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충복의(效忠伏義) 적의협력(迪毅協力)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가의대부(大夫)행 전라도(全羅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겸 장흥도호부사(長興都護府使) 안공의 휘는 위(衛), 자는 대훈(大勳), 선조는 순흥인(順興人)이다.
고려에 벼슬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참리(參理) 예문관 대제학 감춘추관사(監春 秋館事) 전리판서(典理判書) 상호군(上護軍) 영효사관사(領孝思觀事)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이며 문의공(文懿公)의 시호를 받으신 휘 문개(文凱)의 8대손이시다. 증조의 휘는 극성(克誠)이니 통례문(通禮門) 통찬(通贊)이셨다가 통례원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되셨고, 조(祖)의 휘는 수천(壽千)이니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셨고, 고(考)의 휘는 경신(敬信)이니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셨다.
공(公)은 가정(嘉靖) 42년 계해년(1563) 3월 2일에 김제군(金堤郡) 생건리(生巾里)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 특이한 자질이 있었으며 기개가 있고 뜻이 커서 남에게 눌려 지내지 않았다. 모부인의 성품이 엄하여 가르치고 훈계함을 정도로 하니 일찍 아버지를 잃었으나 힘입을 곳을 잃음이 없으니 사람들이 그제야 공의 효성이 천성에서 나왔음을 알았다.
나이 겨우 약관에 백사(白沙) 이 정승(李政丞)이 호남에 있으며 교장을 설치하여 문무의 재능을 점렬하자 공은 편복(便服) 차림으로 금색(禁索) 밖에서 보고 있었는데, 이 정승이 바라보고 사람을 시켜 앞으로 초치하여 먼저 성씨와 문벌을 묻고 다음에는 문무의 재능을 묻기에 공이 능한 바가 없다고 대답하자 정승이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자못 애석하게 여기는 뜻이 있었다.
기축년(1589)에 공이 사람들의 무고를 당하여 그의 형인 윤과 더불어 자백시키려고 엄중한 문책을 당하였으나 사건이 마침내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졌으나 그로 인하여 마침내 용천(龍川)에 유배를 당하였다.
당시에 임진왜란(1592)을 만나 왜장 평수길(平秀吉)이 온 나라에 쳐들어오니 연이어 모든 고을이 함락되었고 임금님의 수레가 서쪽으로 피난을 가고 국사가 어지럽게 되었다. 공이 형과 더불어 상의하기를, “차라리 누명을 짊어지고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기 보다는 서쪽으로 가는 임금의 수레를 호종(扈從)하여 충성을 바쳐 순국하여 국가에 보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차 출발하려는 즈음에 본군의 군수가 그 소식을 듣고 그가 유배된 처지에 제멋대로 이탈한 죄가 있다고 곤장을 쳤다. 이에 공의 형은 그 집안의 처자와 노비를 거느리고 남으로 본도(本道)로 돌아가고 공은 탈출하여 도보로 드디어 평양(平壤)에 이르러 먼저 병사의 진지(陣地)에 소속되었는데, 먼저 그 규범을 보니 진취할 형세가 없는 것 같이 염려되어 그 진지로부터 달아나 병판 영중(營中)에 소속되었다. 그 당시에 병판은 백사(白沙)이 정승(李政丞)이었다. 묻기를, “너는 어떤 사람이며 어찌하여 이곳에 왔느냐?”라고 하기에 공이 살던 곳의 지명과 귀양을 살게 된 사유와 그리고 공을 세워 죄 값을 치를 뜻으로 대답하니 정승이 한참 바라보고는 말하기를, “너는 전날 교장(校場) 가운데로 불러 보았던 자가 아니냐?" 라고 하고는 인하여 앉게 하고는 말하기를, “너는 죄안(罪案) 중에 이름이 있으니 대열에 있기 어렵다. 모름지기 공을 세운 뒤라야 변동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머물러 있게 하였다.
병사가 그 소식을 듣고는 배반하여 다른 영중(營中)에 소속된 것을 지목하여 이관하여 끌어내어 붙잡아 가려고 두세 번이나 이르렀으나 정승이 끝내 거절하고 보내지 않았다.
