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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밭예배
신29:1-9(To), 계4(신약)
베하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야훼의 뜻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느냐? 키 타보 엘-하아레쯔, 네가 그 땅에 왔다. 여러분들이 그 땅에 왔느냐, 안 왔느냐가 이렇게 중요하다. 여러분들은 단순하게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체가 아니라,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야훼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엘-하아레쯔, 그곳은 특별한 강남이나 8학군이 아니다. 그 땅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신성을 갈망하느냐, 안 하느냐는 것이다. 내 마음이 신성을 갈망하면, 신의 성품을 갈망하면 그것을 하아레쯔, 그 땅이라고 한다.
우리가 신성을 갈망하게 되는 순간 주님은 모든 뜻을 다 이루신다.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존재로 이 땅에 와 있다. 키 타보 토라포션 샤밭에 오신 여러분들 환영한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 오기까지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쏟으시고, 다 키 테쩨 하시고, 여러분들을 이 땅으로 인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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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타보 샤밭은 우리에게 놀라운 점핑을 주고, 새로운 힘을 주고, 실질적으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파워를 주는 샤밭이다. 키 타보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내가 약속의 땅에 왔을 때, 이미 오는 모든 것들이 다 결정되는 것이다. 이미 그 사람의 삶이 믿음으로 다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키 타보 샤밭은 주고 있다.
키 타보 샤밭에서는 내게 교정되지 않는, 주님과 함께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내가 어쩌지 못하는 영역이 있음을 발견한다. 도저히 안되는 영역이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그런 영역이 존재한다.
그런데, 만약에 이것에 대한 지혜가 없다면, 우리는 그런 영역을 붙들고 늘어진다. 희한하게 많은 것들 중에서 절대 안되는 영역을 붙들고 그것을 고치려고 한다. 그러니까 10, 20, 30년이 가도 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우선 고칠 수 있는 것을 고쳐야하는데, 고치기 쉬운 것부터 고쳐나가야 한다.
운동을 배울 때도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한다. 수영을 하고 싶은 사람은 버터플라이라는 것을 제일 먼저 하고싶다. 그거부터 하고 싶다. 그게 정말 멋있으니까, *영이랑 수영을 하러 갔는데, 어떤 아저씨가 수영을 정말 잘하는 것이다. *영이가 자기 수영 하다말고, 그걸 보더니 막 따라하는 것이다. 그게 되는가?
그렇게해서는 안된다. 그렇게는 배울 수가 없다. 물장구부터 하나하나, 되는 것부터 해나가면 된다. 그런데 처음부터 물에 뜨려는 사람이 있다. 수영하니까 물에 떠야하는 줄 안다. 물에 안 뜬다. 그때 되는게 있다. 물장구치는 것은 된다.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영적인 여정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되는 것부터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왜 너희들은 모든 족속에게 가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시는가? 성령님께서 어차피 다 하실거면 왜 굳이 우리보고 가서 하라고 하느냐?
우리는 안다. 제자들은 안다. 무엇이 1학년이고, 2학년이고, 3학년인지 말이다. 자기들이 해봤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그 버터플라이가 왜 어렵냐고, 버터플라이부터 해보라고 한다. 물 속에 들어갈 이유도 없이 날아다니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 저거 하려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안다. 그래서 가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그 단계를 알려주라는 것이다.
베하야 키 타보이다. 키 타보까지 오는데 있어서 우리를 제일 괴롭히는게 베하야이다. 베하야는 존재의 완료이다.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존재의 완료이다. 존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잘 들으셔야 한다. 나의 소유가 완성되는게 아니라, 존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존재가 완성되는가? 서 집사님이 중요한 간증을 했다. 그전에는 엄마로서 필요가 많은 줄 알았다. 소유가 있어야지 엄마로서 완성되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존재는 완성되지 않는다. 존재를 만나지 못하고, 베하야는 오지 않는다.
존재의 완료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데서 온다. 자기 자신을 다른 존재에게서 찾는데서 존재가 온다. 헤이에게서 존재가 온다.
자기의 손을 내쉬는 숨을 위해서 사용할 때 온다. 헤이. 생명주는 숨이다. 숨을 내쉬는 것에서 존재는 완료되어진다. 그걸로 끝이다. 누구나 숨을 내쉰다.
우리는 많은 소유가 내 존재를 완성할 것 같지만, 사실 내쉬는 숨을 통해서 존재가 완성되어진다. 그러면 내쉬는 숨이 하는 가장 위대한 일이 뭘까? 그것을 말, 다바르라고 한다.
사람은 내쉬는 숨에 의해서,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존재가 완성되어진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종류의 말이 있다. 내 말이 있고, 너를 위한 말이 있다. 내 중심, Self-centered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말이 있고, 상대방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말이 있다. 이것이 나의 존재를 완료한다. 이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
키 타보에서는 존재가 완성되어져버린다. 키 타보에서 이렇게 존재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 것부터 할 수 없는 영역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베하야로 가는 것이다. 존재가 완료되어야지만 사람은 할 수 있는 것부터 한다. 존재가 완료되지 않으면, 생명주는 숨을 쉬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부터 한다.
