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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과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할 일>의 줄거리 :
시내산 언약은 선민이 각자 하나님과 맺는 결혼 언약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이 결혼 관계를 위하여 선민인 내가 지켜야 할 약속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들 십계명이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결혼 약속을 잘 지키면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번제와 화목제의 근본 취지를 알고 그 취지를 삶에서 부단히 반복하여 따르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 취지를 반복하여 따름이 왜 필요한지를 하나님이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과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할 일
(출애굽기 24:1~18)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우리에게는 ‘하나님! 저와 약속해요. 제가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본문은 시내산 언약이 맺어지는 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과 선민의 결혼 서약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로 하나님을 아버지의 관계성에서 이해합니다만 때로는 부부의 관계성에서 이해할 때도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이 바로 그렇습니다. 부부의 관계성에서 이해할 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언약에는 당사자 간에 지켜야 하는 서약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앞서 살펴본 23장 20~23절에서 사자를 보내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사자의 목소리를 청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삶의 현장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치실 것이며,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병을 제하시며,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시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결혼 계약에서 하나님이 하실 몫이 있다면 내가 해야 할 몫도 있습니다. 본문은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약속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십계명 이후부터 23장까지 시내산 언약의 내용이 쭉 기록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들은 내용을 다 기록했고, 산에서 내려와서 백성을 모으고 그 내용을 읽어줍니다. 그러자 그들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준행하겠다고 대답합니다. 그에 앞서서 제단을 쌓고 제단 앞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됩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나서 피의 절반은 제단에 뿌립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 언약을 백성에게 읽어주자, 백성이 듣고 우리가 준행하겠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모세는 나머지 절반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면서 언약이 완성됩니다. 이것을 ‘언약의 피’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새끼손가락을 걸듯이 하나님과 약속하면서 결혼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위하여 진행되는 의식에서 번제와 화목제는 왜 드려지는 것일까요? 모세는 하나님께 받은 언약의 내용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읽어주고 백성은 준행하겠다고 대답하면 약속은 끝난 것입니다. 굳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특히 번제물과 화목제물의 피를 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반은 백성에게 뿌린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할 때, 내가 무엇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모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기독교 종교가 중심을 잃고 좌우로 치우치며 향방을 잡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무엇을 약속했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약속을 하기를 바라시는지도 포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단순히 율법과 계명을 지키라는 행위로 생각하게 됩니다.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선 말씀을 통해 그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허락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내 마음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실제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청종함이 언급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자이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릴 때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마음 채움을 위하여 하나님만 갖는 것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습니다. 그럴 때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계획하신 일들의 버튼이 눌러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결혼 생활은 선민 각자에게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전 설교에서 투 트랙(two-track) 방식의 삶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결혼 관계는 일회적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천국 트랙과 세상 트랙의 투 트랙 방식으로 계속 진행되어 가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준행하리라는 것은 단순히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결심의 표현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게 하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투 트랙의 삶이 진행되어야만 지켜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만으로 채워지는 것을 평생의 일로 생각하는 천국 트랙이 있고, 내 마음이 없어진 땅에 하나님의 마음이 내려와서 계획하신 바를 이루어 가는 세상 트랙이 있습니다. 이렇게 투 트랙의 삶이 진행되어야 하나님과의 결혼 생활은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결혼 생활의 기준으로 나를 본다면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이 땅에 있으면 땅이 스며들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만족과 채움을 위해 세상에 속한 것들을 빨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에 번제와 화목제가 언급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을 빨아들인 나를 번제로 죽이겠습니다.’라는 약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처럼 선민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아서 땅이 스며드는 나를 볼 때마다 번제단에서 죽는 소나 양을 보면서 내가 죽는 것임을 고백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모세는 번제와 화목제의 피를 절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절반은 백성에게 뿌립니다. 같은 피가 제단에 뿌려지고 백성에게도 뿌려진 것은 번제단에서 피 흘려 재가 되도록 타죽는 짐승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번제물과 나의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일시를 통해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해 세상이 스며들 때마다 나를 가만 놔두지 않고 번제물과 함께 죽겠습니다.’라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화목제의 의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화목제를 드릴 때는 제물의 내부장기를 불살라 연기를 피움에 있습니다. 레위기에서 제사에 대한 언급을 보면 이 연기를 하나님이 맡으시는 향기로운 냄새로 표현합니다. 제물의 내장과 콩팥과 간 같은 장기들은 선민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하늘로 가고 싶어 하는 선민의 바람을 제물의 내장을 태우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번제가 세상이 스며든 나를 죽이는 것이고, 화목제는 죽고 새롭게 태어나서 세상이 전혀 스며들지 않은 마음이 향기로운 연기가 되어서 하나님께로 올라가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제 우리는 시내산 언약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은 단순히 율법과 계명과 규례를 지키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내게서 율법과 계명과 규례가 지켜지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에서 번제와 화목제의 취지를 따라 반복해서 실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세상은 언제든지 스며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번제의 취지를 따라 이 땅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화목제의 연기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듯이 새롭게 태어난 마음으로 하늘로 향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번제와 화목제의 취지를 반복하여 생활 속에서 따를 것을 약속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의 결혼에서 필요한 내 몫의 일입니다. 