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웅순의 유묵이야기>
백하 윤순의 글씨(2)
석야 신웅순
경포대 내의 ‘제일강산’ 현판
강릉 경포대에 있는 현판 ‘第一山’은 미불(米芾)의 글씨이다. 미불은 북송 시대의 유명한 서예가로 채양, 소동파, 황정견등과 함께 왕희지의 서풍을 이룬 송 4대가의 한 사람이다.
이광사의 원교서결 (圓嶠書訣) 하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연광정의 ‘第一江山’ 편액은 바로 미원장(米元章)의 석각서를 탑본하여 판각한 것이다. 그 중 ‘江’자는 본래 없어서 주지번(朱之蕃)의 글씨로 채웠으나, 둔열하여 썩 어울리지 않았다, 백하(白 下)가 이를 바꾸어 썼으나, 오히려 주지번보다 못하니 애석한 일이다.”
주지번은 호가 난우인 명나라 때의 유명한 서화가이며 백하는 조선 후기 글씨의 대가 윤순의 호이다.
연광정 ‘第一山’의 글씨는 중국 태산의 ‘第一山’ 미불의 글씨이다. 당대의 누군가가 중국에 갔다가 비석에 있는 것을 임모해온 것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 현판의 ‘第一山’은 미불의 석각서 탁본이고, ‘江’자는 윤순의 글씨이다. 미불의 ‘제일산’과 윤순의 ‘강’자가 이 현판에서 만난 것이다.
이 연광정 현판과 같은 글씨 또 하나가 있는데 경포대의 ‘第一江山’ 현판이다.
1953년 경포대의 ‘第一江山’을 제작하는 중에 ‘江’자를 분실했는데 그 바람에 ‘江’자는 어느 알 수 없는 서예가의 글씨로 제작되었다.
글씨에도 인연이 있는가. 경포대 내의 ‘第一江山’은 미불의 ‘제일산’과 신원 미상의 서예가의 ‘강’자가 만난 현판 글씨가 되었다.
외에 윤순의 편액 글씨로 강화 유수부 동헌인 ‘명휘헌’의 현판이 있다.
괴산군 청천면 사담리 산12 소재, 월경 글씨
출처 : 쿠키 뉴스 2006.10.17
이상주는 "이하곤이 자신의 문집인 '두타초(頭陀草)'에서 중화(仲和)가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화는 윤순의 자"이다. "이 글씨는 1717년부터 이하곤이 죽기 이전에 쓴 것"이라고 한다.
서예가 신상철씨는 "'蘿(라)'는 초서 가까운 행서이고, '月'은 행서지만 해서의 기운이 있으며, '逕(경)'은 행서이면서 약자 비슷하게 썼다"며 "행서를 쓰면서 세 글자를 변화있게 쓰는 등 다양한 글씨를 섭렵해 노련미가 응축돼 있다"고 평했다.
이상주는 '라월경'의 글귀를 ‘송라(松蘿)와 등(藤)나무 덩굴 사이로 보이는 달’ 이라고 풀이했다. 청천면 사담리 암벽에 새겨진 '사담동천(沙潭洞天)'과 인근의 '송풍석(松風石)'의 각자도 윤순의 글씨라고 말하고 있다..(쿠키뉴스,2006.10.17.)
윤순의 각자 글씨가 또 남아있는 곳이 있다. 한 글자의 지름이 약 1m 정도 되는 강원도 설악산의 ‘비선대’ 초서이다.
윤순이 쓴 비선대 글씨
-출처 : 속초 문화원
윤순은 우리나라 역대 서법과 중국 서법을 함께 익혀 한국적인 글씨를 쓴 서예의 대가이다. 왕희지·미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소식체로 쓴 것도 있고, 동기창체에 가까운 것도 있다. 그의 문하에 이광사를 배출했으며 조윤형, 강세황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홍양호는 “오직 백하 윤공이 천년 뒤에 태어나 뛰어남과 빼어남으로 조선의 고루함을 단번에 씻어냈다. 김생 이하 여러 서가를 다 취하여 그 빛나는 것을 가려냈으며 당·송·원·명을 깊이 터득하여 이를 왕희지에 절충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김정희는 『완당집』에서 “백하의 글씨는 문징명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같이 그는 옛사람의 서풍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대가의 역량을 지녔으며 특히, 행서는 각가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 일가를 이루었다.
백하는 자신의 서첩에서 "비록 획의 뜻은 얻었으나 그 뜻이 먼저 속된 눈에 들고자하는 데 있다면 그 짜임새는 비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뜻이 항상 굳세고 속되지 않은(창경발속·蒼勁拔俗) 곳에 있은 뒤에야 그 성취가 필경 크게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백하는 글씨의 정도를 그 짜임새나 획이 아니라 '굳세고 비속하지 않은' 뜻에서 찾았다. 백하는 18세 봄부터 글씨 공부를 시작하여 37세 겨울까지 족히 20년을 공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글씨에 대한 고질과 독실한 공부가 스스로도 옛날 사람보다 못하지 않다고 말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경향신문,이동국 서예가 열전 17), 조선후기 백하 윤순,2006.11.17)
논자들이 백하 윤순의 글씨는 그 앞의 옛사람도 따를 수 없고 그 뒤에 올 사람도 따를 수 없다 고 하는데, 반드시 다 그러한 것은 아닐 것이다. 백하 윤순의 굳세고 정묘한 자태가 마구 솟아나 지만, 끝내 석봉 한호의 웅장하고 빼어나며 두텁고 질박한 것을 본받아 그 위에 이를 수는 없 다.
근래 한두 작가가 모두 백하 윤순에게 근원을 두고 있지만, 또한 백하 윤순을 본받아 그 위에 이 를 수는 없다. 그 앞의 옛사람도 따를 수 없다는 것은 지나치겠지만, 그 위에 올 사람이 따를 수 없다고 한 것은 정말 그러하다. 글씨는 작은 기예이지만 또한 세상을 따라 오르내리는 것이 이와 같다. 내가 이에 대하여 감개와 탄식을 이길 수 없다.
1787년(정조 11) 봄에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은 쓰다.
- 백하 윤순의 서첩에 쓰다, 표암 강세황
(경북 문화신문 . 조선시대의 서화평론’ <34> 백하(白下) 윤순(尹淳)의 서첩에 쓰다. 독립큐레이터 이택용)
백하 윤순 글씨의 위상을 말해주는 자료, ‘강세황의 백하 윤순의 서첩에 쓰다’이다. 옛사람도 따를 수 없다는 것은 지나치겠지만 윤순 위에 올 사람이 그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은 그의 글씨가 어느 좌표에 있는지 말하주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 주간 한국신문,2015.1.28.
첫댓글 감사하는마음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좋은자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