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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순례의 향기(15)
◉순례장소 : 양주관아➟성남종삼묘➟
황사영➟ 마재 ➟묘재➟천진암
무더위가 오는 날 성지순례를 오래간만에 갔다.
회원들이 너무 많이 빠져서 작은 인원수로 떠났다
오늘 하루피정에 있어서 의정부4곳과, 수원 2곳 날씨가 뿌연 안개 속에 성지를 향하여 달린다.
오늘 좋으신 예수님 감사하며 야고보순례단원들의 가족 중 참석 못한 식구들 당신과 함께 동행 하고 우리들의 기도 속에 머무르시고 순례를 함으로서 시작에서 끝까지 함께 하여 주시고 피정하는 마음으로 순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평화의 모후여, 평화의 모후여, 평화의 모후여 아멘.
첫 번째 간 곳
● 양주관아
박해 시기 경기 북부 지역의 신앙 전통은, 초기 교회 이래 신앙을 지켜 오던 포천과 마재, 19세기 전반과 중반기에 새로이 등장하는 고양과 송도 지역이 그 중심을 이루며, 이어 송도에서 장단, 고양에서 파주, 포천에서 양주 등 주변 지역으로 신앙이 확대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천주교 신앙이 이처럼 확산되는 현실 속에서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양주·송도·장단 등지에서 다수의 신자들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며, 양주의 경우는 기록상 5명의 신자가 이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나와 있다(《치명일기》No. 413~417).
즉 덕산 출신 김윤호 요한은 용인 굴암에서 거주하다 1866년 10월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었고, 권 마르타는 김윤호 요한의 아내로 남편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 마리아는 용인 한덕골에서 거주하다 1866년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었는데 당시 나이 42세로 중국에 들어가 죽은 최 프란치스코의 아내다.
홍성원 아우구스티노는 양주 일담리(세거지인) 출신으로 포천 고약리에서 거주하다 1868년 5월 19일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었는데 당시 나이 46세로 광주에서 치명한 홍 아우구스티노의 아우다. 그리고 양주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박 서방은 양주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나이 55세로 홍주에서 치명한 박사행의 부친이다(《치명일기》No. 413~417).
그런데 이 다섯 순교자 가운데 양주와 관련된 신자는 박 서방과 양주 일담리 출신으로 포천 고약리에서 체포된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정도이며, 용인에서 잡힌 3명은 전혀 양주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이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순교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시기에 양주에서 신자들이 처형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양주를 비롯한 경기 북부 지역의 신자 집단이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이에 양주 쪽에서도 신자들을 체포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의정부교구 순교자공경위원회는 지난 2008년 “경기 북부 지역과 한국 천주교” 심포지엄을 통해 《치명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양주의 정확한 치명지를 찾았고, 앞으로 치명 성지로 가꾸어 나갈 예정이다.
▒ 양주 관아지(楊州官衙址)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에 있는 조선 시대 관아터다.
조선 태조 4년(1395년) 서울을 한성부로 고치면서 양주의 치소를 견주(見主, 현양주시 고읍동)로 옮겨 양주군을 설치하였다. 중종 1년(1506년) 이곳에 양주군 관아가 세워진 이후 1922년까지 417년 동안 양주의 관아가 있던 곳이다. 현재 복원한 관아가 있는 자리는 목사의 정청이었던 매학당(梅學堂)이 있던 곳이다. 매학당은 목사가 정무를 보던 외동헌과 가족이 생활하던 내동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20여 칸 규모였다.
매학당 앞쪽 좌우에 향청(鄕廳), 중영(中營) 등 각종 부속 건물이 위치하였으며, 객사는 관아 서북쪽 약간 떨어진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아터 중앙에는 옛 동헌을 복원하여 신축하였는데, 한식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에 정면 7칸, 측면 3칸의 목조 건물이다. 화강암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방형 기둥을 세웠으며, 두공은 간결한 모양의 익공을 두 겹으로 얹은 무출목 이익공식 건물이다. 동헌의 오른편에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양주목사들의 송덕비들을 모아 놓았다. 비가 모두 18기인데 17기는 송덕비이고 나머지 1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유허비다. 이 비들의 비좌는 화강암으로 새로 만든 것이다.
두 번째 간 곳
● 남종삼묘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한 남종삼 성인 가족 묘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에 있는 길음동 본당 공원묘지 내에 자리한 의령 남씨 가족 묘소에는 병인년 서소문 밖에서 치명한 성 남종삼(南鍾三, 호 煙波, 1817~1866, 요한)의 묘소가 있다. 병인박해 때 남종삼 성인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고, 부친 남상교는 공주에서, 장자인 남명희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처 이씨(李召史)는 유배지 훗날 창녕현에서 순교하였다.