이 약속이 지켜질 때 모든 법규도 준행할 수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을 단순히 율법과 계명과 규례를 지키겠다는 약속으로 이해한다면 번제와 화목제의 취지는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지게 됩니다. 나중에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규를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도 제사는 드렸습니다. 제사의 취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제사는 신에게 드리는 일종의 뇌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제사가 다른 종교처럼 뇌물의 성격을 띄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스며든 나를 죽이기 위해 번제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스며든 세상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뇌물을 바치고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한편 9~11절을 보면 하나님과의 결혼식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라고 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아론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로서 앞으로 제사장이 될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산으로 올라가서 한 일이 특이합니다.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결혼 잔치를 한 것입니다.
이들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번제와 화목제의 취지를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매우 특이한 언급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라고 했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리키는 현상들이 동반될 뿐이지 하나님이 직접 눈에 보이게 드러나신 적은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을 뵈었다는 표현도 이러한 특징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형상이 없기에 우리의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기척을 느끼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기척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누군가가 있다고 느끼게 하는 소리나 기색입니다. 인기척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의 있음을 느끼는 기색입니다. 예를 들어 집사람이 혼자 있을 때 제가 무심코 뒤에 가서 가만히 서 있으면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습니다. 소름 돋는 인기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인기척이 아닌 신기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여러 가지 현상이 동반되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느꼈습니다. 다만 멀리서 하나님의 임재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번제와 화목제의 마음가짐을 약속한 백성의 장로들은 개별적으로 상대하는 대상으로 하나님의 기척을 느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났다’라는 느낌을 받으며 소름이 돋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뵈었다는 표현은 문자대로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척을 실감하며 일대일로 상대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어서 10절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청옥으로 번역된 원문을 보면 사파이어를 말합니다. 그리고 발아래를 보았다는 묘사로부터 이들의 시선이 하나님을 정면으로 본 것이 아닌 하나님 발아래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파이어 빛이 발산되듯이 천국의 바닥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투명하게 하나님의 발아래를 보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가리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모세와 아론과 그의 두 아들과 백성의 대표 칠십 인은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번제와 화목제의 취지를 반복할 것을 새끼손가락 걸고 언약을 맺음으로써 하나님 발아래에 서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다만 아직 천국의 바닥을 뚫고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지는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제 마주함이 이루어지려면 실제로 번제와 화목제의 취지를 따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스며든 나를 죽이고, 화목제의 취지를 따라 깨끗하게 다시 태어난 마음이 연기처럼 하늘로 올라가야 비로소 사파이어 같은 천국 바닥을 뚫고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주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은 마음이 화목제의 연기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땅의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어서는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늘입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우리에게 약속을 요구하셨습니다. ‘나는 번제단의 어린양처럼 세상에 대해 죽었다. 이제 너희도 마음에 세상이 스며들 때마다 십자가를 보고 나와 함께 죽었음을 고백할 것을 약속하라.’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해 화목제의 연기처럼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나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육체에서 빼내어 하늘로 올라가게 하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심을 통해 땅의 요소가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게 하십니다. 땅에 내려오신 하늘인 예수님의 몸이 우리의 마음을 감싸서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국의 바닥인 하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땅의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입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과 마주할 수 있는 자리로 끌고 가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선민과 하나님과의 결혼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결혼식에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어떻게 성립되고 만남이 이루어지고 연합이 이루어지는가를 설계 도면을 그리듯이 보여주십니다. 사파이어가 발산하는 빛의 바닥을 이루는 하늘은 우리에게는 천장입니다. 마음이 천장을 뚫고 올라가기 위한 조건은 하나입니다. 땅의 요소가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번제와 화목제의 취지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칠십 인은 세상이 스며든 나를 죽이는 번제의 취지와 깨끗해진 마음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화목제의 취지를 자발적으로 삶에서 수행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으므로 천국의 바닥 아래까지 도착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과 대면하여 관계를 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번제로 드리고 내 마음이 화목제의 연기처럼 하나님께로 가겠습니다.’라는 약속을 반복하여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실제 만남과 연합과 결합이 이루어지는 결혼 생활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하늘 트랙뿐입니다.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계속 하나님을 소망하고 열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소원이 생길 때마다 번제로 죽고, 화목제 연기처럼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어떤 소원도 생기지 않을 만큼 하나님으로 만족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지켜나가야 할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바람도 갖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가족을 향해, 건강을 향해, 사업을 향해 단 하나의 바람도 갖지 않을 만큼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기도를 평생토록 해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안에 넘쳐흐르는 하나님의 분량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는 삶이 예수님의 공생애였습니다. 다만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채워져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번제와 화목제의 취지를 따르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지켜나가야 할 약속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덧 하나님으로 넘쳐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게 됩니다.
