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반아 47
- 2021 11 27 오후6시
네 아비와 첫 만남을 가진 날이었구나
언젠가는 이렇게 기쁜 날이 올 것이라 예상은 하고 살았다. 내 어머니가 그러하셨듯 세상에 딸을 가진 어머니들이 그러하셨듯 어느날엔가는 맞닥뜨리게 될 것임을 알고 살았다. 다만 그 시점이 내 또래 친구들에 비해 인생길을 좀 더 멀리 걸어온 지점이라는 게 다르다면 다를 뿐.
10시면 잠자리에 드는 내 잠결에 방문을 빼꼼하게 연 딸아이가 조그맣게 엄마 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도 생생한 작년 11월 16일이 바로 그 기쁜 날의 시작이었을 터. 안구건조증으로 잠자다가 뜬 눈은 세상을 휘뿌옇게 보게 마련인데, 그 휘뿌연 가운데에서도 유독 내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엄마 이것 좀 봐. 백송이 선명한 붉은 장미꽃다발이 탁자 위에 놓여있었다. 딸아이 볼이 장미꽃만큼 상기되어 보였다.
갓 꺾어온 듯 피어나기 직전의 백송이 장미꽃봉오리들이 분홍과 보라와 흰빛종이에 곱게 감싸여 막 치장을 끝낸 신부 같았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너무 이쁘다 너무 이쁘다! 누군가로부터 특히 사랑하는 이로부터 장미 백송이를 받아보고 싶은 열망은 모든 여자들에게 있기 마련. 가난한 남자였던 내 남편은 장미 한 송이를 건네 주었지만 백송이 못지않게 나는 감동되었다. 백송이 장미꽃을 받은 딸아이는 어떤 마음일까? 내 가슴이 쿵쾅거렸다. 내일 당장에 딸아이가 그 남자에게로 가버릴 것 같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누구인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서두르듯 궁금해하는 내게, 딸아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덤덤하게 출근을 했다.
내 딸이 서른 셋이 되도록 남자친구가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딸들처럼 제 어미에게 시시콜콜 말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동안 남자 친구에 대해서 일언반구 말이 없어서 내가 혹시 의붓어미가 아닐까 되짚어본 적도 있다. 쉽사리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어미로서 일단은 섭섭함이 앞서기는 했다. 제 나름대로 어느 정도 확신이 없이는 말하지 않는 딸아이의 진중함을 엿본 것 같아 흡족하기도 했다.
꽃들이 만발한 종자골에서 남편과 내가 잡초와 씨름중이었던 토요일 어느 날에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우 택배가 왔다는 것이다. 냉장고에 넣을까 냉동실에 넣을까를 묻는 질문이었다. 누가 보냈는데? 집에 와서 봐. 내 질문에 딸아이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누가 보냈는데?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딸아이는 드디어 내게 말문을 열었다. 한우가 들어있던 가방에 붙어있는 송장을 뒤져 나는 이름을 보았다. 윤홍길이었다. 큰형부와 성이 같네 양반이지 젊잖지 부지런하지 머리 좋지. 난 혼자서 벌써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장미꽃 백송이를 준 그 오빠?란다. 딸아이는 어느 모임에서건 앞에 나서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그 오빠는 저보다 한걸음 빨라서 무어라 한 마디만 하면 이미 행동으로 시작한단다. 믿음이 가고 기대고 싶은 남자임이 분명했다.
결혼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야 한다는 게 서민으로 살아온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다. 부모 밑에서 보통으로 살아온 내 딸아이다. 다행히도 본인도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 좋단다. 돈이 많은 사람은 대체로 나태하고 거만하고 인성이 부족하고 상위권 직업을 가진 사람은 습관적으로 척을 많이 한단다. 웨이크보드를 타면서 만나는 사람들이며 어릴적부터 한동네서 친구로 지내온 십여 명의 남자친구들이며 어린이집을 십여년 간 들락거리며 꽤 많은 이들과 바쁘게 교류하며 살아온 딸이니만큼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었다. 딸이 좋다는 남자라면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날도 딸아이는 홍길을 만나러 나갔다. 궁금했던 나는 카톡에 문자를 날렸다. 홍길 보고 싶은데. 둘이서 찍은 사진이라도 한번 보내주지. 엄마한테 주는 선물로. 처음에는 아니라고 다음에 보내주겠다고 은근히 빼더니 카톡! 문자가 왔다. 숱이 많은 앞머리를 멋지게 빗어 올리고 눈매가 가늘지만 따스해 보이면서 의지가 돋보이는 청년이 내 딸아이 옆에 있었다. 웃는 모습이 유치원 아이처럼 귀엽고 선해 보였다. 얼굴의 하관이 발달하여 복스러웠다. 코는 태백산 줄기처럼 힘차게 뻗어있었다. 남자다운 남자였고 그 옆에 딸아이는 여자다운 여자였다. 참 보기 좋았다. 내 얼굴에 웃음기가 봄빛처럼 돌게 하였다. 행복하구나! 행복을 카톡으로 보냈다.
