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삶의 공존, 세상에 대한 우주적 통찰-김영산의 시세계 『하얀 별 』(2013)
박정희(朴貞熙)
삶과 죽음의 관계는 바라보는 위치에 따른 것, 동전의 앞면과 뒷면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삶이고 삶이 죽음이라는 종교적 명제를 따른다면, 현실적인 우리의 유한한 삶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김영산은 삶과 죽음에 대해 구도행을 빗대어 시쓰기를 전개했다. 열 단계의 구도행은 결국 죽음과 삶의 통찰이다. 현실의 삶과 죽음을 우주차원의 의식으로 승화시키며 내면의 세계를 찬찬히 풀어 헤쳤다.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고 병들고 늙고 결국 죽음에 이르기에 사후에 대한 관념은 결국 종교를 만들어냈다. 굳이 종교의 형식을 빌리지 않더라고 영성이나 영혼의 존재를 떠올리는 한 종교적 상념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물질적 존재라고 규정하며 영혼의 개념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유물론자들일지라도, 현실세계에서 펼쳐지는 온갖 희喜·노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欲의 감정과 번뇌가, 인간의 의식이라는 속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내세라든지 영혼을 의식하는 유신론자, 혹은 모든 현상계의 구체적인 활동은 인간의 의식에 의한 결과라는 유심론자들은 인간 본성의 탐구를 전제로 세상을 해석한다. 자아와 초자아에 대한 절절한 인식의 결과는 삶과 죽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인간행동의 준범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의 다른 형식이기도 하다.
장례는 가장 혼란스럽고 무거운 의식이다. 살아있는 자들에게 죽음의 과정을 인식시키는 절차가 장례이다. 김영산의 십우도는 이 과정을 의식하여 죽음과 삶을 교직시킨 심우도이기도 하다. 수행의 과정이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라는 십우도의 도상은 삶의 주체적 자각으로 이어진다. 소를 타고 어디로 갈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고 결정했다고 해도 마음대로 그 소를 이끌고 갈 수는 없다. 오직 스스로의 통찰에 의할 뿐이다.
시인은 지구의 장례가 펼쳐지고 있다며 상여꾼들에게 운구 준비가 되었는지를 묻는 다(「詩魔- 십우도 하나」). 그리고 그 장례가 치러진 뒤 남겨질 비문은 누가 읽을 것인지 묻고 있다. 그 쓸쓸한 비문을 읽는 자는 죽은 자이고 산자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므로 읽지도 않을 것이다(「詩魔- 십우도 둘」).
십우도를 쓴 시인은 자살했고 그의 무덤은 없다. 자살한 시인을 위해 화자는 새벽에 진혼곡을 들었다. 그 시인이 쓴 시는 선악이 따로 없다(「詩魔- 십우도 셋」). 지구의 장례식이 곧 거행될 것이다. 이 장례식은 벌써 몇 번이나 거듭된 것이지만 향긋한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우주는 지구를 위해 향을 피울 것이다. 죽은 자는 빗속으로 흘러가며 화자는 빗속의 도시 성곽을 걷고 있다. 성곽에서 죽음 너머를 바라보는 화자에게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별은 의미 없다. 그러나 시인은 관념의 과잉을 보여주었다. 현실에서 수억 광년이나 동떨어진 관념의 넘실댐이 진정한 수행인지, 그 치열한 수행은 어떤 삶과 죽음을 담보하는 것인지 독자는 아직 알지 못한다.
내 시가 태어난 생가는 없다고 그 시인은 말했다.
모든 폐가마저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원래 폐가는 없는데 사람들이 집을 버렸다 했다. 상여는 죽은 자를 태우고 가는 차가 아니라 집이라 했다. 죽은 자들이 잠시 머무는 집, 우리 사는 집도 상여라 했다. 산 자들은 상엿집에 머문다, 죽음의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잠시!
모든 여행은 죽음이다. 산 자들은 여행을 떠난다. 산 넘고 물 건너 죽은 자를 만나러 간다. 우리가 죽은 자인지 모르고 죽은 자를 만나러 간다. 제 집에 돌아와 꽃상여를 보고 반가워한다. 상엿집 환한 거실 환한 관이다! 어두운 방에서 누군가 흐느낀다. 그 음악은 자신이 평생 듣던 제 장송곡 이 방 저 방 건넌방으로 여행 다닌 것이다. 여행은 자폐의 집을 떠돈다, 늙어 죽어갈수록 자폐아가 되는 것이다.