하루는 나가다가 군에서 적 6,7명을 만나 쳐 죽여 그 머리를 바쳤더니 정승이 크게 기뻐하며 그의 공적을 임금님에게 장계로 알려 영유과(永柔科)에 갈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드디어 그 방에 발탁되자 정승이 성대하게 공의 지략을 임금에게 진달하여 대동찰방(大同察訪) 겸 조방장(助防將)을 삼았다.
갑오년(1594)에 정승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이렇게 남풍이 성하지 않고 해구가 가득한때를 만나 안위와 같은 사람은 장수의 재주가 있으니 한가롭게 말을 다스리는 벼슬을 맡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남쪽 변방의 수령을 시켜서 일면을 담당하게 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더니 상이 옳다고 윤허하시고 드디어 거제현령(巨濟縣令)을 제수하였다.
정유년(1597) 7월 16일에 통제사인 원균(元均)이 전적에서 패망하고 절제사(節制使)인 이억기(李億棋)도 물에 뛰어들어 전사하여 새로 패배한 나머지 적의 세력이 크게 치열하자 통제사인 이순신(李舜臣) 공이 폐위되었던 중에 단기로 부임하였다. 당시에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여 형세가 서로 당할 수 없었다. 공은 통제공과 더불어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여 하늘에 축원하고 대중들에게 맹세하며 기필코 적을 모두 쳐서 죽이고야 말겠다고 하고는 이 해의 9월 7일에 전선 13척이 군사를 잠수시켜 습격하고자 하기에 공이 통제공과 더불어 포로써 대응하여 배를 정돈하여 출병하니 적이 움직임은 옳지 않음을 알고 인하여 물러갔다. 조금 지나서 공이 우연히 마음이 움직이며 통제공의 병영을 살펴보았더니 과연 3명의 적이 있는데 장차 비수를 품고서 기회를 살피기에 공이 곧장 칼을 뽑아 그들을 쳐서 연이어 둘을 찔렀고, 그 중 하나는 도망쳐 멀리 달아났다.
당시에 우리 군사들의 전선은 다만 10척이 있을 뿐이었는데 일제히 명량(鳴梁)으로 나아가며 모이기로 기약한 날에 공은 배를 만드는 이로써 기한에 닿지 않자 통제공이 소리를 가다듬어 성을내어 꾸짖기를, “너는 군율을 어긴 죄로 마땅히 목을 베리라.”라고 하기에 공이 일어나 사과하며 말하기를, “내일 선봉으로 나가 적을 격파하여 그 죄를 속죄하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하였더니 통제공이 군중에 포고하여 허락하였다. 16일 천기가 밝자 전선 5.6백 척이 바다를 덮고서 올라왔다. 당시에 마침 조수가 바야흐로 물러가며 항구에 여울이 사나웠으나 공은 하나의 큰 배로 여울을 타고 건너 조수에 순응하여 바람을 타고 내려가니 문득 배가 빠르게 달려 화살처럼 행하면서 곧게 적진과 충돌하니 적이 사면에서 포위하자 공은 죽음을 무릎 쓰고 돌진하여 아우고 사졸들로 모두 용맹을 떨치니 않음이 없이 먼저 적진 31척을 쳐부수니 적이 조금 물러갔다. 갑자기 쇠로 가면을 쓴 한 적장이 있었는데 몸은 좌우에 칼을 차고 뛰어서 우리의 배로 들어와서 창을 휘두르며 전진하기에 공은 왼손으로 적의 창 가지를 잡고 오른손으로 긴 칼을 날려 적의 머리를 쳐서 쪼개었으며 공의 손도 또한 적의 창에 베어 뼈가 들어나고 피가 흘렀다. 적장은 이미 죽었는데 바로 이른바 마다시(馬多施)이었다. 적의 무리들이 다시 모여 사면을 포위하여 혹은 배의 밑바닥에 구멍을 뚫기도 하고 혹은 배를 붙잡고 연달아 기어오르기도 하기에 공은 창을 휘두르며 좌우로 응전하고 접전하는 즈음에 적은 틈을 타고서 겨우 그들의 장수의 시신을 갖고 물러갔다.