남편 생일 전 날, 드디어 딸아이는 생일 선물이라며 홍길을 데려왔다. 지난번 보내준 사진으로 이미 닳도록 본 얼굴. 가족 같다. 축구를 좋아하여 지금도 조기 축구 모임에 참석하는 중이란다. 집안 대대로 하체가 큰 체형이란다. 뚱뚱해보이는 듯 해도 대체로 근육질의 단단한 몸매다. 꼭 딸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 뚱뚱하고 귀여운 장난꾸러기를 닮아 보이는데, 생일 선물치고는 참 크고 듬직하다. 거기다가 생일선물이 생일선물을 들고 왔다. 덤으로 내 것 까지 준비해왔다. 내가 딸아이 남자친구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지나치다 싶게 흐믓한 미소를 흘렸나보다. 장난기가 발동한 딸아이가 내 모습을 찰칵 찍어두었다. 내가 봐도 좋아서 어쩔줄 몰라 웃느라 눈 주변에 주름이 가득한 나이든 장모감이다. 행복이 몰려있다.
젊은이들 앞에서 절대로 꼰대 노릇을 하면 안된다고 했는데, 아차 나는 하고 말았다. 내가 결혼하기 전날 옆집 아주머니께서 오셨어, 꼭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고 말이야. 연애 때는 하도 남편이 잘해줘서 결혼해서도 그럴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더래. 연애와 생활은 너무도 달랐대. 아주머니는 연애 때처럼 남편이 무엇이든 해주기를 기다렸다는거야. 아무것도 안해주니 속상했고 불행하고 죽고 싶었대. 5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는거야. 바랄 게 아니라 내가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무언가를 먼저 해야 한다는걸. 본인이 바뀌니까 남편도 바뀌더래. 지금은 더없이 만족스럽대 행복하대. 상대에게 바라지 말고 먼저 내가 상대를 위해서 할 일을 하라는 말씀이셨지. 내 말에 경청하는 딸아이와 홍길의 반짝이던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다. 눈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얼마만한 기쁨인가.
예식장에 들어서기까지는 모르는 일이야. 변덕스런 젊은 남녀의 사랑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나는 딸아이를 안다. 둘의 관계를 함부로 발설하지 않았듯이, 차근차근 사랑을 다듬고 키워 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가리라 믿는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무엇을 전공했는지 수입은 얼마나 되는지는 제쳐두고 나는 홍길에게 질문했다. 우리 딸 단점은 알고 있나? 네 불같은 성깔이 있지요. 그렇지그렇지 평소에는 순한 듯 한데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싶으면 버럭 화를 내지. 상대방의 단점을 알면서 만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사이라는 것. 사랑이 피어나 향기를 품는 사이라는 것.
다음날인데 둘이서 또 만난단다. 어제의 첫 만남에서 밥도 사고 선물도 사 준 홍길이가 고마워서 내가 제안을 했다. 오늘 저녁은 엄마가 사줄테니까 둘이서 맛있는 거 먹어라. 딸아이에게 송금을 했다. 저녁을 먹고 치우려는데 동영상이 날아왔다. 딸아이가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만들며 세 살짜리 딸처럼 말했다. 엄마 맛있게 먹을께요 냠냠! 반대편에 앉아있던 홍길이가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띄고 양손으로 브이자를 만들어 흔들며 딸과 동시에 말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남편도 그 동영상을 보고는 입을 크게 벌려 허허거리며 좋아했다. 아아! 이런 행복이! 행복하구나 카톡을 얼른 딸아이에게 보냈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일만큼 행복한 시간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