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태안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국민보도연맹사건>
태안에서는 수백여 명이 예비검속 되어 7월 10일경 태안군 평천리 ‘사기실재’(또는 태안읍 백화산 한티재)에서 집단학살 되었다. 태안 지역에서 검속된 사람들은 경찰 후퇴 전에 일부는 대전으로 이송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서산군 태안면 평천리 2구 뒷산에서 희생되었다.
경찰은 학살 후 시신에 불을 질렀다. 목격자 곽정근은 “경찰이 후퇴한 직후 시신들을 태안면사무소의 창고에 전부 찾아서 늘어놓았고 광목으로 덮어 둔 것을 보았습니다. 시신들은 99구가 있었는데 총에 맞은 후 전부 불에 타서 그 형체가 참혹했습니다.
옷가지가 거의 불에 타고 남은 것은 겨드랑이 근처에 조금 남은 조각들 밖에 없었는데 유족들이 그것을 보고 시신을 식별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태안경찰서는 7월 12일 후퇴했다.
<부역혐의 피해>
국군 수복 후 태안경찰서에 의한 희생자들은 장산 공동묘지와 태안여고 인근 교통호, 한티재, 그리고 근흥면 수룡리 성굴과 두야리 마을회관 뒤 교통호 등에서 살해당했다. 장산 공동묘지에는 태안경찰서에서 고문으로 인해 희생당한 주민들이 매장된 외에도 집단총살이 있었다.
‘태안여고 인근 교통호’에서는 36명이 총살당했는데 명서진 외 1명이 현장에서 생존했다. 일부는 한티재에서 총살당했다. 평천2리 민청위원장을 했던 박계환의 시신이 한티재에서 수습되었다. ‘사기실재’에서도 집단살해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근흥면 두야리 김씨(김창열)는 태안경찰서 트럭 1대가 30여 명의 민간인을 싣고 수룡리 성굴로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태안면 상옥리 유가족들은 성굴과 두야리에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희생사건은 태안경찰서 뿐 아니라 각 지서에 의해서도 저질러졌다.
근흥면에는 근흥지서 외에도 안흥지서가 있었다. 근흥면 주민 함구범, 장순태 등 수십 명(37명)이 안흥지서에 갇혀 있다가 1950년 10월 8일 안흥항 바위(현재 수협창고)에서 해군에게 총살되었다.
이 사건의 관련부대는 태안반도를 순회하던 해군 309정으로 추정된다. 10월 25일에는 윤일미 등 주민들이 정죽리 안흥항에서 안흥지서 소속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근흥지서는 10월 23일경 처형으로 분류된 주민들을 경찰 1명과 치안대원 2~3명을 동원하여 근흥면 용신리 질목으로 이송한 후 질목 절벽과 회둑에서 총살했다. 태안경찰서 근흥지서장과 근흥면 치안대장은 두 곳의 집단살해 현장에 참관했다.
질목 절벽에서는 한 번에 50~60명, 회둑에서는 70~80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경찰관 2~3명이 한명씩 불러 뒤돌아서게 한 후 한사람씩 총을 쐈다고 한다. 용신리 질목에서 확인되는 학살사건은 대부분 10월 23일과 10월 31일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근흥면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치안대 간부였던 최갑성이 당시 목격상황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경찰관 들어왔으니까 좌익들 잡아다가 면사무소 창고에 가득 가득 잡아다 놓았지. 취조계원이 있었어. 취조계원이 작성한 내용을 내가 낭독을 해. 지서 직원이나 근흥면 유지들을 앞에 놓고서 내가 ‘이 사람은 어떻게 할 거냐? 이렇게(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모양을 하면서) 할 것이냐, 아니면 석방을 할 것이냐?’라고 하면 (지서 경찰과 유지들이) ‘이렇게 하자’라고 하면, 내가 ‘그렇게 하면 안 돼.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근흥면 면장하고 이장들도 그 쓸 만한 이장들도 모여 갖고. 이름이 없고 협의체여. 지서장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면장, 지서장, 각 리 이장, 그리고 나 다 합의를 봐야지. 그놈은 옆에 무릎 꿇어 앉혀 놓고 내가 낭독하는 것 낭독하고 묻지. ‘너 여기 취조계원들이 취조한 대로 사실이 맞느냐 안 맞느냐?’ 그러면 거개가 안 맞는다고 하지. 살려고.“
10월 초 소원면치안대는 인민군점령기에 부역을 했다고 추정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소원지서에 제공했고 지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는 부역혐의자들을 각 리에서 체포해 면 창고에 구금했다.
