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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경 산문> 아버지 3장 퇴직
아버지 참사 진급 (추정)
1965년 아버지께서 퇴직을 하셨다. 1925년 조선식산은행에 입사 한국산업은행에서 40년 만에 퇴직을 하셨다. 퇴직 몇 해 전에 참사로 진급을 하셨다. 지금 같으면 집안에서도 축하잔치를 해 드렸을 것이다. 축하 모임조차 없이 그냥 지나고 말았다니 서운하시지는 않으셨을까.
은행에서는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황산리에 직원연수원을 신축하였다. 연수원은 실내 체육관과 숙소 식당 관리실 등 일반적인 시설을 일단 갖춘 건물이다. 전화기는 수동식으로 전화기에 달린 손잡이를 돌리면 교환이 나온다. 송수화기는 지금처럼 하나로 붙어있다. 그리고 관리자 가족용 숙소가 따로 한 채 있다. 전기시설이 불충분하여 발전기를 사용하였다. 여러 가지 기계를 잘 다루실 수 있다고 하여서 관리 책임자로 아버지께서 일을 하시게 된 것이다.
아버지께서 퇴직 후 바로 촉탁이라는 신분으로 연수원 관장이 되셨다. 국도에서 10분 이상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길은 만들어졌지만 비포장도로로 다니는데 불편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군대에 가기 전 아버지가 계시니 어머니 따라 나도 연수원에 가 있었다. 하루 종일 할 일이라곤 빌려온 책을 하루에 한권씩 읽었다. 밤이 되면 석유 등잔을 켜고 보았다.
아버지 퇴직이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첫째 가계수입이 딱 중단되기 때문이다. 퇴직금이 아무리 많아도 곶감꼭지 빼먹듯이 먹다가는 쪽박을 찰 일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시계가 아버지 퇴직 시간에 맞춰서 돌아갔다. 그래서 내가 대학을 재수하지 않고 그냥 들어가야만 졸업 때까지 등록금을 받고 졸업을 할 수 있었고 관사를 나와 집은 구입을 했지만 그 밖의 모든 가정경제가 맞물려 있어 계획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년을 관장으로 계시다가 그만 두시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이제는 정말 퇴직이시다.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으셨다. 무엇이든 하실 수도 있지만 할 일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때 텔레비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큰집에는 있는데 우리 집은 없다. 무슨 권투시합이라도 있는 날에는 아버지께서 큰집으로 가셔서 보고 오신단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형제가 힘을 모아 결국 한 대 사드렸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12월에 우리집도 피난을 가는데 두 편으로 나누어 갔다. 한편에는 큰누나 작은누나 작은형 그리고 막내 여동생이다. 둘째인 19살 큰누나가 인솔자이다. 큰누나는 사회성이 좋았다. 소학교 다닐 때에도 일본말을 잘해서 학교에서도 무엇이든지 잘 받아왔다고 했다. 부산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가는 도중 군인을 만나 많은 편의를 받았다. 그 군인이 나중에 매형이 된 헌병 육군 상사이다. 군인 중에 제일 끗발 좋은 병과가 헌병이라고 하지 않나.
전쟁이 끝난 후 결혼하고 지금의 워커힐 자리인 광장동 시댁으로 들어갔다. 정말 산비탈 집이었다. 누나네라고 내가 한 번 갔다 왔다. 그때 누나가 끓여준 호박볶음이 엄청 맛이 있었다. 시댁은 생각만큼 넉넉하지 않았다. 얼마를 사시더니 결국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돌도 되기 전에 우리집으로 들어와 어머니가 키우셨다. 손녀가 아니라 막내딸이 하나 또 생기신 것이었다. 나에게는 11살 아래 동생(?)이라고 해야 할까.
매형은 딸을 보기 위해 우리집으로 자주 찾아오고는 했지만 조카는 한사코 아버지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유는 혹시나 지금 있는 할아버지집에서 데리고 나가 아버지와 새로 살게 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이모 외삼촌이 여럿인 집에서 손녀가 살아가기에는 힘든 점이 많았을 것이다. 청계국민학교 동명여중고를 거쳐 한양대까지 들어가 다니다가 미국으로 간 것이다. 우리는 살갑게 대하지만 조카의 입장에서는 서운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나도 여러 가지를 도와주려 했지만 교복 치맛단이 뜯어지면 꿰매주는 정도이었다.
그 손녀가 우리집에 계속 있다가 미국으로 시집을 간 것이다. 한국에서 알던 배재고 출신 남자 친구가 이민을 갔다가 손녀를 찾으러 나와 결국 결혼을 하고 데리고 들어간 것이다. 우리집 첫 손녀의 의미는 자식하고는 또 다른 의미였음을 우리도 이제는 알 것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 생전에 미국으로 시집간 손녀가 금의환향하여 서울로 나왔다가 20여일 머물다가 미국으로 들어갔다. 20여년이 지난 후에는 다시 이혼을 하였다니 ‘인생만사 마음대로는 안 되는 것이구나.’ 했다. 또 시간이 지나니 어머니의 증손녀가 미국인과 결혼을 하고 직업으로는 무슨 중소기업의 임원으로 승진을 하였다니 세상 요지경인지 멋진 세상인지 모르겠다. 잘 되면 좋은 것이겠지.