남종삼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 호 雨村, 1783~1866, 아우구스티노)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도호부사가 된 남종삼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 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온 후에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3품 승지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젯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洪鳳周, 1814~1866, 토마스), 이유일(李惟一, 1819~1868, 안토니오) 등과 논의하여 영국, 프랑스 등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아책(防俄策, 聯佛防俄論)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베르뇌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남종삼은 중도에서 체포되어 국청에서 6차의 국문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국청에서 남종삼은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안정과 새 역사의 추진을 위해 러시아 남침의 위험을 경고하였다.남종삼의 처형 후 가족을 노륙지전(孥戮之典)에 처하라는 상소가 거듭되었으나 왕명으로 각하되었다. 그러나 결국 남종삼의 부친 남상교는 공주 진영으로, 장자인 남명희(南明熙)는 전주 진영으로 잡혀 가 마침내 공주와 전주에서 순교하였고, 처 이조이(李召史)와 나머지 자식들은 각처로 유배되어 노비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중 이조이는 유배지 창녕에서 훗날 순교하니 남종삼 가문은 3대에 걸쳐 4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킨 셈이다. 남종삼은 그 후 1885년에 이르러 조정의 조치로 모반부도의 죄를 벗게 되었다.
■ 순교자
◆ 성 남종삼 요한(1817∼1866)
자는 증오(曾五), 본관은 의령(宜寧). 성 남종삼(南鍾三) 요한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성인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 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초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 때 남종삼은 홍봉주, 이유일 등과 의논하여 영불(英佛)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장 시므온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그는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여섯 차례의 국문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세 번째 간 곳
● 황사영 묘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의 무덤은 선산이 있던 가마골에서 1980년 후손에 의해 발견되었다. 황사영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써서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黃沁, 호 仁甫, 1757~1801, 토마스)이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혀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으로 처참한 육시형을 당하였다.
순교 후 친척들이 황사영의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던 가마골(현 경기도 남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안장한 것으로 보이며, 이 무덤은 1980년 현지에서 후손에 의해 발견되었다.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과연 조선 시대에 국가 모반죄로 육시(戮屍)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닌 시신을 수습하여 정식 무덤에 안장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고,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황사영의 무덤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순교 이후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숙부 석필(錫弼)은 경흥으로, 모친 이윤혜(李允惠)는 거제로, 부인 정명련(丁命連, 일명 蘭珠, 1773~1838, 마리아)은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관비(官婢)로, 두 살짜리 아들 경한(景漢, 일명 敬憲)은 어린 탓에 교수형을 면하고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노비로 유배가게 되었다.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 하나로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1790년(정조 14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수많은 교우들이 희생되었고,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金漢彬, 1764~1801, 베드로),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해 8월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되어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명주에 적었다.그는 ‘순교자의 피는 천주교의 씨앗’임을 굳게 믿었고, ‘주님을 위해 진실로 남은 힘을 다하고자 한다.’는 소명 의식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신앙심으로 교회 재건을 위한 방책을 《백서》에 담았던 것이다. 그러나 《백서》는 내용상 국가에 해를 끼치려는 방책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고, 위정자들에게는 천주교 신자들의 양박청래운동(洋舶請來運動 ; 서양 선박을 청해 와서 외교적 교섭을 통해 선교하려는 운동)과 천주교에 대한 인식을 더욱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 《황사영 백서》
《황사영 백서》는 1801년 당시 천주교회의 박해 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 등을 북경의 주교에게 건의 보고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압수당한 비밀 문서다. 황사영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쓰인 것인데, 모두 122행 1만 3,3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이 《백서》는 ‘서론’, ‘본론’, ‘결론, 대안 제시’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은 1행부터 6행까지로서, 여기에서는 1785년 이후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본론’은 7행부터 90행까지로서 전체 분량 중 거의 70%에 해당된다. 본론에서는 신유박해의 전개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특히 황사영은 여기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들은 교회 관계 사건들을 정리해서 보고하고 있다. 한편, 91행 이하의 ‘결론’ 내지 ‘대안 제시’의 부분에서는 먼저 박해로 인한 교회의 피폐상과 박해의 종식에 대한 강한 열망을 표현했다. 그리고 청국 교회와의 연락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이어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하고 있다. 즉 그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淸)의 위력에 의존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을 먼저 제시하였다.