서산경찰서 『경찰 연혁』(1986)에 따르면, 소원면에서 부역혐의 등으로 피살된 주민은 192명이다. 소원면 부역혐의자 중 ‘처형’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면 창고에 구금된 후 소원지서 앞 신덕리 해안과 시목리 장재 금광굴 그리고 만리포 사구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소원면에서는 신덕리 해안에서 주민들이 가장 많이 학살당했다. 법산리 주민 장석구 등 30여 명의 주민은 11월 21일 시목리 장재 금광굴로 이송되어 집단희생당했다. 소원면 모항리 주민들은 모항국민학교에 구금되어 있다가 일부는 풀려나고 일부는 만리포 사구 구덩이에서 살해되었다. 당시 만리포 사구에서 살해된 민간인이 28명이라는 증언이 있다.
당시 주민의 목격담은 다음과 같다. “부역자들을 인솔해서 여기(신덕리 해안)까지 책임을 졌지. 여기서 죽일 때까지 책임을 지니까 총살현장을 구경했죠. 전부 다 이렇게 줄로 엮어 놓았는데 줄을 똑똑 서넛씩 잘라 놓고서 뒤에서 쏴서 죽였어. 그래 놓고서 저 물 같은 데 밀어뜨리고. 해안에서는 한 20여 명 되었지. 딱 두 번 구경하고 무서워서…. 그 때 이○○ 면장이라고 우리 마을 같이 살았거든요. 그 분도 유지니께 같이 참관했는데. ‘아무개 아무개’ 부르더라고. 총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나보고 ‘난 이것 못 볼 테니 그만 가자고’ 그러더라고. 여자들도 몇 명 있었어요.“
이북지서는 주민들은 10월 23일경 이북면 관리 옹동벛과 사지고개로 끌려갔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갔다가 옹동벛 현장을 목격한 주민들은 그곳에서 30여 구의 시신을 목격했다. 사지고개에서도 11월 6일 총살당한 주민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중 30여 구의 시신을 목격했다. 이북면 사건에 대한 목격담은 다음과 같다.
“지서에서 부역자를 3등급으로 분류했어요. A는 처형되고, B는 보류했다가 나중에 불러서 처형할 사람은 처형하고, C는 그냥 놔주고요. 취조는 치안대 감찰부장 이재열이 다 했죠. 이재열씨가 ‘이 사람의 죄가 무엇이다’라는 것을 낭독했죠. 여기는 이장들은 관여 않고, 리 추진위원회가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관여했지요. 우리 부락은 내가 했어요. 치안대장이 총책임자예요. 치안대장하고 참석자들하고 내가 결정했으니까. ‘이 사람은 죽여야 한다.’라고 치안대장이 말하면 지서장이 처형 결정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안 하는 사람은 안 하고 그랬어요.“
원북면에서는 감금되었던 주민 대부분은 솜틀다리와 인근 저수답, 닻개, 구정벌에서 경찰에게 살해되었으며, 일부는 태안경찰서로 이송된 후 태안여고 인근 교통호에서 살해됐다. 솜틀다리에서는 10월 14일 안동권 등 7명이 희생당했으며, 10월 19일에는 조한표 등 10여명이 희생당했다. 11월 6일에는 대기리 이기황 등 10여 명이 구정벌에서 살해되었으며, 12월 1일경에는 반계리 김세범 등 20여 명이 닻개에서 총살되었다.
남면의 주민들은 남면지서 유치장과 소방창고에 감금당했는데, 이중 30여 명의 주민들이 지금의 남면농협 뒤 공동묘지, 몽산리 몽산포 교통호, 거아도 인근 섬들에서 희생되었다. 1951년 1월 17일과 19일에는 손진태 등의 피난민이 남면에서 희생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동아일보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살해 주모자를 남면지서 소속 경찰 채순석이라고 보도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피난양민 18명 학살, 순경청년단장의경원 공모’(동아일보, 1951. 10. 17)
손씨는 제1사단 11연대에 소속되어 있다가 지난 1월 포위망을 뚫고 후퇴당시 김천방면에서 낙오가 되어 할 수 없이 개성에서 직조공장을 경영하고 있는 자기 집에 들어와 가족 6인과 가재 약간(현금 2천 9백 만원, 면계 의복, 자봉침 등 시가 6천 만원을 묶어 가지고 진남포서 내려오는 목선 일척에 편승하여 1월 14일 충남 서산해안 거아도에 표착하였다.