당시에 통제공은 물러가는 조수에 장애를 받으며 인하여 모든 군사들을 독전하여 승리를 하며 계속 전진하니 적이 드디어 크게 궤멸되어 온 군사가 도망을 갔다. 우리의 군사들은 보화도로 진지를 옮겼다.
이 군역에 적선 150척이 모두 엎어지고 침몰되었는데 통제공이 공의 공로라면서 빨리 표창하라고 장계(狀啓)를 임금님에게 주달하여 통정대부의 품계에 승진되고 뛰어넘어 본도의 우수사(右水使)에 배임되셨으니 때는 무술년(1598) 정월(正月)이었다.
2월 17일에 우리의 군사들은 고금도(島)로 진지를 옮겼다. 당시 왜적의 우두머리인 평행장(平行長)이 무리들을 거두어 험난함을 점거하여 순천의 왜교(倭橋)에 진(陣)을 쳤으니 그해의 7월이었다. 명나라 장수인 진린(陣璘) 도독(都督)과 유정 도독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순천의 동쪽에 모였다. 11월 초 9일에 우리의 군사도 진지를 왜교의 앞 바다로 옮겨 사들의 명성이 다시 떨쳤고 전선은 삼심여 척이었다. 사천과 남해의 모든 적도 장차 합세하여 와서 모이기에 공은 통제공에게 계책을 받고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묘도(猫島)에 군사를 매복시켜 중요한 적로를 끊었다. 18일 아침에 망을 보던 군사가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4백여 척이 이미 노량을 넘어 관음포(觀音浦)에 모여 둔(屯)을 쳤다고 하였다.
이날 진도독(陳都督)과 그리고 통제공(統制公)이 각각 배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묘도에 모였는데 그때에 적선의 큰 배 세척이 우리 군사들의 배가 나열되어 있는 가운데로 날아들어 와서 마치 베짜는 북이 드나들 듯이 왼쪽을 침입하기도 하고 오른쪽을 침범하기도 하며 갑자기 갔다가 별안간에 오니 통제공이 자못 걱정하는 빛이 있었다. 공이 요청하여 안골포(安骨浦)에 가볍고 날쌘 배 15척을 얻어 매척마다 배 밑에 각각 한 가닥의 용의 갈구리로 만든 새끼줄을 얽어매어 모든 배가 나가기 적은 싸움에 취하여 있었다. 인하여 잠수를 잘하는 15인에게 훈계하여 각각 배 밑의 새끼줄의 끝을 잡고 떼를 나누어 세 적선 키에 붙잡아 매게 하고는 또한 싸우기도 하고 또한 물러가기도 하니 적은 그들이 끌려가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공은 먼저 우리의 진지에 약속하고 양쪽에서 둘러싸고 기다리다가 유인한 적이 이미 이르자 좌우에서 에워싸니 통제공이 크게 기뻐하였으며 온 군사들이 칭찬하고 경축하였다.