사람은 생명주는 숨을 쉬어야지만, 다른 이웃을 위한 숨을 쉬어야지만 할 수 있는 것부터 할 수 있게 된다. 만약 그렇지 않고 나를 위한 것이라면, 할 수 없는 것을 그렇게 꺽꺽거리면서 원한다. 그 단계가 아닌데, 꺽꺽거리면서 원한다. 뭔가를 소유하려고 꺽꺽거린다.
사람은 생명주는 숨을 쉴 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삶을 산다.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게 뭔지를 찾아낼 수 있다.
서 집사님이 옛날에 와서 상담할 때는 나는 엄마로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고 헀는데, 오늘은 너무 다르다. 너무 훌륭한 엄마이다. 왜냐면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낸 것이다. 그렇게 하게된 이유가 생명 주는 호흡을 했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의 생각, 말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의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미 존재가 완료된다. 하나도 부족한 존재나 엄마가 아니다. 과거에 어땠다, 이건 다 망상, 허상이다. 우리 육신으로 살았던 것은 다 망상이고, 허상이고, 그것은 실제가 아니다. 존재의 완료가 얼마나 기쁘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사람들은 자꾸 할 수 없는 영역을 건드린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을 מַעְשַׂר 마아쎄르, 십일조라고 한다. 왜 하나님이 십일조를 내라고 하냐면, 할 수 없는 영역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사람이 십일조 생활을 한다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을 건드리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원리이다.
제자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늘 주의해서 듣는다. 특히 재정을 가르칠 때 애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해서 듣는다. 그러면 이만큼 받는데, 월세 내고, 십일조 내고 그러면 없다고 한다. 굉장히 십일조 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그 뉘앙스에 십일조를 내니까 상당히 없다, 이 말을 돌리고 비비 꼬아서 십일조내고 그러면 없다고 한다. 상당히 십일조의 분량이 크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십일조 많다. 여러분들은 십일조 잘 하시는가? 어떨 때는 십일조 내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런데 십일조라고 하는 것은 어떤 영적 원리를 가지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십일조는 제일 먼저 하는 것이다. 이거 저렇게 하고, 십일조내면 없다고 하면 안된다. 백발백중 그 사람을 보면 자기가 할 수 없는 영역을 건드리고 있다. 끊임없이 자기 존재에서, 그거 건드린다고 되는게 아닌데, 이거 건드려서 이런 존재가 되려고 한다. 욕망, 욕심, 탐욕이다.
그런데, 그게 탐욕인지도 모른다. 그게 자기의 영적인 열정인 줄 안다. 거기서 맨날 제자리다. 안되는걸 자꾸 건드리기 때문이다. 1년이 지났는데도 제자리 걸음이다. 똑같은 이야기 하고 있다. 1년이 지났는데도 똑같은 문제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색깔만 달라진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아싸의 머리라고 한다. 원래 1/10이라는 표현이 아니다. 아싸의 머리이다. 아싸는 행함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나를 주님의 해석으로 교정시켜가는 것을 의미한다. 내 마음을 새롭게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내 마음을 새롭게하는 것을 아싸라고 한다. 내가 행동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행함의 머리를 십일조라고 한다. 내가 내 마음을 교정시키고, 주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바꿔가는 것을 하는데 있어서의 머리가 십일조이다. 그래서 이 머리가 하는 첫 번째 역할이, 안되는건 절대 안 시키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아이들을 키울 때 부모의 첫 번째 역할이, 지금 해도 안되는거 시키면 안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산수를 배우는데, 파이, 원주율, 양자역학, 미분적분 가르치면 안된다. 해도 안되는 일을 구분해주는 것이 머리의 역할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십일조를 키 타보에서 명령하신다. 키 타보에 오면 십일조하는 법을 배우고, 해서 안되는 일을 건드리지 않는다. 왜 그런가? 키 타보에 왔다는 것 자체가 내가 생명주는 숨을 쉬기 때문에 비로소 십일조가 된다. 나를 살리기 위한 삶에서는 십일조를 절대 못 배운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것이 한두개인가? 돈을 아무리 벌어도 모자르다. 일단 나한테 필요한 것을 따지고보면, 필요한게 계속 늘어난다. 내가 월 천만원을 벌면 생활 수준이 그만큼 높아지고, 필요한게 더 많이 늘어난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진짜 돈을 겁나게 많이 버는 분이 있었다. 그런데 제가 들은 충격적인 소리가 있다. 제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십일조만 수천만원하는 분인데, 너무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상상이 안되는 것이다. 돈을 겁나게 버는데, 어떻게하면 어려워질까? 요즘 돈이 좀 딸린다?
100만원을 벌던, 200만원을 벌던, 300만원을 벌던, 천만원을 벌던, 1억을 벌던, 한달에 100억을 벌어도,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삶은, 들이마쉬는 숨은 Joy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리고 항상 모자란다.