그때 동도 부근 남면지서에서는 군인으로 신분증이 없다하여(신분증은 후퇴 당시 분실) 동선 승객 18명 전부를 해적이라고 위협하여 무기를 빼앗고 태안경찰서에 송치한 바 태안경찰서장 최배식씨는 세밀히 조사한 결과 그들을 송치한 채순경을 꾸짖으며 석방하는 동시에 빨리 부대를 찾아가라고 돈 천원까지 주었다 한다. 손씨는 가족을 조속히 부산으로 보내줄 것을 부탁하고 단신으로 부산을 내려와 원대에 복귀하여 멸공작전에 분투하다가 고랑포면 전투에서 명예의 부상을 당하고 6월 15일 제대되었다.
이렇게 손씨는 가족 소식이 궁금하여 무려 7차에 걸쳐 태안경찰서를 찾아가서 물어보았더니 동서에서는 남면지서 전화로 조회한 결과 종시 여일하게 그 후 즉시로 배를 태워 부산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 방면으로 탐사한 결과 사고가 생긴 것은 분명하나 단서를 잡을 수 없어서 집을 팔아 약간 돈을 만들어가지고 백방으로 수사한 끝에 우연히 의용경찰원 전무복의 집에 자기 가재인 자봉침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집 일꾼 김보식에게서 비로서 사건 전말을 알게 되었다.
즉 남면지서 구몽회 주임이하 채순석(주범), 홍석의, 구상회, 여제원 등 순경과 의용경찰 전무복, 남면 청년단장 박병묵 등이 공모하여 피난민 중 6명은 총살, 12명은 물속에 집어넣어 버리고 1억원에 가까운 재물을 범인들이 분배 착복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즉시로 대전 15헌병대에 고발한 바 충남경찰국으로 이관되어 조사결과 드디어 8월 26일 대전검찰청에서 상위 6명(범인 중 남면단장 박병묵은 도망)을 기소한 것이다.
이러한 원통하고 안타까운 원한을 품고도 할 수 없이 오직 경찰과 검찰 소속의 선처만 기다리고 있는데 수사기관의 태도를 보면 자기에 대하여 너무나 냉정하여 검찰청에서는 공판일자조차 알려주지 않을 뿐이라 대구신보기자를 통하여 공판일자를 알고 간즉 입정을 거부하여 들어가 보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동 사건이 발각된 당시 시체를 찾으러 갈 때에 충남경찰국 수사계장은 경찰에 먼저 알리지 않고 헌병에 알렸다고 야단을 치며 트럭도 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동 사건 수범인 채순경이 부친을 동반하여 예산에는 서로 담소하면서 주식을 같이 하고 동반하던 범인들은 태안경찰서 관내에 들어서는 포승도 풀어주는 등 차마 눈으로 정시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국회에 이 사실을 호소한 것이라 한다.
안면에서는 주민 80여 명이 지서 소속 경찰과 소방대에게 체포되어 어업창고에 구금됐으며, 처형으로 분류된 주민들이 딱쿵골에서 총살당했다. 오세학 등 12명이 경찰에 의해 딱쿵골로 이송되어 살해당했는데, 이튿날 이송된 12명의 시신이 사건현장에서 발견되었다.
고남면 주민들은 고남지서 경찰과 소방대원에게 연행되어 지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감금된 주민들은 지서장, 소방대장 및 면 유지들이 부역혐의자들을 ‘처형’과 ‘훈방’으로 분류했으며, 처형으로 분류된 주민들은 안면 장곡리 앞 바다에서 수장되었다.
팔봉면 주민들은 면사무소 창고와 팔봉지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는데, 팔봉면 북부에 위치한 금학리ㆍ양길리ㆍ대황리ㆍ호리ㆍ흑석리 등의 주민들은 구도지서(팔봉지서)로, 서남부에 위치한 어송리 주민들은 면사무소창고로 연행되었다. 여기서 ‘처형’으로 분류된 주민들이 어송리 솔감목(농협 교통호), 구도지서인근 골짜기, 숯둘재에서 집단희생당했다.
이상 태안지역에서 확인된 피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