아버지에게 희망은 작은 누나이었다. 사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민학교 선생님이 되신 것이다. 아버지 어깨에 힘이 들어가도록 많이 기뻐하셨다. 안정된 직장에 그만한 직업도 없었기 때문이다. 몇 년이 지나고 누나도 결혼을 앞두게 되었다. 누나를 좋아한 사람은 은행 인쇄실 직원이었다. 누나를 보고 오래 전부터 우리집을 드나들면서 특히 큰형과 가깝게 지내면서 뜸을 들였지만 누나는 별로이었다. 명동 입구 미도파백화점 건너편 무선회사 가게에 근무하는 직원을 택한 것이다. 아버지도 은근히 은행 직원을 원했지만 작은 누나가 거부하는 데에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작은 누나의 입장에서는 집이 작아 혼자 쓸 방은 고사하고 올케와 같이 한 방을 써야하는 입장이라 가능하면 빨리 결혼을 하고 집을 나가고 싶은 것이었다. 큰형이 군에 재직 중이라 그런 일이 가능했다. 그래서 서둘러 결혼을 하고 나간 것이다. 잘 키워놓은 딸이 후다닥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하니 아버지께서는 퍽 서운하고 비관적인 마음도 가지게 된 것이다. 누나도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신혼 때 처음이야 잘 나갔지만 매형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누나가 고생을 많이 했다. 하는 수 없이 누나가 다시 복직을 하고 매형이 집에서 집안일을 하게 되었다. 매형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우리집에서는 꽤 높았다.
작은 형이 우리집에서는 또 한번의 희망이었다.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입학한 것이다. 형이 군대를 입대했다. 대학생으로 입대를 하면 복무기간이 18개월(?)이란 훨씬 짧은 시절이 있었다. 제대를 하고 복학 후 잘 졸업을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성동고등학교를 졸업한 형은 왕십리에 친구가 많아 집에 들어오기보다는 친구 집에서 먹고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친구 동네에 예쁜 중학생이 있었고 나중에 미용사가 되었다. 그 미용사를 좋아해서 친구 집에서 살다시피 한 것이다. 물론 대학을 이수만 한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은행에 들여보내려고 하였지만 대학 이수자격 가지고는 취직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서도 몹시 걱정을 하셨다.
아무런 직업도 없이 작은형도 결혼을 하고 집으로 들어와 살았다. 큰형이 제대 후 1년쯤 있다가 살림을 나간 다음이었다. 큰형은 배관공을 하고 있었다. 건설현장에서 상하수도 배관 및 화장실 설치 일을 하는데 겨울에는 일감이 없어 2~3개월씩 수입이 없는 직종이었다. 작은형도 큰형에게 일을 배워 따로 독립까지 하였다. 작은형이 직접 공사를 맡아 일을 하는 하청 일을 하였다. 노동자로 하는 수입보다는 훨씬 많았다. 하는 일이 잘 풀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발 빠르게 사업을 확장하였다. 하지만 20년간 그것도 사업이라고 접대와 공사 등으로 힘들어 하시더니 결국 병을 얻어 오십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벌써 세 형제가 불효를 한 것이다. 작은 형님이 잘 나가시니 전체 가정경제 주도권을 가지고 이런 저널 일을 주도 하였지만 아버지에게는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이었다.