내쉬는 숨은 비로소 십일조를 한다. 키 타보, 모든 자기에게 온 것 중에 십일조를 주님께 드린다. 십일조 중에서 제일 어려운 십일조가 키 타보에서 나온다. 그것을 3년째 십일조라고 한다.
십일조가 1/10인 것만 같지만, 십일조는 총 3개의 십일조가 있다. 매년 하는 십일조는 레위와 성전에 한다. 모든 소득에 하는 매번하는 십일조가 있다. 이것은 레위에게 가서, 레위로 하여금 교회를 유지하게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십일조가 있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냐? 십일조하면 없다고 했는데, 또 십일조를 떼야하는가? 둘째 해의 십일조라고 한다. 2년에 한번은 20%를 뗀다. 원리상으로 말이다. 옛날에는 연말에 소득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오늘날과는 조금 다르다.
두 번째 십일조는 떼서 십일조를 하기 위한 십일조이다. 십일조하러 예루살렘에 가야한다. 예루살렘에 가면 경비가 들지 않는가? 예루살렘에서 가서 가족들과 신나게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다. 십일조하러 가서 울상짓고 올 수 없으니까, 십일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또 뗀다.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와서 실컷 먹고 마시라고 한다.
내가 교회를 세우고, 이 십일조를 하고나면, 여러분은 1/10을 떼서 LTG해야하고, LTG원 생일선물 사줘야하고, 1/10을 또 떼야한다. 뗄 용의가 있는가? 오늘 샤밭에 괜히 잘못왔는가?
내가 영적인 삶을 사는데 필요한 것이다. 단기선교를 가야하는데도 돈이 필요하다. 1/10을 또 뗀다. 첫 번째에서 하면 안된다. 두 번째에서 해야한다.
그리고 세 번째 십일조가 있다. 이게 무슨 더 청천벽력이냐? 키 타보에 와야 이것을 배운다. 주님께서 세 번째 십일조를 명령하고 계신다
신26:12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그들을 배부르게 하라. 배부르게 한다는 것은 이들을 만족시킨다는 것이다
לַלֵּוִי 라레비 : 레위에게, 훈련(ל)에 대한 계시(ו)를 있게하는 것
이 십일조는 제자훈련에 대한 계시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이 있다. 매달 하야 사는 것도 비싸다고 말이다. 내가 제자훈련에 대한 계시를 가지기 위해서 십일조를 떼야한다. 30%째 떼는 것이다. 이걸 떼면 30%가 달아난다. 할렐루야? 이러면 죽을 것 같은가? 이렇게 안 살았는데도 죽을 것 같았다. 꼭 뭐 하라고 함녀 갑자기 죽을 것 같다고 한다. 이렇게 안 살았는데도 아둥바둥 살았는데 말이다. 혹시 이렇게 안 살아서 아둥바둥 산 것이 아닐까? 이런 것을 위해 쓸 마음이 없고, 나를 위해서 쓸 마음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나, 개인, 단독자, 암세포를 위한 서포트는 천국에서 안 한다. 많은 사람들은 뭐가 생기면 주님이 주신 줄 안다. 누가 줬는지 분별을 못한다.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주님이 주신게 아니다. 그래서 얼른 갖다 버리라고 하는데도 무슨 소리냐고 기겁한다. 사업이 잘되면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전혀 주님이 하신게 아니다. 그래서 망하라고 기도해줬다. 그랬더니 망했다. 그런데 또 목사님 때문에 망했다고 한다. 그게 왜 또 나 때문에 망하는가?
나를 위한 사업이면, 빨리 망하는게 좋다. 안 그러면 암덩어리가 커져서 다 죽기 때문이다. 주님은 절대로 암덩어리를 서포트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키 타보이다. 나에게 오는 모든 서포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목적이 있을 것 아닌가?
첫 번째,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것, 벧엘이다. 나에게 오는 모든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목적, 벧엘 세우는 것으로 십일조를 딱 뗀다
두 번째, 이 모든 것들을 하기 위한 나의 경비이다. 나 놀러다니는 경비가 아니라, LTG할 경비이고, 내 LTG원 하야 책 사줄 경비이고, 내 LTG원 꼬실 경비이다. 꼬시려면 일단 뇌물을 줘야한다. 잠언에서 뇌물은 사람의 마음을 녹이려고 한다. LTG원이 교회에 대한 마음이 잘 안 생긴다. 왜 그런지 아는가? 여러분들이 십일조를 안 떼어서 그렇다.
LTG원에게 뇌물을 그냥 막 주고, 차 좋아하면 차 한대 사주라. 그래도 교회를 싫다고 하겠는가? 십일조 뗴어서 막 주는 것이다. 나에게 수입이 많은데, 내가 두 번째 십일조를 떼었더니 300만원이다? 그러면 분명히 돈 좋아하는 LTG원이 걸리게 되어있다.