한편, 우리가 읽지 않은 12~18절을 보면 모세가 다시 시내산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발아래에 섰던 백성의 장로들은 아직 하나님을 직면하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다만 이제 하나님을 직면하는 위치에 서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삶에 대한 바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산 아래로 내려왔고 모세는 다시 홀로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면하는 가운데 십계명 돌판과 성막의 식양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여기서 또 다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강조하시기 위해 제시되는 그림이 있습니다. 앞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땅의 요소가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은 모세를 만나주시지 않다가 일곱째 날에 만나주십니다. 이것은 아담의 의식이 깨어나 하나님을 첫 번째 만난 안식 상태를 연상하게 합니다. 지금 모세는 엿새 동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태초의 안식 때 아담의 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아담은 처음으로 의식이 깨어나서 세상의 흔적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엿새 동안 금식한 뒤에 아담의 하얀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앞서 백성의 장로들과 함께했을 때는 하나님의 발아래에 있었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혼자 올라가서 엿새 동안 금식한 뒤에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꼭 엿새를 금식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규정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태초에 안식을 떠올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있습니다. 천국 바닥을 뚫고 올라가서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아담의 마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실 때 아담을 만나셨습니다. 그때 아담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발아래에 머물렀던 이전 상태와는 다르게 아담의 의식이 깨어나서 하나님을 마주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이러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땅의 요소가 하나도 없이 사파이어 천국의 바닥을 뚫고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상태가 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번제와 화목제의 취지를 삶에서 반복할 것을 하나님과 약속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번제이며, 주님의 부활과 승천은 화목제의 연기인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새끼손가락 걸고 맺은 약속을 기억합니다. ‘하나님! 세상이 마음에 스며들 때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번제로 드린 그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들이게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듯이 화목제의 연기처럼 내 마음도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대한 걱정, 근심, 염려 같은 어떤 것도 흔적이 없게 만든 상태에서 아버지께로 갈 수 있습니다. 첫 안식일에 아담이 하나님과 만났고, 시내산 꼭대기에서모세가 일곱째 날에 하나님을 만났듯이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 약속을 잘 지킬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율법과 계명과 규례들 또한 지켜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어떤 것도 마음에 스며들기를 용납하지 않겠다. 그 상태를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일 것이다. 그래서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화목제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듯이 내 마음은 땅의 요소가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아담이 첫 번째 안식일에 의식이 깨어나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가 엿새를 금식하고 일곱째 날에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하나님을 대면하겠다.’라는 것이 우리의 약속입니다. ‘내가 번제와 화목제의 취지를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반복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자발적으로 맹세하고 서약하도록 허락하신 단 하나의 조건입니다. 하나님과 새끼손가락 걸고 한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큰 약속이든 작은 약속이든 제가 약속한 것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새끼손가락 걸고 한 약속에 우리의 목숨을 걸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 것에 약속을 어긴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서도 약속을 어긴 죄인입니다. 그러나 번제와 화목제의 취지가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서 완결되었사오니, 이 취지만은 목숨 걸고 반복하여 지켜나갈 수 있는 의지가 발동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