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개신교의 한국 개신교 흡수
일제는 한일합방 이후 일본교회중의 하나인 조합교회(組合敎會)(飯沼二郞․한석희 공저, 남영환역, 「일제통치와 일본기독교」, “제2장, 일본 조합교회의 조선전도)를 한국에 상륙시켰다. 1913년 8월 15일 서울에서 제 1회 일본기독교조합교회 한국대회가 개최된 이래 이 교파는 철저한 침략주의에 앞장섰다. 조합교회(댓글1)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재벌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이 조합교회가 한국 내에서 주로 한 일은 한일합방의 정당성을 인식시키는 동시에 한일동조론을 내세워 일제의 어용적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갔다. 1939년 “종교단체법”이 군국주의자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일본국회에 제출되자마자 통과되었다. 종교단체법의 형식상 내용은 국민정신의 선도에 종교의 역할을 평가하고 종교의 지위를 명확히 하며, 종교를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 정책에 교회가 보조를 맞추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지 국가의 이름으로 교회를 탄압할 수 있는 법이었다. 일제는 일본 교회를 이용하여 통치의 편의상 한국교회와의 통합을 추진케 하였다. 우선 교회 수 50, 신도 수 5,000명 이상의 교회만을 문무성에 등록하게 하였다. 이렇게 한 결과 일본의 3대 교파인 일기(日基) 조합교회, 감리교와 일곱 교파만이 문무성에 등록케 되었다. 일제는 이들 교파들에게 한국교회와의 합동을 추진케 하였는바, 이렇게 한 의도는 한국교회를 일본교회에 예속시켜 침략전쟁에 순응케 하기 위해서였다.
● 일본교회와의 합동과정
1938년 10월3일 제3회 조선감리교 총회는 일본감리교회와의 합동을 결의한 하였다. 그리고 1939년10월19일부터 열리는 일본감리교 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양주삼 등 대표단 7명이 기차 편으로 서울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10월18일 동경 청산학원 안에 있는 해리스관(館)과 가마쿠라 목사관 등지에서 모여 합동에 관한 8가지 조상의 결정을 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내선일체, 황도의양((黃道宜揚)을 위하여 양측의 교회가 조속히 합동하고 양국 교회의 친선을 견고히 하자!’는 것이었다.
성결교회는,「활천」1940년 5월호를 보면 일본교회와의 합동문제에 관한 결과 보고가 나오는데, “일본성결교회와 우리 성결교회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보아 형제간이라 할 것인데 지금까지 별반 교통이 없이 지내 왔으나 내선일체가 실현되어 가고 각 교파가 내지와 조선이라는 구별을 잊게 연합 또는 합동문제가 회합 때마다 제출되는 마당에 왔다. 이것은 정치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고 오직 신앙의 입장에서 친밀하게 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전제 한 후 “동경에 가서 일본성결회와 동일하게 교회명을 변경하는 일, 교역자를 서로 교환하는 일, 년회에 서로 대표를 파송하는 일 등이 체결되었고 제반 문제는 양 교파에서 3인씩 연구위원을 두어 구체적으로 연구 중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원래 성결교회는 일본서 발흥한 교단으로서 일본성결교의 직접선교를 통해서 수립된 교단이기 때문에 양국 성결교단 합동은 별 어려움 없이 진행되었다.
‘조선기독교연합회’는 일본교회와의 합동을 통한 예속화와는 별개로, 한국개신교 안에서의 교파합동을 동일한 목적으로 추진하였다. 1938년5월8일 오후2시 서울 부민관에서 총독부 학무국장, 경기도 지사, 경기부윤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인 목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경성기독교연합회’ 발회식을 가졌다. 이 회합에서 임원으로 임명된 자들은 정춘주, 김우현, 신재명, 김종우, 원익상, 장홍범 등이며 81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황궁요배, 황국신민서사 등의 식순을 진행한 후,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현하 아국시국의 중대성을 감(鑑)하야 국시(國是)를 체(體)하며 국민정신의 진작을 도(圖)함은 가장 긴급사임을 인하고 자에 조선에 있는 기독교 신도는 단결 협력하야 동포의 정신작흥에 자(資)하고 일층 전도에 정진하야 황국신민으로서 보국의 성(誠)을 치(致)하기를 기(期)함”(「감리교보」, 1938년 6월 1일) |
이 결정은 타지역의 연합회와 각 교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38년7월7일에는 ‘조선기독교연합회’가 기독교의 황민화, 내선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조직되었다. 이 연합회에는 김종우, 차재명, 원익상, 이명직, 김우현, 윤치호, 장홍범 등과 경성에서 30명, 지방에서 30명의 목사들이 참여하였다.
일제(日帝)는 1943년4월 서울지역 친일 목회자들과 감리교를 주축으로 하여 ‘조선기독교혁신교단’을 조직하였다. 이 모임에 장로교의 윤인구, 최석주, 전필순이 참여하였고 전필순은 의장으로서 교단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던 중 경성노회 김영주 목사가 경성노회는 혁신교단에 참여하기고 결정한 일이 없다며 전필순 목사의 제명을 거론하자 전필순은 의장직을 사임하였다. 혁신교단에서는 일제가 눈에 가시같이 여기는 구약의 출애굽 사상과 신약의 예수의 해방적 교훈과 행동을 제거하려 하였다. 또한 사도신경을 빼며 요한계시록을 제거하였으며 4복음서에서는 산상수훈만이 경전이라는 결의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혁신교단 중심축인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내부에서 혁신교단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혁신교단은 몇몇 친일파 목회자들의 모임 정도로 약화되었다.