돈 좋아하시는가? 그러면 그렇게 사시라. 그러면 하나님이 다 그렇게 서포트하신다. 그런데 이거 안 떼고 살면 안된다. 여기에 주님이 세 번째 십일조를 말씀하신다
세 번째는 שָׁלֹשׁ 샬로쉬이다. 세 번째 십일조를 뗄 수 있어야지 형상(שׁ)을 훈련(ל)하는 형상(שׁ)이 된다. 비로소 그 사람을 하나님이 너는 나의 형상을 훈련하는 형상이라고 읹어하신다. 샬로쉬, 진짜 제자의 형상인가? 그렇게 주님이 인정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뗄 수 있어야 한다.
제자 훈련에 대한 계시, 레위 지파에게 주는 것이다. 레위를 배부르게 하라는 것은 만족시키라는 것이다. 레위를 진짜 기쁘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세 번째 십일조를 가지고선 제자훈련에 대한 계시가 있는 사람을 기쁘게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제자들이란 레위를 기쁘게 해야한다. 제가 여러분들을 보면 정말 기쁜가? 제자들을 보면 정말 기쁘다. 세 번째 십일조를 하는 사람들은, 이 훈련받기 위한 것에 아싸를 행한다. 그냥 자기에게 들어온 모든 것들을 갔다가 자기꺼 쓰고 남는 것 가지고 훈련받으려고 하는게 아니다. 첫 번째 10%, 20%, 30% 딱 떼고, 다음은 이 머리들이 다 결정한다.
לַגֵּר 라게르 : 나그네에게
나그네, 게르라는 것은 자유의지의 머리이다. 세 번째 십일조를 떼는 것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데 10%를 쓴다.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이 뭔가? 왜 여기에 십일조가 필요한지 알아야 한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유의지의 영역을 물질 세계에 놓지 않고 영의 세계에 놓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물질을 선택한다고 해서 물질이 오는게 아니다. 창세 전에 이미 결정이 되어있다. 내가 살아야 할 것들은 다 결정되어있고, 내 아내의 미모도 이미 다 결정되어있고, 남자친구도 이미 결정되어있고, 모든 것은 결정되어있다. 내 남자친구는 왜 성격이 이럴까 고민하지 말라. 창세 전에 이미 그렇다. 그리고 너에게 맞게 자꾸 변화시키려고도 하지 말라. 얘는 그래야한다. 성격이 이래야지, 좀 까다로워야지 기타도 잘 치지, 성격이 헬렐레하면 어떻게 하는가? 그래야지 일렉도 했다가, 통기타도 했다가 철저하게 배울 수 있다.
다 정해져있다. 자유의지는 성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자유의지로 성품을 선택하는 것을 나그네라고 하느냐? 여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성품 훈련하려면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성품 훈련을 하려면 물질이 필요하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가지 줘야한다. 그게 세 번쨰 십일조이다. 그것을 떼어놔야한다. 속옷까지 줘야한다.
나한테 돈 좀 달라고 하면 줘야한다. 나한테 돈 좀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줘야 한다. 그래서 이 자유의지가 나는 성품을 선택한다. 나그네로 사는 것이다. 내껄 뺏어가면 주고, 나는 성품을 선택해야 한다. 그 상황에서도 미워하지 않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나한테 사기쳐서 1000만원을 가져갔다? 그건 내 것이 아니다. 이미 떼어놨어야 하는 것이다. 안 떼어놨으니까 얘가 강제로 가져간 것이다. 그거 주고 나는 미워하지 않는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평소에 연습을 해둬야지 실제 상황이 왔을 때 할 수 있다. 돈 100만원을 잃어버려도 상관없다. 또 성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또 누구 필요한 사람에게 갔겠지. 그런 생명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엄마 병원비가 없었던 아이가 줏엇겠지. 그 아이를 축복해주소서. 내가 주는 것으로 하니까 아이가 양심의 가책 느끼지 않게 해주십시요. 하는 것이다. 그거 어떤 놈이 가져갔어? 하니까 줏은 사람이 벌서 정죄감이 시달린다. 그럴 필요가 왜 있는가?
내가 좋은 볼펜을 가지고 있는데, 옆의 애가 와서 이거 좋다고 만진다. 그러면 샬로쉬, 세 번째 십일조이다. 줘버려라. 핸드폰 좋은거 가지고 있는데, 자꾸 만진다. 줘버려라.
YM이나 많은 선교단체에서 이런 것들이 풀어지면서 Flowing이라고 명명했다. 괜히 옆사람 성경책에다가 만원 끼워넣고, 오만원 끼워넣는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야에 넣고 왜 안 오냐고 하지 말고 말이다. 옛날에 그런거 참 많이 했다. 돈 생기면 그 사람 가방 속에 집어넣고, 어려워보일 때, 기도하다가 어려워보이는 사람에게 집어넣는다. 이게 세 번째 십일조이다.
이것이 다 이 땅을 나그네로 살아야만 가능하다. 이 땅에서 아둥바둥하면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לַיָּתֹום 라야톰 : 고아에게
야톰, 고아이다. 고아에게 준다는 것은 자기가 고아로 산다는 소리이다. 탐, 야곱은 장막에서 토라공부하는 자이다. 토라공부하는데 쓸 돈이 있어야 한다. 토라공부하는데 돈을 얼마나 쓰고 있는가? 교회 와서 다 공짜인 것 같은가? 돈을 써야한다.