◆ 황사영 유물 기증 받아 1801년 신유박해의 순교자 가운데 한 명인 황사영 알렉시오의 고난의 삶과 정신이 배인 유품이 교회 품으로 돌아왔다. 황사영 순교자의 18대 종손 황세환(요셉)씨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황사영의 토시가 든 청화 백자합을 연구소에 기증했다. 기증된 청화 백자합은 1980년 8월 31일∼9월 1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에 있는 황사영의 묘소 발굴 때 출토된 것으로 그간 창원 황씨 판윤공파 종중에서 보존해오다 이날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영구 기증됐다.토시와 관련, 전하는 바에 따르면 황사영이 16살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자 그의 됨됨이와 재주를 높이 산 정조가 친히 그의 손을 잡아 격려했으며 이에 순교자는 토시를 죽을 때까지 손목에 차고 다녔다고 한다. 황사영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자 시신을 옮긴 후손들이 이 토시를 합 속에 넣어 보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출토 당시 돌 십자가와 함께 180여 년간 지하에 묻혀 있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멸된 토시는 까맣게 응고된 형태로 남아 원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있다.
■ 순교자
◆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
황사영 알렉시오는 그의 선조 10여 대가 판서 벼슬을 지낸 명문가 태생으로 부친 황석범 역시 진사 시험에 합격되어 한림학사로 있었다. 하지만 황석범은 1774년 병사하고 사영은 유복자로 태어나게 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영세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시 황사영은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힌다. 그는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진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넷 번째 간 곳
● 구산
전통적 신앙 공통체의 모습이 남아 있는 성 김성우 안토니오의 고향 구산 성지는 박해 시대 이래로 유명한 교우촌이자 전통적 신앙 공동체의 모습이 남아 있는 성 김성우 안토니오의 고향이다. 성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순교자들을 가족 묘지에 이장,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박해 시대의 자취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최근 주변의 택지 개발로 가족 묘지가 이장되고 머지않아 옛 모습이 사라진 아파트 단지 안의 고립된 성지로 변모될 예정이라 아쉬움이 크다.
구산에서 배출된 순교자는 1841년에 4월 29일(또는 28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한 성 김성우(金星禹, 禹集, 1795~1841, 안토니오)를 비롯하여 그의 첫째 동생 덕심(德深, 萬集, 1798~1841, 아우구스티노), 둘째 동생 윤심(允深, 文集, 1801~1868, 베드로 알칸트라)과 김성우의 아들 성희(金聖熙, 1815~1868, 암브로시오), 덕심(만집)의 아들 차희(金次熙, ?~1858) 윤심(문집)의 아들 경희(金敬熙, 1823~1868), 사촌인 주집(金胄集, 스테파노)의 아들 윤희(金允熙, 1834~1868)와 최지현(崔址鉉, 揮斗, ? ~1868), 심칠여(沈七汝, 1832~1868, 아우구스티노) 등 모두 9명이다.
성 김성우 안토니오는 1833년에 유방제(劉方濟, 본명 余恒德, 1795~1854,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어의동, 즉 서울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동대문 밖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서울 마장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그런 다음 다시 구산으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을 마련하고, 1836년 여름에는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를 모셔와 성사를 받았다. 이때 모방 신부는 김성우의 신심을 높이 사서 이곳의 공소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39년 박해 때 그의 아우들과 사촌 김주집을 체포하여 광주유수(廣州留守)가 있던 남한산성으로 끌고 갔다. 그중 덕심(만집)은 체포된 후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41년 1월 28일에 통회와 신앙심을 지닌 채 병사로 순교하였다(옥사 獄死). 반면에 윤심(문집)과 사촌은 19년 5개월만인 1858년 철종(哲宗) 임금의 원자 탄생을 경축하는 특사(特赦) 때 배교 없이 석방되었다. 그후 윤심은 1868년 3월 8일(음 2월 15일), 그의 조카들 성희, 차희, 경희, 윤희 등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김성우는 1840년 1월경에 체포되었으며, ‘사학(邪學)의 괴수’라는 명목 아래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 4월 29일(음 윤3월 9일 또는 양력 4월 28일 음력 윤 3월 8일) 47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행동하였고, 외교인 죄수들에게 교리를 전하여 2명을 입교시키기까지 하였다. 옥중에서 그가 남긴 유명한 명언은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1846년 9월 22일자 서한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순교를 각오한 말씀이었다.“사또께서 아무리 묻고 권고하고 할지라도 제 입에서는 한 가지 대답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즉 저는 천주교 신자요, 천주교 신자로서 죽기를 원할 따름입니다.”구산 성지 내에는 수원교회사연구소가 있어 성지와 순교자들의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 성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
경기도 광주 구산에서 부유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우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았다. 천주교를 알게 되자 두 동생과 함께 곧 입교하였고, 열렬한 신앙으로 전교 활동을 펼쳐 자신이 사는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세례를 받고 서울로 이사한 뒤 자신의 집에 공소를 만들어 신부들을 도왔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인으로 밀고 되었으나 미리 피신하였고, 고향에 남아 있던 두 동생만 체포되었다. 그러나 김성우도 이듬해 1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감옥에서도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여 2명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다. 옥살이 15개월 만인 1841년 4월 28일 치도곤 60대를 맞고 이튿날 교수형을 받아 4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김만집 아우구스티노(1798∼1841)
