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테의 돈으로 세상 읽기 43
상실의 길을 걸으며
가을이 깊다. 서리 옷을 입은 감은 닭 볏처럼 붉고 소쩍새가 키운 산국은 향이 짙어 겨울이 다가옴을 알린다. 그렇다고 모두 사멸의 시간으로 침잠하는 건 아니다. 흙무덤을 뚫고 나온 마늘 싹은 눈 속에도 키를 키울 테고 매무새가 어설픈 봄동은 얼음장을 녹여 청매화가 피는 날엔 나비의 춤사위를 볼 것이다.
소멸과 생성의 계절은 관조의 시간이고 사유의 시간이고 반추의 시간이다. 가을은 충만하지만 가난하고 고즈넉하나 스산하다. 가을은 느리게 여문 만큼 이별이 짧다. 그래서인지 가을은 어떤 이의 시처럼 미워하던 것들도 그리워진다. 가을은 쓸쓸한 구석이 있다.
쪽보다 파란 청춘들이 인생의 여름 문턱에서 세상을 떠났다. 산국 향이 왜 짙은지를 알기도 전에 갔으니 명복이란 말조차 어색하다. 유가족이 겪을 단장의 고통에 세상의 언어로는 위로의 예가 마땅치 않다. 어쩌면 침묵이 가장 진실한 위안이 될지 모른다.
나라는 젊은이들의 허망한 죽음을 두고 싸움질이다. 괴담 제작소가 윤전기를 돌린다. 누구는 뱀의 혓바닥을 놀려 어제와 다른 말을 한다. 공기주머니를 매단 세월호의 뱃머리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영혼과 양심의 갈취며 숨길 수 없는 악인의 야만성이다.
해가 짧아지면 철든 나무는 초록을 지운다. 그러나 살펴보면 흠 없이 곱게 물든 낙엽이 드물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여서 삶을 오점 없이 살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라도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타인의 죽음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삼는 일도 그중 하나다.
흔히 과유불급이란 말을 듣는다. 그리 보면 위선에도 정도가 있다. 여의도에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조차 사흘 만에 화장하는 사람들이 노랑 리본을 몇 년째 달고 산다. 그것이 얼마나 얄팍한 인간애의 과시인지를 모르는 모양이다. 다른 목적이 아니라면 천박함과 몰염치의 극치다. 의미가 변질된 축제를 즐기라고 부추긴 어떤 방송은 당국의 대응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제보해달라고 공지했다가 욕을 들었다. 도둑이 매를 들어도 유분수다.
이번 참사에 대하는 정부 부처도 욕 듣기는 마찬가지다. 장관이나 되는 사람이 공감 능력이 떨어져 매를 버는 꼴이 한심하다. 설사 청춘들의 일탈이 빚은 참사라 할지라도 가슴을 찢는 유가족의 심정을 헤아려 언행을 가려 해야 한다. 그것이 공직자의 처신이고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시민의 양식(樣式)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집단에 예속되어 살아왔다. 이러한 사회성은 매우 공고해서 맹수를 창으로 찌른 후에도 지금까지 우리의 DNA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신장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문제는 회귀본능 역시 생명체의 강력한 생리현상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독립된 개체로서의 자아를 애써 집단의 욕구에 의탁하려는 기현상도 그 때문이다. 일찍이 군중심리를 꿰뚫은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귀스타브 르 봉은 군중의 행위는 대뇌보다는 척수의 영향 아래 놓일 때가 훨씬 많으며 바로 이런 점에서 원시인에 가깝다고 꼬집었다. 그는 ‘개인은 자신의 반응을 지배할 능력이 있으나 군중은 그렇지 않다’ 말로 집단의 무모한 충동성을 정의했다.
이번 이태원 참사는 군중의 위험성이 그대로 노출됐다. 구급대와 경찰을 보고도 코스프레로 알았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심지어 CPR(심폐소생술)을 하는 중에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고도 한다. 이 정도라면 군중에게 이성의 광휘를 기대하기는커녕 광기의 격동을 막을 방법은 없다.
경험곡선(experience curve)이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은 누적생산량과 비용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다가 누적생산량이 증가할수록 단위당 비용이 감소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같은 맥락으로 어떤 일이든 반복하다 보면 효과가 배가된다. 이러한 상식을 헤르만 에빙하우스라는 심리학자가 학습곡선효과(learning curve effect)로 만들어 이론화시켰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학습곡선효과’에서 ‘곡선’을 빼버리고 ‘학습효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요즘은 학습효과가 대중적인 용어가 되면서 반복에 의한 효율의 증대보다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감내하기 힘든 대형참사를 여러 번 겪었다. 더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자연사를 놔두고 푸르디푸른 청춘을 압사와 같은 전근대적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다. 무용한 경험과 비싼 수업료는 여기서 끝내야 한다.
사고가 나면 재발을 막기보다 탓하기 바쁘다. 속죄양은 널려 있다. 하지만 시간의 과거는 지울 수 없는 것이라서 누군가를 벌하여 죽음을 생명으로 불러올 수는 없다. 군중이란 단어가 지워지지 않는 한 지금이라도 허술한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
시간은 슬픔을 삼킨 적이 없어 애도라는 단어를 기억하지 못한다. 봄이 오면 이태원 어느 담 아래 매정한 청매화는 다시 필 것이고 산 자는 밭을 갈아야 한다. 그것이 시간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명령이다. 다만 시계가 가끔 공평의 벽에 걸릴 때면 사는 게 즐거운 사람에게는 찰나에 바늘을 돌리고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는 사람에게는 망각의 아량을 베풀 뿐이다.
정신의학자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대하는 사람의 심리를 다섯 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닥친 죽음을 부정하려는 태도가 첫 번째 반응이다. 죽음에 분노하는 단계를 지나면 결국 죽음과 타협하게 되고 우울의 과정을 거쳐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죽음을 거부할 틈도 없이 간 청춘들로 빈 하늘이 더 스산하다. 투명한 햇살의 무심함이 은행잎을 덮는다. 이렇게 갈피가 없어서는 남은 외양간이 무너질 것 같아 절망의 두께가 포개진다. 유독 군중에 매몰되어가는 한국사회의 역사의 퇴보가 체념을 보탠다. 죽음의 슬픔까지도 내면화할 줄 아는 성숙한 시민의식은 언제쯤 볼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