―「詩魔–십우도 하나」 일부
고향의 생가는 이미 없어졌고, 우리 집은 죽은 자들이 잠시 머무는 집이니 상여였다고 시인은 말한다. 또한 산자들도 이 상엿집에 머물러 있었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즉 살아 있다는 것이 죽음의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잠시 머무는 기항지라는 말이기도 하다. 모든 여행은 죽음이며 이 여행을 떠나는 너와 나는 죽는다. 죽어가는 것이 삶의 본질이니 우리는 죽은 자를 만나러 떠나는 여행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제 집에 들어가는 꽃상여가 그래서 반갑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그런데 이 죽음과 죽음을 상징하는 꽃상여에 대해 화자는 자폐를 느끼고 있다. 상엿집 거실의 관을 보며 더 이상의 이야기 대신 장송곡을 듣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시인은 죽음이 두려운 것이리라. 정작 삶은 죽음의 여정이라면서도 환환 불빛 아래 놓인 관을 마주한 영혼은, 반가우면서도 결코 반갑지 않으니 마음의 벽을 세운 것이다. 죽음은 유감스럽게도 결코 극복되지 않았다.
미련 갖지 마오
산 자들에게도
죽은 자들에게도
바람은 비에 머물지 않아
어머니 형제 아무도
집에 없더라도 미련 갖지 마오
산자들은 산 자들의 바람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바람
바람이 머무는 곳 있더라도
바람 부는 길목
바람이 살고 죽더라도
바람에 미련 갖지 마오
―「詩魔–십우도 여섯」 일부
상복을 입은 그녀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죽음의 강을 건너고 있다. 그녀의 노래는 장송곡이며 누군가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무덤에는 “개나리꽃이 피어 있었다”(「詩魔–십우도 여섯」). 개나리꽃 떨어질 때 쯤 그녀가 건너는 죽음의 강에서 우리는 백수광부의 처를 만날지도 모른다. 시인은 집에 아무도 없더라도 미련 갖지 말라고 했지만, 생로병사에서 해탈하지 못한 인생들이 어찌 쉽게 인연의 끈을 놓아버릴 수 있겠는가. 시인은 상복 입은 여인의 입을 빌어, 산 자들은 산 자들의 바람이 있고 죽은 자들은 그들대로 그들의 바람이 있음을 노래한다. 그러나 결국 그 바람마저 삶과 죽음을 반복하니 죽은 이들의 바람이 산자들의 바람과 다른 것은 아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끼리
산 자는 산 자끼리
우주의 무덤에서 별은 태어나니
자신을 다 태우고 떠 있는 하얀 별
그녀의 영혼과 육신
산 자에게 잠시 맡겨둔 것
죽은 자는 죽은 자끼리
기억이 없으면 죽음도 없다.
고통 없는 나라! 무덤은 기억이 없다.
기억이 없는 무덤에서 싹이 자란다.
바라보는 연민이 아프다.
무덤 앞에 우는 우리는 누구인가
사랑의 잔혹사를 쓰려
비문이라도 다시 쓰려는가
모든 성은 제가 쌓고 제가 허물지만
방 아랫목에 시체를 누이고 몇 년을 윗목에서 자는
방 안의 묘지기도 있지만
그녀의 시체를 비닐로 꼭꼭 싸서
장롱 속에 숨겨두어
삼십 년째 미이라를 만들고
그녀를 무덤에 평생 가둔 묘지기도 있는가
―「詩魔–제7계」 일부
시인의 의식은 지구를 넘어 우주 차원으로 나아간다. 죽은 자든 산자든 우주 공간을 차지한다. 우주의 무덤에서 별이 태어났으니 지구 또한 우주에서 태어난 하얀 별이라고 외친다. 그런데 그는 산자에 대한 기억이 없을 뿐더러 죽은 자에 대한 기억도 없다. 기억이 없는 무연고의 무덤에서 움이 트고 그 움을 바라보는 작자는 연민으로 아프다.
무덤 앞에서 그는 자문한다. 무덤 앞에서 우는 우리는 누구인가? 왜 울고 있는가? 무덤 속에 시신은 없고 빈 관만 있을 지도 모른다. 지구라는 하얀 별에 살아있고 죽어있는 혼들은 미이라가 되었고 미이라가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비어있는 관이 매장된 무덤을 지키는 묘지기들이다. 묘지기들의 숨이 다하는 날, 묘비명에 무엇을 쓸 것인가. 바람 휑그렁하게 휘돌아 나가는 작은 묘비에 우리들은 정녕 쓸 말이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