김만집은 김성우 성인의 첫째 동생으로 비록 형제들보다는 늦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이후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아우인 김문집(베드로)과 사촌 김주집(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의 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로부터 김만집은 다시 오랫동안 험난한 옥고를 겪어야만 했으나, 신앙의 가르침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기 위해 이를 참아 받았다. 결국 옥중에서 병을 얻게 된 그는 몇 주일 동안 고통을 받다가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41년 1월 28일(양력 2월 19일)로, 그의 나이 44세였다. 김만집이 순교한 뒤에도 아우인 김문집과 김주집은 약 18년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858년에 석방되었다. 한편 김만집의 장남 원희는 부친이 순교한 뒤 버려진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
◆ 김문집 베드로(1801∼1868)
김문집은 김성우 성인의 둘째 동생으로 맏형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둘째형인 김만집(아우구스티노)과 사촌 김주집(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의 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약 18년 동안을 갇혀 있다가 1858년 왕세자의 탄생을 계기로 베풀어진 특사 때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문집은 비밀리에 신부를 모셔다 성사를 보았으며, 언제나 교회를 도울 방도를 궁리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광주 포졸들이 구산으로 몰려왔고, 이내 그들은 김씨 집안의 성인 남자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때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김문집을 비롯하여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김주집의 장남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다. 그러니까 5촌 이내의 3대가 같은 날 같은 옥에 갇히게 된 셈이었다. 이후 김씨 집안 사람들은 여러 차례 유수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고통을 이겨냈다. 특히 68세의 김문집은 조카와 손자를 다독거리면서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자고 권면하였다. 그 결과 이들 6명 모두는 유수 앞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때 김씨 집안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포교가 '3대가 함께 죽도록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도중에 가장 어린 김교익을 언덕 아래로 밀쳐내 살려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 김문집과 아들·조카 4명은 1868년 2월 15일(양력 3월 8일) 함께 순교하였다. 이들이 순교한 뒤 김교익이 몰래 남한산성의 형장으로 가서 김문집, 김성희, 김경희 등 3명의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
◆ 김성희 암브로시오(1815∼1868)
김성희는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로 그의 부인은 전주 이씨 범회의 딸이었는데, 후사가 없었으므로 김문집의 아들인 경희의 5남 교익(토마스)을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하였다. 김성희는 부친 김성우가 1841년에 순교하자, 그 시신을 찾아다가 구산에 안장하였다. 이후 그는 약국을 경영하여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860년경에는 매부 홍희만에게 교리를 전하는 등 전교와 신앙생활에 열심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에 일가친척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이겨낸 뒤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에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시신은 그의 양자 김교익이 밤에 몰래 찾아다가 구산에 안장하였다.
◆ 최지현(1818∼1868)
최지현은 경주 최씨로, 자는 군실이다. <좌포도청등록>에는 그의 세례명이 휘두로 나오는데, 이것이 정확히 어떤 세례명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구산 마을에서 부친 최규겸과 어머니 교하 노씨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훗날 용인으로 이사하여 살던 중에 아내 함열 남궁 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되었다. 이때가 1860년경이었다. 그 후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아내가 먼저 체포되어 순교하자, 그는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살다가 1868년에 체포되고 말았다.< 좌포도청등록>에 따르면, 최지현은 1868년 윤 4월 4일 51세의 나이로 강원도 원주 태생 조종구(타대오), 경기도 지평 태생 민효원(나자로), 경기도 광주 태생 홍희만, 경기도 구산 태생 심칠여(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처음의 문초 때에 그는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돌려 굳게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친척이 찾아다가 그 집 산에 안장했었는데, 1978년에 순교자의 후손들이 구산으로 이장하였다.
◆ 김경희(1823∼1868)
김경희는 순교자 김문집의 외아들로, 자는 치선이었으나 세례명은 알 수 없다. 1823년(순조 23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장성한 뒤 순흥 안씨 진환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첫 부인이 일찍 사망하면서 전주 이씨 종태의 딸과 재혼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던 그는 비밀리에 자신의 집을 방문한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열심히 생활하다가 1868년에 부친과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남한산성 안에 있는 광주 유수의 치소로 압송된 그는 친척들과 함께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굳게 신앙을 지키고 1868년 2월 15일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후손들에 의해 거두어져 구산에 안장되었다.