매달 5000원? 더 써야한다. 토라공부하는데 무슨 돈 쓸게 있을까? 토라공부하는데 왜 돈을 써야하는가? תָם 탐, 순전하고 완전한 자를 고아라고 한다. 왜냐면, 순전하고 온전하고, 완전하다는 것은 עִם 임이다. 하나님과 함께있으면 다 되는 존재이다. 그런데 왜 고아라고 하는가?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고아이다. 하나님이 저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하나님하고 함께 있으면, Togetherness를 가지고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고아로 살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 토라공부는 다른게 아니라, Togetherness, 함께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독히도 함께하는 것을 싫어한다. 나를 너무 좋아한다. 함께하는게 너무 싫다. 토라공부 혼자 하는게 좋지, 왜 2시까지 말을 시키는가? 제 아내도 어떨 때 보면 막 짜증난다. 뭘 그렇게 제자들하고 돌아다니는가? 나는 쳐다도 안보고 말이다.
고아로 살아가는 것은 Togetherness, 함께하는 것이다. 그것에 십일조가 필요하다. 함께 살려면 십일조가 필요하다. 함께 뭐 하는가? 함께 할 것이 뭐가 있는가? 밥 먹고, 차 마시고, 이런거 해야하지 않는가? 이게 고아로 살아가는 것이다.
고아는 혼자 있으면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함께 있기를 원하는 온전한 자이다. 이 땅에서 우리는 다 고아로 살아간다. 그래서 끊임없이 함께 있으려고 한다.
לָאַלְמָנָה 라알마나 : 과부에게
알마나는 과부이다. 과부를 만족시키는 것은 뭔가? 신성(א)을 훈련(ל)시키는 것이 만나(מָנָה)라는 것이다. 신성을 훈련하는 십일조를 또 하는 것이다.
이 훈련을 하려면 십일조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들어오는 모든 소득을 이렇게 세번의 십일조를 하면서 나는 형상을 훈련하는 형상이라는 인정을 받는다. 여러분 속에 그런 지혜가 있기를 축복한다
사람이 키 타보에 와서 마아쎄르, 십일조를 통하여 모든 나의 행함을 움직일 수 있는 머리를 얻는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든 행함을 움직일 수가 있다. 사실 이 세번의 십일조는 내가 스스로 교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십일조라는 신비한 방법을 내가 이 부분들을 취하게 된다. 하나님이 그냥 주신다
레비, 게르, 야톰, 알마나는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것을 십일조라는 신비한 방법을 통해서 주님이 하신다. 이렇게 하고나면 이 사람은 이 십일조를 통해서 아싸의 머리가 생기니까, 처음 교정할 수 있는 영역부터 차례대로 차근차근 해나갈 수 있다. 이게 키 타보의 기쁨이다. 그러면, 이 키 타보의 마지막 구절이 이것이다
신29:9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정말 듣기만해도 좋지 않은가? 한두개의 일이 아니라,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이게 베하야 키 타보의 기쁨이다. 지금까지 그렇다고 믿었지만, 이것에 대한 상처가 많아서 아멘 소리가 작은 것이다. 1년 내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형통했던 햇수가 하루라도 있는 사람 있는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형통한 해가 있을까?
그런데, 모든 일이 형통한 것이다. 시험에 떨어지는 것도 없고, 모든 일이 형통하다. 이게 키 타보의 위력이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לְמַעַן 레마안 : 목적, ~을 위해서
- 이 모든 토라의 말씀을 지켜서 너희들이 행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레마안, ~을 위해서이다. 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그렇게 지켜 행하라고 하는가?
תַּשְׂכִּילוּ 타슈킬루 : 너희들을 형통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שָׁכַל 샤칼 : 형통하다
אֵת כָּל 에트 콜, 너희들이 행하는 콜, 모든 것에서 형통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가 있다.
그동안에는 예수 믿으면 내가 원하는 모든 일이 형통한다고 교육을 받아왔다. 그렇지 않다. 예수 믿으면 내가 원하는 것에서는 형통한다, 안 한다? 제가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예수는 우주 최고의 킬러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 죽여버리실 수 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되는 일이 없다. 나에 속한 일은 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콜에 속한 것에는 형통함이 임한다. 그래서 사칼은 형통이다. 기가막힌 것이다. 그래서 진짜 키 타보에 오면 모든 것이 콜을 목적으로 해서 살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이 직접 오셔서 다 형통하게 하신다. 이 형통이라고 하는 단어는 창세기에서 문제가 되었던 단어이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래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했다고 한다.
