만 저는 죽음을 즉 내 영혼과 믿음을 추수하는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준비가 전혀 안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도 심판도 모르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죽음을 슬퍼하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믿기 때문입니까? 그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환생한다고 믿습니다. 또 다시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시 태어날 것이니 슬퍼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됩니까? 무슬림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둠 안에 있는 자들은 자신이 가는 길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신자들도 죽으면 그만이라는 신념이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고 죽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그 심판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추수하는 그 심판이 준비가 안 되면 죽음보다 두려운 게 없는 겁니다.
죽어서 내 존재가 사라진다면 슬프기는 해도 두렵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삶을 끝낼 수도 있으니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영원불멸의 존재입니다. 인간은 영원히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타락하여 저주를 받은 육신은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가 심판을 받고 그곳에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져 영원한 안식을 얻지 못하면 불 못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죽음은 그래서 두렵고 심판은 그래서 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추수하는 심판을 믿지 못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죽음은 곧 애굽 사람들처럼 처절한 슬픔과 고통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죽으면 이건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비극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추수하는 죽음이 심판이라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어보면 세상에서 도저히 경험할 수 없었던 두려움이고 고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외면하고 믿지 않은 그 결과는 정말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죽음은 야곱과 죽음과 장사와는 다릅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말씀합니다.
요셉의 죽음에 관하여는 애곡하고 애통하였다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요셉은 장사하였다고 말하지도 않고 입관하였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입관만 하고 끝나는 장사가 있습니까? 요셉의 죽음은 입관하였다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요셉의 장례식은 언제 치러집니까? 여호수아 24장에서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장례는 애굽에서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안식을 얻었을 때 그 약속의 땅에서 장례식이 치러진 것입니다.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성도의 죽음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육신을 위해 살던 그 소망 없는 죄인들 즉 열매 없는 쭉정이와 가라지에게는 세상을 떠나는 그 죽음은 즉 하나님의 그 추수가 영원한 고통으로 가는 것이기에 애곡과 애통이지만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살던 성도들에게 그 영혼을 추수하는 죽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요셉은 죽을 때 이런 유언을 했다고 증언합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이 나의 육신은 애굽에서 죽지만 그 뼈를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에 장사하라고 명령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가는 곳에 불과하며 우리가 살 곳은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본향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에 오고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잠시 왔다가는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육체를 위해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다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자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마지막은 사망과 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간절한 소망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사망의 저주를 받은 죄인들이 어떻게 죄와 저주와 사망과 심판을 이기고 하나님이 그 영혼을 죽음으로 추수하실 때에 오히려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자들이 되었습니까? 왜 스물 살 아들이 백혈병으로 죽을 때 우리 아들 천국에 갔다고 소리치며 기뻐할 수 있습니까? 왜 주차장에서 중학생 아들이 죽는 것을 보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애통이 지배하는 야곱의 장사와 소망으로 결론이 나는 요셉의 그 죽음 사이에 있는 본문 15절부터 21절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타락한 모든 죄인들의 죽음은 심판을 받고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처절한 애통뿐이지만 그 죽음이 어떤 사람들에게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소망이 된 그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죽음과 장사와 요셉의 죽음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두려웠습니다. 자신들이 요셉에게 지은 죄 때문에 말입니다. 아버지가 죽자 요셉이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심판하지는 않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사실 자신들이 요셉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형들은 요셉을 죽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지는 못하고 노예로 팔아버렸으니 남의 손에 죽인 것입니다.