◆ 심칠여 아우구스티노(1832∼1868)
심칠여는 구산 신자들 사이에서 전승되어 오지 않던 순교자이다. 그러나 <좌포도청등록>에 따르면, 구산 태생으로 1859년 무렵에 이웃 마을에 살던 신자 심성일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1864년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성인 주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심칠여는 1868년 윤 4월 4일에 강원도 원주 태생 조종구(타대오), 경기도 지평 태생 민효원(나자로), 경기도 광주 태생 홍희만, 경기도 구산 태생 최지현 등과 함께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다. 처음의 문초 때에 그는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돌려 굳게 신앙을 고백한 뒤 많은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이후 순교자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으나, 훗날 구산 신자들이 그의 용덕을 기려 구산에 그의 의묘를 조성하였다.
◆ 김차희( ? ∼1868)
김차희는 김만집(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로 부인은 광산 김씨였다. 그는 부친 김만집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1년 남한산성에서 옥사로 순교할 때 12세 전후의 어린 아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후로는 종형 김성희(암브로시오)를 따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한편 침술을 배워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의 침술은 인근에 잘 알려질 정도로 능통하였다고 한다. 김차희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에 일가친척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옥리들이 하는 말을 듣고 포교의 아들이 위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침술로 그 아들을 소생시켜 주었다. 그 일이 있은 뒤 김차희가 하루는 심한 곤장을 맞고 신음하고 있을 때, 그 포교가 다시 찾아와 배교하고 살아나가라고 권
유하였으나, 그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던 날 재판관이 모든 신자들을 끌어내 마지막으로 배교를 권유할 때, 김차희의 차례가 되자 그 포교는 그의 뒤에 서서 대신 "다시는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결과 김차희만은 형장으로 끌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이렇게 살아남은 김차희는 그 순간부터 가슴이 떨리고 매를 맞아 부어오른 상처가 더욱 쑤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에 그는 다시 재판관을 향해 "조금 전의 대답은 제가 한 것이 아니오. 저는 비록 매를 맞아 죽을지언정 천주교를 버릴 수가 없소"라고 말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 인척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이 거두어 안양 수리산(현 안양시 안양 3동)에 안장하였으나 실전되고, 훗날 그의 의묘(擬墓)가 구산에 조성되었다.
◆ 김윤희(1834∼1868)
김윤희는 김성우 성인의 사촌 김주집(스테파노)의 장남으로, 세례명은 알 수 없다. 김주집은 기해박해 때 김문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이후 약 18년 동안 옥중에서 고통을 겪다가 1858년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따라서 김윤희도 일찍부터 부친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윤희는 성장하면서 인척들과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고, 신부로부터 성사도 받았다. 그러다가 1868년에 5촌 당숙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6촌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김윤희는 집안 사람들과 함께 유수 앞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조금도 마음이 약해진 적이 없었으며,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에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 35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이후 순교자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으나, 훗날 구산 신자들이 그의 용덕을 기려 구산에 그의 의묘를 조성하였다.
다섯 번째 간 곳
● 마 재
마재는 정약현(丁若鉉), 정약전(丁若銓, 자 天全, 1758~1816),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정약횡(丁若鐄) 등 5형제와 그들의 누이 3명의 고향으로 한국 천주교회 요람지의 하나다. 마재가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되기 시작한 시기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 성립 이전부터다. 생가터 약 500m 전에 마재 성지를 새로 조성하였다.
이곳에 있던 나주 정씨 집안의 후손들은 18세기 후반부터 집안에 보관되어 있던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읽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정약전은 1779년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의 주도로 열린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하여, 이벽(李檗, 1754~1785,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세례는 받지 않고 미루다가 끝내 세례를 받지 못했다.
정씨 형제 중에 특히 초기 교회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이는 정약종 일가다. 정약종은 교리 지식에 해박하였으며, 주문모 신부에 의해 명도회(明道會) 회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정약종은 그의 중형 약전이나 동생 약용보다 늦게 천주교를 수용하여 1786년경 세례를 받았으나 그의 형제들과는 달리 끝내 배교하지 않고 한결같은 믿음으로 교회 활동에 헌신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형으로 순교하신 분이다.