וַתֵּרֶא 바테레 : 이 여자가 보았다
이 여자가 나무를 봤는데, נֶחְמָד 나하마드, 아주 매력적이고 탐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뭘 위한 것이라고 하냐면, לְהַשְׂכִּיל 레하스킬, 지혜롭게 하기 위한 탐스러움을 가지고 있다. 이 나무가 왜 유혹이 되었냐면, 레하스킬 때문이다. 레하스킬은 이 나무를 가지면 모든 형통을 이루어 낼 것 같다. 이 형통을 위한 지혜를 레하스킬이라고 한다.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샤칼이라고 하면 학위, 교육 정도를 나타내는 말이다. 왜냐면 그것에 따라서 세상에서 취직이 가능해진다. 형통이 가능해진다. 교육받은 정도에 따라서 형통이 가능해진다. 어떤 지혜를 가졌냐에 따라서 말이다
레하스킬은 창세기에서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이다. 이 레하스킬을 위해서, 자기가 형통할 수 있는 지헤를 가지기 위해서 한 것이 열매를 취한 것이다. 키 타보에서는 창3:6을 풀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키 타보의 시작이 열매를 가지고 오라는 것이다. 그 땅에 오거들랑 열매를 가지고 와라. 열매 때문에 문제가 생겼는데, 주님이 열매를 가지고 오라고 하고, 키 타보의 마지막에 레하스킬을 이야기하면서 모든 일에서 그 지헤를 가진다고 한다
창3:6에서 한게 지혜로우려고 열매를 따먹었다가 난리가 난 것이다. 그런데 키 타보에서는 그 열매를 가져오라고 하고, 네가 그 지혜를 얻는다. 모든 일에 형통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주시려고 했던 것은 열매를 주시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모든 일에 형통하는 지혜를 안 주시려고 했을까? 하나님과 같은 지혜를 주시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그것을 주시는 것을 완성하는 것이 키 타보이다
그런데 똑같은 내용인데, 뭐 때문에 창3장에서는 저주가 왔고 지금 키 타보에서는 복이 오는가? 그래서 키 타보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것이 저주이다. 키 타보에만 98개의 저주가 나온다. 거의 모든 저주가 다 키 타보에 나온다. 왜냐면 이게 다 창3장을 다루기 때문이다. 차이점은 무엇을 위한 형통이냐는 것이다. 나를 위한 형통이냐, 콜을 위한 형통이냐이다.
창3장과 키 타보, 저주와 축복의 차이는 딱 1개밖에 없다. 자신을 위한 형통이냐, 아니면 콜을 위한, The Man을 위한 형통이냐? 이 차이이다. 너는 열매를 왜 따먹으려고 하는가? 너를 위해서 먹으려고 하는가, 아니면 The Man을 위해서 열매맺으려고 하는가? 이 차이박에 없다. 만약에 사람이 The man을 위한 목적을 세운다면, 그 사람에게는 형통함이 내려온다.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이 지혜있는 자를 샤칼을 지닌 자라고 한다. 샤칼을 지녔다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샤칼은 내가 어떤 모양인데, 이 모양을 콜을 위해서 가지고 있다. 콜을 담는 모양이다. 형통할 수 있는 지혜라고 하는 것, 지혜라고 하는 것은 그릇이다. 콜이라는 말 자체가 클리, 그릇이라는 것이다. 지혜라는 것은 무엇을 담는 그릇이다. 너는 무엇을 담으려고 하는가?
사실 다 내가 하는 말, 내 생각, 내 지혜, 지식은 다 그릇이 되는데, 도대체 뭘 담으려고 하는가? 자기 자신을 담으려고 한다. Self이다. 나를 담으려고 뭔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는 것이다. Everyday 나를 담으려고 한다. 그러면 그 지혜는 자기를 망하게 한다.
샤칼은 사실 멸망으로 가는 지혜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담으려고 하면 멸망한다. 그런데 사람이 모든 일에 형통할 수 있는 지혜는, 콜을 담는 모양, 그릇이다. 내 말, 내 지혜 속에 과연 콜이 담길 수가 있느냐? 콜이라는 것은 직역하면 Everything이다.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내 삶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모든 양들, 잃어버린 영혼들을 다 담을 수 있는 모양이냐는 것이다. 그런 그릇이냐는 것이다. 나는 그런 지혜냐는 것이다.
내가 아는 모든 지혜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고, The man에 속한 이웃을 다 담는 그릇이면 형통한다고 한다.
사52: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주님은 이미 그렇게 되셨다. 받을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었다. 그분은 샤칼이 있으셨다. 그분의 모든 지혜와 그분의 모든 삶의 모양은 전체를 담기 위한 것이었다. 전 영혼을 담기 위한 것이었다. The Man에 속한 모든 지체들, 이웃들을 다 담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다 담으려는 그릇을 가졌기 때문에, 그분을 지혜롭다고 하는 것이고, 그분을 형통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내가 너희들을 존귀케하리라, 영화롭게 하리라, 반드시 우리는 주님과 같이 영화롭게 되어야한다. 존귀케 되어야한다. 그럴려면 우리는 지혜롭게 되어야한다. 형통한 자가 되어야 한다. 형통한 자가 되려면 내 그릇이 나를 담으려고 하는게 아니라, 모든 인류를 담으려고 하는 그릇이 되어야한다. 이러한 지혜를 사칼이라고 한다.