1942년12월 ‘기독교조선감리교단’ 제2회 정기총회에서 통리자가 된 변홍규 목사가 혁신교단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은 일제는 변홍규를 사임하게 하고 친일적인 교단 간부들을 중심으로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교단명칭을 바꾸고 교단규칙을 제정, 발표하게 하였다. 이 규칙에서 ‘1943년 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다시 혁신을 단행하여 명실공이 大일본의 종교임을 밝히게 되었다.’는 선언을 하였다. 이어 1943년 10월 14일 ‘교단규칙실시방법 통달의 건’에서 각 교회 명칭을 변경하라고 권면하였다.
(다음 회에 계속)
첫댓글 댓글1)
미국 회중교회는 19세기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았으며, 조선의 회중교회는 1886년 일본 조합교회의 조선지역 교단으로 창설되었다. 1904년 러일 전쟁 승리 이후 일본 조합교회는 미국 회중교회와 결별하였다. 일본 조합교회가 1910년 한일 합방 조약 이후 조선을 전도지역으로 선정하고 서울, 평양 등지에 조합교회를 설립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 때까지 조선의 복음화라는 명분 아래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의 앞잡이 역할을 하다가, 1921년 조선 총독부로부터의 예산 지원이 중단되면서 조선 회중교회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후 일본 조합교회는 1941년 일본 기독교단에 흡수된후 현재까지 일본 기독교단의 일부로 남아있으며, 1945년 일제의 패망에 따라 조선 회중교회는 감리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 등 교단에 흡수되거나 해체되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A%8C%EC%A4%91%EA%B5%90%ED%9A%8C
회중교회=조합교회인데, 저 때 당시의 조합교회가 친일의 길을 걸었네요. 교파 명칭은 그럴싸 한데 황국신민화에 앞장서는 추태를 보인 것이 안타깝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ㅠㅠ
성결교회의 연회
1921년 4월, 교역자 총회기구설립을 위한 “교역자간담회”를 조직하였고, 1924년, “교역자회”로 변경 발전하였으며, 1929년, “연회”로 개편되었습니다.
그런 모임이 연회이군요. 잘 알겠습니다.
한일동조론
일본 입장에서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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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日)과 조선인(鮮), 즉 한국인은 같은 조상(同祖)에서 나온 동족이라는 이론이다. '동조동근론'이라고도 한다.
넓은 위미에서 황인종, 몽골로이드이겠지만... 진짜 조상이 같은 것은 아닐텐데요. 어거지로 짜맞춘 식민지 합리화 논리이지요.ㅠㅠ
@노베 공감합니다.
조선혁신교단(朝鮮革新敎團)
일제는 1930년대부터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황국신민화정책을 강화했으며 그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 신사참배 강요였다. 이 정책은 일부 그리스도교도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한국 그리스도교의 교단 차원에서 수용되었다. 그후 일제는 종교단체법 등을 제정하면서 종교탄압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전신은 1942년 3월 조직된 일본 그리스도교 조선혁신교단(朝鮮革新敎團)이다.
이 혁신교단은 일제가 전시하의 종교통제를 위해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 중 일제에 타협적인 자들을 뽑아 조직한 교단이었으며, 의장은 전필순(全弼淳)이었다. 이들은 성서 중에서 〈구약성서〉의 모세 5경과 〈신약성서〉의 〈요한의 묵시록〉을 불온사상으로 간주하여 삭제했다. 전시상황이 더욱 악화되자 〈구약성서〉는 전부 폐지하고 〈신약성서〉도 4복음서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삭제했다. 그리고 4복음서도 당국이 허가한 해석의 범위에서만 설교할 수 있었다.
1943년에는 성결교(聖潔敎)·안식교(安息敎)·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 등의 재림(再臨)사상을 위험사상으로 간주하여 이 교단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남아있던 감리교를 중심으로 하여 장로교와 구세군 등을 포섭하고 일본 그리스도교 조선감리교단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총리에는 감리교의 정춘수를 임명했다. 또한 일요일의 오후 집회와 수요일의 집회를 금지시키고, 청년회·사경회·아동집회 등을 모두 해산시켰으며 교회 안에는 황국신민서사·황도실천·전도보국(傳道保國) 등의 표어를 강제적으로 달게 했다.
1945년에는 마침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창립하여 완전히 일본 그리스도교 교단에 예속시켰으며 교단의 최고 책임자인 통리에는 김관식을 임명했다. 그러나 이 교단은 1개월도 채 안 되어 일제의 패망으로 자동 해산되었다.
출처: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8a1530a
@장코뱅 본문에서 읽고 Daum 사전으로 또 복습하는 효과가 나네요. 더 이해가 잘 됩니다.
세속 국가가 식민지가 되니 침략국가의 종교가 한국 개신교를 병합해 버렸네요. 게다가 신사참배까지 시키고ㅠㅠ 이런 불행한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감리교회가 아주 열일을 했군요. 앞장 서서.ㅠㅠ
1930년대에도 혁신교단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집니다. 현재가 까마득한 과거가 되면 다 구식이 돼버리니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성경 말씀이 아주 정확하군요. 함부로 혁신 혁신 하는 것도 조심스럽네요.
일제 하 기독교의 상황을 소상히 정리해주셔서 큰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네,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