1785년 봄, 명례방 집회가 형조에 발각되어 유림에 척사통문(斥邪通文, 천주교를 배척하는 회람 형식의 글)이 돌자, 사대부가의 천주교 배척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정씨 가문에서도 명례방 집회에 참석했던 정약전과 정약용 등이 부친으로부터 엄한 추궁을 받았다. 그러다가 1791년 신해박해를 계기로 조정에서 정식으로 천주교 금지령이 내려지자 정씨 집안의 신자들은 문중으로부터 이전보다 더욱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1786년 세례 입교한 정약종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그의 식솔을 이끌고 현재의 한강 팔당댐을 건너 광주 분원으로 이주하였다. 정약종의 가정은 1800년 양근 지방의 박해로 분원에서 서울로 피난하였으며, 이때 정약종의 처인 유 체칠리아와 자녀인 정하상, 정정혜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종과 그의 전처 아들인 정철상이 순교하였으며, 1814년에 상경한 정하상은 1816년부터 조선 교회의 재건과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마재에 있던 그의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여동생 정정혜는 정하상이 서울로 간 후 충청도에서 6~7년간 거주하다가 박해를 피해 서울로 와서 치명할 때까지 10여 년간 살았다고 한다.
■ 순교자
◆ 성 정하상 바오로(1795∼1839)
정하상은 정약종의 둘째 아들로,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하였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에게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하였으나 성품을 받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자 숙부인 정약용의 집에 기거하다가 1813년 홀로 상경하여 교리를 배우고 교회 일을 도우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여 조신철, 유진길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 베드로(모방) 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9년 7월 모친 유조이 체칠리아, 동생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체포된 정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이며, 그 뒤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9월 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 성녀 유조이 체칠리아(1761∼1839)
유 체칠리아는 명도회장 정약종의 부인이며 성 정하상 바오로의 어머니이다. 상처한 정약종과 20세에 혼인하여, 남편의 권면으로 혼인 3년 만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남편과 전실 아들 정철상이 순교한 뒤 재산을 몰수당하고 마재에 살던 시동생 정약용의 집에서 지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조카의 피신 권유를 거절하고 7월 11일,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와 함께 체포되었다. 유 체칠리아는 72세의 고령임에도 포청에서 곤장 230대를 맞는 혹형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 냈다. 노인을 사형시키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어 있어서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3일 고문과 형벌의 여독으로 옥사, 순교하였다. 103위 성인 가운데 최고령 순교자이다.
◆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1797∼1839)
동정 순교자인 정정혜는 정약종의 딸로, 네 살 때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전 가족이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 오빠 정철상은 순교하였으나 정정혜는 어머니 유 체칠리아, 오빠 정하상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 뒤 마재의 삼촌 정약용의 집에서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 친척들의 구박과 냉대를 아름다운 덕행과 인내로 극복하고, 박대하던 몇몇 친척들까지 입교시켰다. 1839년 7월 11일 기해박해 때 정정혜는 서울에서 어머니, 오빠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7회의 신문을 받으면서 320대의 곤장을 맞았고, 형조에서도 6회의 신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에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 43세였다.
◆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760∼1801)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1760년 경기도 광주 마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유조이(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과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아들과 딸이다. 정약종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가 성립된 지 2년 후인 1786년에 형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양근 분원(현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부터 조금씩 교회를 멀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교리를 실천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는 신부와 교우들을 도와 교회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한편 주 신부는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한 뒤 그를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음력 2월 11일에 체포되어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엄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으나 이미 순교할 원의를 갖고 있던 그에게는 어떠한 유혹과 형벌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체포된 지 15일 만에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 복자 정철상 가롤로 ( ? ∼1801년)
정철상 가롤로는 경기도 광주 마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1839년에 순교한 유조이(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과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이복 동생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포천의 유명한 신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가 20세가량 되었을 무렵인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하였다. 이때 부친과 숙부들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자, 그는 그들을 따라가 의금부 인근에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하였다. 4월 8일 부친이 순교하던 날, 그는 체포되어 형조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다. 있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대면서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관리들은 문초로 그의 생각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그는 한 달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가 최필제(베드로), 윤운혜(루치아) 등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이었다.
여섯 번째 간 곳
●천 진 암
천진암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초기 선조들이 선교사 없이 학문적 지식의 수준에 있던 천학(天學)을 자발적인 진리 탐구를 위한 다년간의 강학회를 통하여 종교적인 신앙의 차원인 천주교로 승화, 발전시키고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시작한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다. 1779년 당시 이벽(李檗, 1754~1785, 세례자 요한) 26세, 정약전(丁若銓, 자 天全, 1758~1816) 21세, 이총억(李寵億, 1764~1822) 15세,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 44세 등 주로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이상한 천주교 책을 읽고 실천하는 일을 하였다.