형들이 생각할 때 자신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들을 용서했다는 것이 이게 믿어지지가 않는 겁니다. 죄도 어지간한 죄를 지었어야지 말입니다. 동생을 죽이려다 노예로 팔았으니 세상에 이런 죄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 동생은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던 원수인 형들을 고난에서 건져주었고 동생이 베풀어주는 그 뜨거운 은혜로 자식들까지 풍족하게 살고 있으니 이건 정말 감당할 수가 없는 은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을 죽이려고 했는데 정말 요셉이 우리를 용서했을까? 우리를 정말 용서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형들의 말을 들을 때 요셉은 울었다고 합니다. 이미 용서한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죄로 두려워하는 형들을 볼 때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죄로 두려워하는 형들을 요셉이 이렇게 위로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자신을 죽이려던 원수를 용서하는 요셉의 사랑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나를 죽이려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그 원수들을 어떤 보상도 대가도 없이 일방적으로 용서하는 것도 모자라 그 원수들을 굶주림에서 구원하여 그 자식들까지 책임지고 살려내는 요셉의 사랑은 바로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할 자였던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망과 심판을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할 자들이 값없이 베풀어 주는 사랑을 받고, 용서 받을 수 없는 자들이 용서를 받게 되자 그 은혜로 인하여 죄와 저주와 심판과 사망을 이기고 즉 애곡과 애통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요셉의 형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인 죄인들이 아닙니까? 내 죄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버린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못을 박아 매단 그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자기 죄로 짊어지고 대신 죽으심으로 내 죄를 속량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회개만하면 어떤 죄든지 다 용서해 주시고 의롭다고 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하나님의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기억도 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죄를 용서받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를 두렵게 했던 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바울은 사망을 꾸짖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내 죄를 대속해주신 그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이제는 죄와 사망과 심판을 이기게 된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음으로 내 영혼을 추수하여도 그 심판대 앞에서 설 믿음의 담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아멘?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로 죄를 다 씻음 받고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정말 오늘 죽어서 심판대 앞에 서도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그 믿음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믿음을 속이고 속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 하면 구원을 받은 척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구원받은 자답게 사는 사람은 적은 겁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아도 택함을 입은 자들은 적다고 하셨습니다. 즉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은 적은 것입니다. 설령 구원을 받았어도 하나님이 그 영혼을 추수하는 날까지 구원을 이루어가지 않으면 어떻게 열매를 맺겠습니까?
나무를 심어놓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겁니까? 열매가 열려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열매로 나무를 판단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정말 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은 이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겁니다. 구원함을 받은 기쁨은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찬양하는 것처럼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많은 성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시답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 탄광에서 9일 만에 구조된 사람들이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제 살아있는 게 과거와는 다릅니다. 살아서 움직이고 숨 쉬는 게 너무 감사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어두운 지하 몇 백 미터에서 살아나온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감사과 감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두렵지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사는 하루 하루가 새로운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것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살던 나의 옛 사람이 죽고 하나님을 위해 믿음으로 사는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육신을 위해 살던 내가 죽고 예수님이 내 주인이 되어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구원을 받은 거듭난 믿음이며 새로운 삶인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들은 과거에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지만 이제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재물을, 하나님과 세상을, 하나님의 자신을 함께 두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정말 구원을 받은 것이겠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그 전에 섬기지 않던 하나님도 섬기니 믿음이 있다 생각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지만 추수해보면 쭉정인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믿음처럼 보였지만 말입니다.
심판대에서 알곡과 곡식으로 추수되는 그 구원은 적당히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영혼을 추수하기 전에 이걸 알아야 합니다. 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도 섬기고 사랑하는 그런 믿음을 받아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을 섬기는 자아숭배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은 구원은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그 불구덩이에 떨어져 영원히 견딜 수 없는 고통 받아야 할 그 저주받은 자가 기가 막히게도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데 다만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내 죄를 대신 지고 심판을 받으신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을 받은 은혜는 정말 기가 막힌 것입니다. 너무 기가 막혀 요셉의 형들처럼 의심이 갈 정도인 겁니다. 그런 기가 막힌 은혜로 구원을 받고 어떻게 내 마음대로 믿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감정대로 믿고 어떻게 적당히 믿고 어떻게 대충 하나님도 섬기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그 영혼을 추수하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열매 없는 자들과 빈 쭉정이로 드러나 불 못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벌레만도 못한 죄인을 구원해 주신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며 죄와 싸워가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추수하는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했다 하시고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여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의 남은 인생을 내 영혼을 추수하실 하나님의 심판을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 준비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날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