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숲에 든다. 청량한 기운이 온몸으로 길을 낸다. 대숲은 정갈한 바람이 둥지를 트는 곳. 푸른 물길 위로 뿌리와 뿌리가 서로 얽혀, 우리 딛고 선 땅과 일체화되는 곳. 하여 대숲은 청정하면서도 우리네 집터를 굳건히 지키는 신성한 장소이기도 하다.
거제시 하청면 성동마을. 대나무 중 가장 크고 굵은 '맹종죽(孟宗竹)'의 국내 최초 시배지 마을이다. 때문에 이 마을 일대의 낮은 언덕이나 야산에는, 사시사철 청청하게 푸른 대나무가 큰 숲을 이루고 있다.
20여m 대나무들 하늘 찌를 듯
사이사이엔 죽순이 뾰족이
특유의 싱그러운 비린내가 은은
비빔밥·돼지고기볶음·숙회 …
아삭아삭 죽순 맛에 입안은 황홀
죽렴수 한 잔 곁들이니 온몸 시원 맹종죽은 중국이 원산지로 동죽(冬竹), 죽순죽(竹筍竹)이라고도 한다. 높이 10~20cm, 지름 20cm 정도이다. 거제도에 맹종죽이 전해진 것은 1921년. 거제도에 선진 농업 기술을 도입한 농림 선각자 고 신용우 선생이, 일본 규슈 지역에서 산업 시찰 중 3그루를 가져와 심은 것이 그 시작이다.
맹종죽 시배지로 부산 미술계 원로인 주경업 화백과 동행을 한다. 인생의 대선배와 함께 대나무밭으로 나 있는, 인생의 여러 길을 짚어보려 하는 것이다.
"대나무는 예부터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라 곧은 선비의 성정에 비유되기도 했지요. 해서 대나무 숲을 걷다 보면 심신이 정화되고,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옳은 길을 알게 되면, '일생을 바쳐' 일관되고 꿋꿋하게 그 길을 가야 한다고 봐요. 그 길이 비록 외롭고 험난하다 해도 말입니다."
주경업 화백. 대나무처럼 꼿꼿하고 줏대가 있어 모든 면에서 호불호가 분명하다. 50여 년의 화력(畵歷) 중 35여 년을,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 전래민속을 '펜'으로만 그리고 있다. '부산민학회' 회장을 맡아 전국에 산재한 우리 춤이나, 소리, 놀이, 굿 등을 선으로 재현하고, 그 기능 보유자들인 '쟁이'나 '꾼'들의 정신을 기록하는 작업이, 그래서 남다르다.
대숲을 걷는다. 함께 뒤따르던 바람이, 거제 앞바다의 푸른 물결 소리로 찰박찰박 철썩인다. 경전을 읊듯 조곤조곤 낮은 소리로, 삼라만상의 가슴을 다독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대숲에 들면 명징한 평화로움이 그윽하다.
들어온 길과 나갈 길이 대숲에서 길을 내고 있는데, 새삼 정적 속 풍경소리가 '댕그랑~!' 들리는 듯하다. 어느 설법이 이 대숲 속 풍경소리만 하랴? 업장을 덜어주듯 그 무심의 웅숭깊음이, 푸른 대나무 잎맥으로 살아 오른다. 대나무는 그렇게 백 년의 세월을 견뎌낼 태세이다.
넓은 대숲에는 20여m의 대나무가 한창 하늘을 찌를 듯 뻗어있고, 대나무 사이사이로 죽순이 뾰족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우후죽순'이라 했던가? 비가 온 후의 대숲 여기저기서 죽순이 불쑥불쑥 솟아오르고 있다.
대나무는 죽순으로 싹을 틔운 후 한 달 전후면 성체가 된다. 얼마나 빨리 자라면 죽순 외피를 채 벗지 못한 대나무가 사람 키를 훌쩍 넘었다. 오죽하면 '대나무 자라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고 했을까?
주 화백이 스케치북을 꺼내 든다. 일순 바람이 숨을 죽인다. 그의 펜 끝에서 대나무 한그루가 동그마니 피어오른다. 연이어 수직으로 떨어지는 소나기 줄기나 낙숫물 소리처럼, 거침이 없는 필치가 힘차게 휘몰아치자, 곧게 뻗어나는 대나무에 싱그러운 댓잎이 출렁이고, 급기야는 대숲을 이룬다.
대나무는 60년에서 120년에 한 번씩 꽃을 피운다. 그리고 꽃이 질 때 그 몸마저 함께 홀연히 저문다. 이러한 신비한 일생을 가졌기에, 평생을 살면서 대나무 꽃 한 번 보기가 힘들다.
죽음 또한 새로운 삶을 예비하는 과정. 그래서 대나무 꽃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길상의 징조로 여겨졌다. 죽음의 징조인 대나무 꽃이 또 다른 탄생을 담보하기 때문이리라.
'여기서부터, -멀다 / 칸칸마다 밤이 깊은 / 푸른 기차를 타고 /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 백년이 걸린다'(서정춘 시인의 '竹篇·1-여행' 전문)
삶의 신산한 굴곡을 마디마디에 새기고 있는 대나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이 깊은' 삶의 '칸칸'마다 '백 년'이 걸리는 꿋꿋한 일생을 지향한다. 순천의 가난한 마부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역마로 떠돌던 시인의 곤궁한 삶이 잘 드러나는 시편이다. 그럼에도 인생의 여행 속에서 시인은 늘 곧고 푸르게 살아있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신용우 선생의 조카 신삼생(77) 성동마을 이장이 죽순을 채취한다. 잘 생긴 놈으로 골라 곡괭이로 한번 치니 죽순이 떼구르르 구른다. 단숨에 10여 개의 옹골진 죽순이 수북하게 쌓인다.
칼로 죽순 윗부분을 쳐내고 몸통에 어슷하게 칼집을 넣어주니, 한 번 만에 외피가 벗겨지며 뽀얀 속살이 수줍게 드러난다. 죽순 특유의 싱그러운 비린내가 은은하다. 여인의 살내 같기도 하고 아기의 젖비린내 같은 것이, 봄바람처럼 간질간질 사람 마음을 간질인다.
신 이장의 부인이 죽순으로 만든 요리를 한상 내어준다. 죽순 비빔밥에 죽순 돼지고기볶음, 죽순 숙회와 죽순 된장국 등속이 총총하다. 맛이 달고 식감이 좋아 일행 입에서 아삭아삭 죽순 씹는 소리가 미각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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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달고 식감이 좋은 죽순으로 만든 죽순비빔밥. |
신 이장이 죽렴수 한 잔을 권한다. 대나무는 물을 지상 70m까지 끌어올릴 정도로 물관의 힘이 좋고 체액이 풍부하다.저녁 무렵 대나무를 비스듬히 베어 비닐에 묶어 두면 아침나절에 2L 정도의 대나무 체액을 채취할 수 있는데, 이 체액이 바로 죽렴수다. 고로쇠보다 더 영양 성분이 높고 인체에 유익하다고 전해진다.
죽렴수 한 잔 시원하게 쭉~ 들이켠다. 온몸으로 바람이 분다. 댓잎들이 서로 부딪혀 서걱이고, 바람 한 줄기 대밭을 가로지르며 큰 파도소리를 낸다. 대나무 숲으로 길이 나듯 사람의 몸속으로, 길고 긴 '사람의 길'이 끊어질 듯 이어진다. cowejoo@hanmail.net
최원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