천진암 강학은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 형성의 배경이자 기원이 된 강학을 말한다. 권철신이 이끄는 성호학파 신진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학문 연구 모임으로, 주어사와 그 너머에 있는 천진암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특히 이벽과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은 일찍이 천진암을 자주 찾아 함께 학문을 연구하곤 하였으며, 이 천진암은
주어사와 함께 녹암계의 강학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두 절이 모두 권철신의 집이 있던 양근의 한강개나 이벽이 살았던 광주, 정약용이 살았던 광주 마재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은 1970년대에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1979년에는 경기도 포천에서 이벽의 유해가 이장되었다. 이어 1981년에는 화성군 반월면 사사리에서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의 유해가, 인천 만수동에서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의 유해가, 대감마을 뒤편의 효자봉 자락에서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유해가 각각 천진암으로 이장되었으며, 1981년 12월에는 경기도 광주 윗배알미리에서 정하상(丁夏祥, 1795~1839, 바오로) 성인의 유해가 수습되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로써 이 성지에는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의 성업을 이룬 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및 평신도만의 자율적 신앙 공동체가 보편 교회로의 접착 과정에서 주문모 신부를 도와 큰 역할을 한 정약종 등 한국 천주교회 초기 교회 지도자 등 5위 묘가 모셔져 있고,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에는 정하상, 유진길(劉進吉, 용심, 1791~1839, 아우구스티노) 및 한국 천주교회 초기 선조들의 직계 가족인 정약전, 정지해, 이석 등 선인들의 묘가 안장되어 있다.이 성지에 한국의 민족 종교들과 유교, 불교, 천주교 등의 건축미 일부씩을 참고하면서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을 세우고 있다.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머릿돌에 친히 작성하셔서 친필 서명하여 주신 교황 강복문에서 좀 더 명확하게 우리 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한반도 평화통일 사목 시책을 밝혀주셨다. 즉,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 건립되는 새 성전 머릿돌에 교황 강복을 베푸노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겨레가 영원히 화목하기를 비노라.”
◆ 순례지 안내
○ 한국 천주교회 초기 선조 5위 묘 이벽을 중심으로 젊은 학자들에 의해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된 곳인 천진암은, 여러 역사 자료에 의하면, 천주교 강학회가 열릴 당시, 폐허가 된 버려진 암자로 소개되고 있고, 후에 다산이 쓴 시에도 천진암을 가리켜 寺破無舊觀(절은 파괴되어 옛모습을 볼 수 없구나)라고 읊은 구절이 있다. 또 강학회 이후에도 절로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은 홍경모의 남한지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원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약 150여 년 전에 절이 완전히 없어져 그 이후로 화전 논밭으로 변하였다. 이렇게 논밭이 되어버린 천진암 터를 1978년에 처음으로 변기영 신부가 매입하면서 본격적인 천진암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었다. 1979년에 경기도 포천군에서 광암 이벽 성조의 묘를 기적적으로 찾아 이장하였고 이후 1981년에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성현 등의 묘를 이장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한국천주교회 초기 선조 5위 묘역이 조성되게 되었다.
○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터 성역로를 따라 300m 정도를 올라가면 약 5만여 평의 광장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100년 계획으로 대성당을 짓고 있는 현장이다. 천진암 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의 자발적인 교회 창립정신과 거룩한 순교정신을 오늘에 기리고, 또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건립되는 민족 대성당인 동시에, 한민족이 대를 이어가며 건축함으로써 길이길이 민족화합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100년 계획으로 건립되고 있는 성당이다. 동서남북의 길이가 각각195m, 지붕높이가 85m인 천진암 대성당은. 유교의 서원과 불교의 대웅전 지붕과 처마 및 천주교회 성당의 내부 구조를 종합하여 설계되었는데, 이는 천진암이, 유교 학자들이 불교암자에서 천주교를 시작한, 儒ㆍ佛ㆍ天이 합류한 성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성당 터에는 교황 요한 바울로 2세의 천진암 대성당 강복문이 새겨진 머릿돌(27톤, 4m X 1.5m X 1m)과, 대성당 중앙 제단에 놓일 제대석 (길이 10.5m, 넓이 2.3m, 높이1.5m, 무게 87톤)이 있다.
○ 성모 경당
1988년에 터를 닦기 시작하여 1999년에 축성식을 가진 성모 경당(240평, 폭20m, 길이 40m, 천장높이15m)은 약 1000여명의 신도가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경당으로서, 20여 년간의 천진암 성역화 사업과 수많은 공사 중에, 무엇보다도 인사 사고가 없도록 특별히 보호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모님께 봉헌한 경당이다. 이 경당은 대성당이 지어지는 동안 다목적 용도를 겸하여 어머니 성당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박물관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역화를 계기로, 신앙 선조들의 여러 묘소 발견, 발굴, 이장, 각종 유물과 친필, 관계 고문서 수집 및 103위 시성 추진 자료, 200주년 기념 관계자료 등 한국 천주교회의 소중한 유물과 자료들을 수집하여, 보다 안전하게 보전하고, 체계있게 정리, 전시, 활용케 하기 위하여, 1980년대 초부터 추진되어 온 천진암 천주교 박물관은 1992. 2. 15 김남수 주교님에 의해 정식으로 승인을 받았다. 박물관 건물은 1988년 터닦기 공사를 시작하여 지난 1997년에 기초공사를 완료하였고, 현재, 박물관 옆에 위치한 임시 전시관에 창립선조들의 묘 이장과 관련된 유물 일부가 전시되어 있어, 순례자들이 미리 신청을 하면 관람할 수 있다.