창3장에서는 나를 담으려고 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내 욕망을 담으려고 그 열매를 따먹은 것이다.
렘3: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LTG리더들은 잘 들으시기 바란다. 주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이란, 지식과 명철로 양육해야 한다. 목자들이란 양육을 하는 자들이다. 자기 follwer, 제자들을 양육하고 키워야 한다. 그런데 지식과 명철로 키워야 한다. 명철이라는 것이 샤칼이다. 삶의 모양을 줘야한다. 삶의 그릇을 줘야한다. 교육을 줘야한다. 무엇에 대한 교육이냐면, The Man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키워줘야 한다. 그 머리 속에서 나오는 생각이 맨날 자기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머리 속에 전 Humanity를 담을 수 있고, Humanity를 신성으로 영화롭게 담을 수 있는 교육을 시켜줘야 한다. 여러분들은 그런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수1: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제 형통하다는 의미를 잘 아시기 바란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다. 오늘날 기독교 교회는 수1장 말씀을 가지고 진짜 어디 가던지 형통한다고 믿었고, 그런 거짓말들을 또 가르쳤다. 여러분 다 형통했는가? 제가 보기엔 형통 못한 인간들 천지다. 저는 제자가 되고나서 기가막히게 형통한 것을 본다. 뭘 하던, 어디에 있던 형통하다.
- 이케아에 들어갔건, 어디에 들어갔건 상관없다. 어디든 형통하다. 광고회사에 들어가던, 인턴이던 상관없다. 뭘 하던 애들이 형통한 것을 본다. 누구랑 결혼했던, 날 잡아먹는 여자랑 결혼했던 상관없다. 다 형통하다.
정말 대단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샤칼이다. 콜을 담을 수 있는 모양이 된 것이다. 사람이 이런 지헤를 가지게되면, 고통을 느낀다. 키 타보에서는 또한 사람을 고통 가운데로 인도한다. 우리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게 형통인 줄 아나, 고통을 느끼고 알게되는게 형통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면 고통을 안 느끼는 것을 행복인 줄 안다.
그런데 주님은 일부로 고난에 참여하신다. 내가 이 고난을 받아야하리라고 하신다.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게 채운다고 한다. 고난의 삶 속으로 나간다. 그래서 키 타보는 이런 샤칼의 지혜를 가진 자들은 다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 고통에는 의인의 고통이 있고, 악인의 고통이 있다. 고통을 안 느끼려고 하면 그것은 대책이 없다. 모든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그런데 사탄은 인간에게 사기를 쳐서 고통을 안 느끼도록 한다.
유 선생님이 그걸 잘 안다. 고통을 안 느끼려고 몸을 마비시키면 몸이 망가진다. 고통은 신의 선물이다. 그런데 의인의 고통이 있고 악인의 고통이 있다. 이게 무슨 차이일까?
악인의 고통은 자기 욕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고통스러워한다. 자기가 원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을 악인의 고통이라고 한다. 의인은 주님의 은혜로 고통을 안 느낄까? 그렇지 않다. 의인도 고통을 느낀다. 이 의인의 고통을 샤바르라고 한다.
שָׁבַר 샤바르 : 의인의 고통, 아들(בַר)의 형상(שׁ)
= Broken heart, 부서지다
사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주님께서 나를 보내사, 메시아가 왔다. 나를 보내신 이유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기 위해서이다. Broken heart이다. 마음이 상했다는 것이 샤바르이다. 이것을 해석하기 어려워서 broken heart라고 번역했다
샤바르라는 것은 곡식을 갈듯이 부서졌다는 것이다. Broken되었다. 우리는 원래 에하드였는데, 60만의 영혼으로 부서졌다는 것이다. 이게 샤바르이다. 의인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였는데 부서졌다는 것이다. 이게 의인의 고통이다. 너랑, 나랑 하나였는데 지금 분리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게 의인의 고통이다. 왜 고통을 느낄까?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지금 현재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여기서 안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가 되야지 다시 에하드가 된다. 원래 에하드였는데, 그게 부서졌다. 그래서 다시 에하드가 되지 않았는데도 희희낙락, 괜찮다, 자기는 자기대로, 나는 나대로 살거야, 아직 에하드가 안되었는데도 괜찮다고 살자고 하면 그것을 악인의 고통이라고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주님은 내가 고난받아야 한다. 샤칼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담아야 하는 지혜를 가져야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에하드시켜야하는 사명을 가졌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잃어버린 양 하나를 찾을 때까지는 내가 안주할 수 없다. 한 드라크마를 찾을 때까지 고통스러워하면서 모든 자들을 다 일으키기 위해서 그 고통을 느낀다. 이것을 의인의 Broken heart라고 한다
주님은 왜 오셨는가? 이런 의인의 고통을 고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의인의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에하드를 주기 위해서, 분리의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에하드를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의인의 고통이 여러분의 고통이 되시길 축복한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고통을 여러분들 속에 채우시길 축복한다. 그래야 주님이 오실 수 있다. 그것을 고치시기 위해서 오실 수 있다. 나 좀 잘 살게 해달라, 이거 고치려고 오시는게 아니다. 주님 나 죽겠어요, 이거 고치려고 주님 오실 수 없다. 그러면 이 사회는 암세포 덩어리가 난무한다.