이날 이경에 묘도(猫道)로부터 출발하여 노량에 닿았다. 당시에 큰 별이 바다로 떨어지니 보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19일 밤 사경에 우리의 군사가 먼저 노량으로 나가서 양쪽 진영이 둥글게 대치하니 적의 탄환이 비오듯 하였다. 공이 적진으로 돌진하여 들어가서 목숨을 걸고 싸우니 적선 오십여 척이 여러 겹으로 에워싸고 사면에서 개미떼처럼 달라붙었다. 당시에 바다에는 안개가 끼어 사방이 막혀 깃발과 북을 치며 응전하기도 어렵고 서로 구원함도 미치지 못하였는데 공은 밤새도록 독전하다가 여러 겹의 포위를 뚫고 나왔다. 새벽시간이 되자 적선 200여 척이 진도독을 에워싸고 매우 위급하게 되어 거의 함몰하여 패하게 되자 통제공이 곧게 전진하여 구원하며 몸소 시석을 무릅쓰고 손수 스스로 북을 치며 공에게 구원하러 오라고 지휘하니 공이 노를 휘날리며 곧게 전진하여 겹겹 포위를 뚫고 들어가 좌충우돌하는 즈음에 통제공이 갑자기 탄환을 맞고 누우면서 절명에 임박하여 휘하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하여금 군사들을 놀래지 않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공은 그 말과 같이 하며 기를 휘두르고 북을 울리기를 한결같이 옛 제도를 준수하며 드디어 모든 군사들 독전하며 나아가 진도독과 더불어 그들을 무너뜨리니 적이 드디어 크게 궤멸되고 시체가 떠서 바다를 가렸고 바닷물이 피로 물들었으며 적의 우두머리 청정은 겨우 조각배로 도망쳐 달아났다. 바야흐로 그 전투에 취하였을 때에 공도 적의 탄환을 맞아 뚫고 왼쪽 어깨 가죽 속으로 파고 들어갔으나 오히려 알지 못하다가 싸움이 파한 뒤에 비로소 깨닫고 칼을 이용하여 찢어서 내니 그 소문을 들은 자는 경악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런 소식을 임금님에게 아뢰면서 이르기를, “10만의 적의 무리들을 한 칼로 모두 섬멸하여 평정하였으나 머리를 북쪽 대궐 밑에 매달지 못한 것이 신의 크나큰 한탄입니다.”라고 하니 그 소문을 들은 자들은 장하게 여겼다.
적이 이미 물러가자 공은 통제의 상에 임하여 시체를 어루만지며 크게 통곡하며 말하기를, “통제공은 왕의 국사(國事)에서 죽었으니 죽음도 영광이지만 국가는 간성이 꺾여졌으니 백성은 누구를 의지하여 돌아가며 장막에 지휘함이 없으니 나는 누구와 더불어 의논할까? 아! 슬프구나. 위로는 국가를 위하여 슬프고 아래로는 나의 사사로운 정으로서 통곡하네.”라고 하고는 그제야 친히 호상(護喪)을 하여 널을 고향으로 운반하였다. 대개 통제공의 상(喪)에는 비록 남쪽의 부인들과 어린이도 거리로 달려 나와 통곡하며 슬프게 사모하였거늘, 하물며 공은 여러 해를 싸움터에서 국가의 일에 마음을 함께 하다가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 슬프고 한탄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공의 충성(忠誠)과 지략(智略)은 크게 공의 알아주는 바가 되었고 장막에서 오년 동안 보좌하며 많은 일을 위임받아 매번 이기면 포창하라는 장계를 달려 보내 포창이 있었으니 옛 사람에게 실로 드물게 있었던 이야기였다. 노량의 전투에서 공적이 더욱 많았으나 국가의 운명이 불행하여 옥(玉)의 장막이 갑자기 비었으니 다시 누가 장계를 달려 보내어 그 공이 아름답다고 칭송하랴? 국가가 재건되고 남쪽의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노량대첩의 힘을 입었는데도 그 공으로 하여금 오로지 천장에게 만 돌아가게 되고 공의 장렬하고 풍부한 공로는 사라져 없어지게 되었으니 당시에도 애통하였지만 후세에도 한탄스러움을 그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
백사(白沙) 이 상공이 항상 왜적을 평정한 공을 논하면서 역시 공을 최고라고 추천하였으니 그 글에 말씀하셨기를, “권응수(權應銖)는 절도사인 박진(朴晉)의 명을 받고 영천을 공격하여 빼앗으며 능히 적의 머리 7백여 급을 베어 한 도의 의병을 일으켜 명성을 크게 떨치었고 안위는 이순신의 분부를 받아 척선 5백여 척을 벽파정 밑에서 무찌르고 물리쳐 적으로 하여금 다시는 전라우도(全羅右道)를 엿보며 곧장 충청도(忠淸道)와 충돌하지 못하게 한 것은 위의 대첩이 아니었다면 적이 한산도(閑山島)의 승세를 몰아 곧장 충청도를 침범하였을 것이고 순하게 바다를 올라와도 꾸짖고 금할 사람이 없었으리라. 사변 후 10년에 영천과 명량(울돌목)의 대첩을 가장 통쾌하고 장하였다고 칭송하는데 위의 일은 권응수에 비하면 어찌 만 배일 뿐이라고 하겠느냐." 라고 하셨으니, 공의 큰 공로와 위대한 업적과 지용과 정충은 거의 백사(白沙)공께서 알아보시고 발탁하신 감별과 통제공이 보고 알아보신 밝은 식견에 부끄러움이 없으셨다.