마지막 건곤일척이라고 바로 위의 형이 경복을 들어가고 잇따라 내가 들어가고 형이 공과대학에 진학하고 내가 독문과에 진학하여 그런대로 아버지에게 마지막 희망을 드렸는데 셋째형이 67년도에 DMZ 민정경찰로 근무 중 북한군과 교전하다기 전사하고 말았다. 마침 내가 휴가 중이라 함께 형 부대까지 동행 장례식까지 치르고 돌아왔다. 군부대 안에서 진행하는 장례식에서 조총을 쏘는 행사 때에는 온가족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시신확인 시간이 있었다. 얼굴은 두꺼운 압박붕대로 가려있었지만 우리는 굳이 얼굴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왼손 중지만 확인하였다. 부산 피난 와서 항구에 놀러갔다가 배에서 나온 줄을 바짝 끌어당겨 고정시키는 톱니바퀴에 끼어 손가락 한 마디가 없어진 흔적을 확인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그리고 내가 69년도에 계성제지공업주식회사(37회 송민호를 만나다)에 취직하고 71년도에 여자상업고등학교에 교사로 들어가서는 다시 안정되어가게 되었다. 학생들이 우리집으로까지 오는 것을 보시고는 부모님이 만족해하시었다. 특히 어머니께서 우리 아들이 선생이라고 은근히 자랑하고 다니셨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더니 첫아이가 예정일보다 15일 이상 일찍 출산 저체중으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기도 하고 간신히 퇴원한 후 근근이 버티는 중에 또 임신이라기에 그냥 빨리 나아서 기르자고 하였던 것이다. 몇 달이 지난 12월에 정기검진을 받고 와서는 그냥 내 앞에서 주저 않아 아내가 울고 마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쌍태아 임신이란다. 임신 중절수술은 너무 늦어서 안 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출산하였지만 이번에는 초저체중아로 둘 다 1.72kg, 1.82 kg의 미숙아로 인큐베이터에 45일씩 들어가 집중치료를 받았다. 체중이 2,5kg 이상이 되어 일단 집으로 퇴원하였지만 산모의 젖은 한 달반 사이에 완전히 말라붙었다. 입원비에 결혼반지까지 팔았고 늘어나는 분유 값을 감당할 수 없었다. 더욱이 아이 셋을 산모가 혼자서 키울 수가 없었고 어머니 아버지까지 우리가 모셨기에 더욱 어려워 처제를 불러다가 도움을 받았지만 모두가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없는 살림에 쌍둥이 기저귀만 따로 동네 아주머니에게 세탁을 시킬 정도였다. 비가 오는 날에는 숯불에 기저귀를 말려서 사용하였다. 밤마다 쌍둥이를 번갈아가며 먹이고 기저귀 갈기를 아내와 번갈아 밤을 새며 일을 하였다. 부부가 그렇게 몇 달을 죽을힘을 다해가며 계속 허덕이며 살아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활은 또 조금씩 안정되어 갔지만 퇴직하신 아버지께 용돈 한번 제대로 드린 적이 없는 아들이 된 것이다. 또 강북구 수유리에 살 때이다. 어느 토요일 날 퇴근길 구멍가게에서 아이들에게 줄 과자를 사가지고 집으로 들어서 보니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눠줄 수가 없었다. 내 머리에는 내 아이 생각만 있고 부모님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되돌아 내려와 다시 어머니 아버지에게 드릴 간식을 사가지고 다시 들어간 일도 있었다.
내가 출근을 하면 집에서 아버지가 무엇을 하시는지는 모른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 가끔씩 나보다 늦게 귀가하시면서 아이들 간식을 사가지고 들어오시기는 했다. 약주를 드신다고 집에서 술상을 차린 적은 거의 없었다. 다만 가끔씩 현직에 있을 실 때에는 은행 직원들을 단체로 모셔 회식을 하실 때는 있었다. 그럴 때면 막내를 으레 등장시켜 암산을 시키기도 하셨다. 그러면 학교도 들어가기 전인데도 곧잘 답을 맞혀 아버지와 동료직원들을 기쁘게 해 드리고는 했다.
나도 2005년 2월까지 34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명예퇴직을 하였다. 마지막 해에는 독일어를 택하는 학생 수가 줄어들어서 순회교사로 두 학교를 근무하는 것이다.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는 혜화여고에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태릉고등학교에 근무를 하였다. 다행이도 태릉고등학교는 우리 아파트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곳이었다. 공립학교는 5년마다 순환 근무를 하지만 어느 학교에 가도 몇 명씩은 같이 근무하던 교사가 있어 낯설음은 적었다. 두 학교를 근무하면 어느 학교에서도 보직이 없어 소위 잡무라는 일이 없어 한없이 편하기는 했다.
아버지께서는 58살에 퇴직하셨고 2년 연장 60살에 완전 퇴직하셨지만 2005년 2월 나는 63살에 1년 일찍 나오는 명예퇴직을 하였다.
퇴직 후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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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시대의 서글픈 초상을. 보는듯하여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수많은 가족이 등장하는 가족사(家族史)를 읽었습니다. 부모님 모시면서 어려운 살림에 쌍둥이 키우느라 정말 힘드셨겠습니다. 저의 경우 부모님이 손주 둘을 키워주셨고 마누라도 살림하느라 제가 고생을 많이 시켰으며 지금도 간혹 원망을 듣고 있습니다. 그럼 나는 뭐했냐구요? 애들 기저귀 한번 갈아준적 없고 주말이면 등산 간다고 집을 나섰으니 원망 들어 싸지요.
나는 통이 크지 않고 대외적으로 활동도 거의 없이 조용히 지냈습니다. 아내에게 잘 해주어도 평가는 상대적입니다. 아니면 개인적인 편차가 심하기도 하고요. 요번에 <아버지>를 쓰면서 아버지 이외의 것을 많이 쓰면 너무 개인적으로 흐르는 적 같았지요. 그래서 아버지와 직접 관련되는 형제 이야기를 조금 썼습니다. 쓰면서도 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광희 형, 김형두 형,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