○ 조선교구 설립자 묘 : 성 정하상, 유진길의 묘 이 땅에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수차례 북경을 다녀오고 조선교구의 설립을 위해 헌신하신 성 정하상과 성 유진길의 묘가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묘역 앞에는 정하상 성인 기념비를 세울 계획이며, 또한 경기도에서 건립한 청소년 야영장이 바로 앞에 있다.
■ 순교자
◆ 한국 천주교회 초기 선조 5위
- 광암 이벽 성조/직암 권일신 성현/녹암 권철신 성현/만천 이승훈 성현/선암 정약종 성현 -200여 년 전 우리 신앙의 선조들께서 선교사 없이 이루신 한국천주교회 공동체 성립 위업에 관해서는 역대 로마 교황님들을 비롯하여 모든 이가 경탄하며 존경하고 있으며, 이분들의 죽음 또한 장렬한 순교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조선 천주교회 공동체 성립에 기여한 이벽 성조 또한 격리 감금 중에 단식 아사(餓死)시켰으나, 문중 유림들의 말에 의하면, 독살(毒殺)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역병(疫病)으로 병사한양 소문을 내었다(1785년). 권일신 성현은 장타(杖打) 형벌을 당한 후, 귀양길의 첫 주막 밤에 장독사(杖毒死)한 것으로 처리되었으나, 밀행(密行)한 자객을 시켜 타살(打殺)하였다는 설의 신빙성을 부정할 수 없으며(1792년), 권철신 대학자는 형조에서 사형언도가 내려지기도 전에 65세의 노학자(老學者)로서 박해자들의 끓고 타는 증오심으로 먼저 타살(打殺)되고(1801년)나서 후에 판결문을 지어내리는 어처구니없는 참극도 자행되었다. 이승훈 성현은 박해자들이 이승훈 성현의 천주교 포기를 억지로 허위로라도 조작하여 발표하여, 자기들이 이겼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만 하였기에, 신앙을 포기했다고 보고하고 선전하면서도, 고집을 부리며 천주교를 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약종 성현과 함께 즉시 잔인하게 형벌한 후, 참수(斬首) 하였다(1801년).한국 천주교회 초기 선조 5위 1. 이벽 (李檗, 세자 요한) 1754 :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에서 탄생 1783 : 이승훈을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 1784 : 이승훈에게서 영세 1785 : 명례방 집회로 을사박해 중, 가내 연금 상태에서 아사벌(餓死罰)로 단식순교(斷食殉敎) 2. 이승훈 (李承薰, 베드로) 1756 : 서울 중림동 만초천 언덕에서 탄생 1783 :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 1784 : 영세 받고 귀국 1785 : 명례방 집회 참석 1787 : 북경 주교에게 보고서 저술, 발송 1801 : 서울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 순교3. 권일신 (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42 : 경기도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에서 탄생 1779 : 천진암 강학회 참석 1784 : 이벽에게서 영세 1785 : 명례방 집회에 참석 1791 : 신해박해 때 서울 감옥에서 혹심한 장타(杖打)로 귀양 도중 순교 4. 권철신 (權哲身, 암브로시오) 1736 : 경기도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에서 탄생 1779 : 천진암 강학회 참석, “유한당 언행실록” 서문 저술 1784 : 이벽에게서 영세 1801 : 신유박해 때, 서울 감옥에서 옥중고문으로 순교 5. 정약종 (丁若鐘, 아우구스티노) 1760 :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능내리 마재에서 탄생 1795 : 명도회 회장으로 활약 1801 : 서울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 순교
2번째
순례의 향기의 소감의 글은 내 개인 생각은 접어두고
순례지의 특징, 중요성, 순교자의 생애의 글을 중점으로 글을 써 보았다.
여기에 쓴 글과 사진들은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및 ‘굿 뉴스 ’에서 따온 글임을 밝히면서 많은 ‘청주교구 사도성 야고보 순례단 ’ 회원님들의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앞으로도 계속 이런 형식의 글을 쓰려고 노력을 할 것 입니다.
2016. 6, 19. 성지순례를 마치며
김홍숙 혜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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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의정부 4곳과 수원교구 2곳 순례를 하면서 마음의 충만함을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