내가 만약에 Broken heart가 되서, 내 이웃과 내가 하나되지 못했다. 하나되야겠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고통을 내게 채우는 것이다. 내 자녀와 내가 에하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하드 시켜주소서. 내 Follower, 제자와 에하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교회에서 에하드를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Broken, 고통이 여러분들 속에 있을 때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고칠 수가 있는 것이다.
키 타보에서 주님은 저주를 이야기하신다. 악인의 고통을 저주라고 한다. 그리고 의인의 고통을 축복이라고 한다. 이 저주는 바로 자기를 사랑해서 오는 고통이다. 자기를 사랑하면, 자기 욕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고통스러워한다.
고전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 밖에 없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주를 사랑한다고 한다. 우리는 에하드였기에, 하나되야한다고 한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날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주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받는 저주를 98개의 저주라고 한다.
98이라고 하는 숫자는 סָלַח 쌀라흐이다. 용서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오셔서 98개의 저주를 용서하신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98개의 저주를 다 용서하시고, 이제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The Man을 위해서, 주를 위해서 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밖에 없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주를 사랑하는 것이다. 키 타보는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한다. 주를 사랑하는 것만 남겨놓는 것이 키 타보이다. 오직 주를 사랑하는 것만 오는 것이 키 타보이다.
신28장은 엄청난 저주가 기록되고, 절수가 68절에 이른다.
신28:68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싣고 전에 네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으로 끌어 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적군에게 남녀 종으로 팔려 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
저주의 마지막이 뭔지 아는가?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싣고 애굽으로 다시 데려간다. 저주의 마지막은 배에 타게 된다. 절대 이 배를 타지 마시길 축복한다.
בָּאֳנִיֹּות 베아니요트 : 배
- 베 : in
너를 배에 싣고, 주님이 וֶהֱשִׁיבְךָ 헤쉬브카, 돌려보내는 사역을 한다. 야훼께서 다시 미쯔라임으로 돌려보내는 사역을 하신다. 애굽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이 거하는 곳이다. 목적이 자기 자신인 자들이 사는 곳이다. 결국 지옥이라는 것이다
보낼 곳은 그곳밖에 없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악인의 고통밖에 안 느낀다. 자기 욕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런 고통 밖에는 모른다. 샤바르의 고통, 이런건 모른다. 이웃과 하나되지 않았을 때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때, 고통을 느끼지 않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겁나게 고통스러워한다. 상처받았다고 한다.
이번 주간에 이 샤밭에, 이웃과 정말 하나되지 않을 때 고통을 느껴보시지 않겠는가? 내 사랑하는 사람과 에하드되지 않았을 때 고통을 느껴보지 않겠는가? 고통은 그때 느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이 배에 실어서 애굽으로 보내는 수 밖에 없다.
배라는 것은 אֳנִיֹּות 아니요트, 나(אֳנִי)를 완성(ת)하는 것이다. 평생 내 배 하나 만든 것이다. 내 이야기 계속 해서, 나를 담는 그릇을 만든 것이다. 그것을 아니요트라고 한다. 그걸 타고 애굽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다. 주님이 그리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가게 되어있다.
이 배를 만드는 것을 중단하시고, 구원의 방주, 예수 그리스도의 배를 만드시길 축복한다
* 기도
키 타보 주간에 우리를 정말 형통케하시기 위해서 사역하시는 주님, 나는 형통한 삶을 살 것입니다. 정말 형통케 될 것입니다. The Man을 담는 그릇이 될 것입니다. 모든 이웃을 하나되게하는 그런 지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꼭 형통하시길 축복한다. 온 인류를 하나되게하는 지헤를 가지시게 되길 축복한다. 주님 이제 나를 담는 지혜, 나를 위한 지혜를 다 버리겠습니다. 아니요트를 건설하던 것을 중단하겠습니다. 이제 주님을 담는 지혜를 얻어서, 어딜 가던지 형통한 자가 되겠습니다.
나를 형통케 하고자 인류가 죄악을 범했지만 이제 그것을 돌이킵니다. 이제 The Man을 담기 위한 그릇이 되겠습니다. 온 이웃을 하나되게하는 그런 지혜를 담는 그릇이 되겠습니다. 어딜 가던지 형통한 자가 되겠습니다. 우리가 그런 이스라엘이 될 것입니다. 아니요트를 만드는 것을 중단합니다. 98개의 그 저주를 중단합니다. 98개의 저주에서 사함받았음을 이 시간 선포합니다. 나를 위해서 살 때 오는 98개의 저주가 끝났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자기 몫만을 위해서 살면 저주가 오는 이 원리를 키 타보에서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주를 사랑함으로, 주를 담는 그릇이 됨으로, 주의 신부가 됨으로, 98개의 모든 저주가 사해진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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