공이 일찍이 거제(巨濟)에 있으며 지혜를 창안하여 배를 만들며 별도의 규격으로 키를 설치하였더니 그 가는 것이 매우 빨라서 날아가는 새도 미치지 못하였는데 후인들이 그 방법을 많이 이용하면서 그것을 지칭하기를, '안 병사(安兵使)의 키'라고 하였다.
기해년(1599)에 가선대부(嘉善大夫)인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에 올랐고 삼대에 은전이 추가되었으며 경자년 여름에 전라병사가 되었고 임인년 겨울에 본도의 좌수사로 옮겨서 배임되었으니 수전에 익숙하고 밝기 때문이었다.
갑진년(1604)에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고 을사년(1605)에는 충청수사(忠淸水使)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병오년(1606) 봄에 경상수사(慶尙水使)가 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교체되어 돌아왔으며 무신년(1608)에 재차로 전라도의 수군통제사로 보임되었다가 임자년에 교체되어 돌아왔다. 당시에 유즙(柳楫)의 사건으로 추방되어 전원의 마을로 돌아갔다. 동계(桐溪) 정온(鄭蘊) 공이 상소를 올려 극단적으로 말하였기를, “공(公)은 가히 멀리 버려서는 옳지 않습니다. 안위(安衛)는 이에 일국의 명장이 되며 그의 충의(忠義)는 이미 나타났으니 그 공로도 실은 이순신의 다음입니다.”라고 하였고 전에 주부(主簿)였던 조성립(趙成立) 또한 시(詩)를 남겨 말하기를, “장군의 충절은 성명도 아셨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립문을 가리니 해가 더디구나. 후세에 사람들이 당년의 일을 알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당전(堂前)으로 향하여 이 시를 보려무나."라고 하였다.
기미년(1619) 봄에 또 공을 서용하여 평안도방어사를 삼았으니 북쪽의 오랑캐가 강대하였기때문이다.
계해년(1623) 인조반정 후에 곧장 공을 기용하여 영대장(率領將)을 삼았다가 잠시 뒤에 좋아하지 않는 자들의 배척하는 바가 되어 교체되어 고향의 거처로 돌아왔다 병자년(1636) 호란(胡亂)에 공의 연세가 74세였으나 분연히 일어나 어가(禦駕)를 호종하여 가다가 은진(恩津)에 도착하니 적의 기병이 가득차서 길을 통행할 수 없었다. 참제(參制) 정홍명(鄭弘溟)과 헌납(獻納) 이기발(李起浡)도 의병을 모집하여 은진에 도착하여 두 분이 공에게 나아가 계책을 묻고 인하여국세도 묻기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남한산성은 대가가 친히 임하여 계시니 가히 보존되어 다른일이 없겠으나 강도는 생각하니 반드시 헐리고 불사름은 없으나 강변의 여사(廬舍)에 사람들은 가히 험난함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십일이 되지 않아서 적이 과연 집을 헐어 뗏목을 만들어 강성을 함락하자 두 분이 드디어 칭송하며 감탄하였다.
병자년으로부터 후에 당시 한 번 크게 한숨을 쉬며 걱정스러운 형색으로 말하기를, “오랑캐가 얼마이기에 제어하기 어려워서 그들이 들끓도록 맡겨둘까? 나라에 사람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갑신년(1644) 7월 11일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수(壽)는 82세이셨다. 서귀(西歸) 이기발(李起浡 )이 공의 만사(輓詞)를 지어 말하기를, “큰 나무가 너울거리며 떨어지니 한 나라가 비었구나."라고 하였으며, 또한 일찍이 말하기를, “남쪽 사람들이 여기에서 침식할 수 있게 된 것이 누구의 힘이던가. 안공의 전공(戰功)을 천년토록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익찬(翊) 황윤석(黃胤錫)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