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코드> 때의 뜨거운 논쟁에 비하면 <천사와 악마>는 의외로 조용히(?) 지나간다는 느낌이다. 사실 가톨릭 혹은 개신교와 영화계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한 건 꽤 오랜 역사를 지닌다. '신성모독'이라는 직접적 이유부터 도덕적 표현이나 윤리적 논란 같은 문제까지, 교회는 종종 영화와 싸워왔다. 1930년 <황금 시대>부터 2006년 <다빈치 코드>까지, '교회와의 불화'를 일으켰던 12편의 영화를 모아 보았다.
기사 | 김형석 <스크린> 전 편집장, 구성 | 네이버영화
교회 vs 영화, 논쟁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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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황금 시대 L'Age d'or>_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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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루이스 브뉘엘, 살바도르 달리
- 1930년 파리의 '스튜디오 28' 극장에서 <황금 시대>가 개봉되었을 때, 이 영화는 일주일 만에 스캔들이 되었다. 성적으로 불온하고, 사디스트인 블랑쉬 공작이 예수의 형상으로 나타나며, 바티칸이 있는 로마가 과거엔 이교도들의 도시였다고 이야기하는 <황금 시대>. 이 영화에서 초현실주의자인 브뉘엘과 달리는, 신성모독을 통해 미학적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저항은 격렬했다. 가톨릭 세력의 지원을 받은 단체들은 극장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저널을 통해 공개적으로 브뉘엘과 달리를 비난했다. 제작자였던 사를 드 노이야스마저 교회에 의해 비난 받았으며, 귀족이었던 그는 교계에 의해 파문되었다. 극우 단체들은 극장 시설물을 부수고 스크린에 황산과 잉크를 퍼부었다. 결국 경찰이 개입해 영화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비밀 복사판이 은밀하게 상영되긴 했지만, 이후 49년 동안 <황금 시대>라는 영화를 공공 장소에서 상영하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었다. 그리고 1979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일정 부분 감소했을 때 이 영화는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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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 <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_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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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제임스 웨일
- 지금으로선 믿기 힘들지만, 고전 호러의 걸작 <프랑켄슈타인>은 1931년 상영 당시 상당수의 관객들로부터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종교적 보수 언론들은 "내 아이에겐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고 평하기도 했다. 특히 프랑켄슈타인이 시체들을 모아 괴물을 만들어내는 설정은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신이 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겠어!"라는 대사는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여러 주에서 종교 단체로부터 삭제 압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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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 <사인 오브 더 크로스 The Sign of the Cross>_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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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세실 B. 드밀
- 로마의 네로 황제 시절 기독교 박해를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종교 영화의 틀을 빌어 와 그 안에 온갖 스펙터클과 선정적인 장면을 집어넣었다. 1923년과 1956년에 두 번에 걸쳐 <십계>를 만들었고, <왕 중 왕>(27)에서 예수의 삶을 그렸으며, <클레오파트라>(34) <삼손과 데릴라>(49) 등 스펙터클 대작의 장인이었던 세실 B. 드밀 감독. 그가 1932년에 만든 <사인 오브 크로스>는, 성서를 소재로 하면서 한편으로는 말초적 재미에 충실한 오락영화였다.
그의 상업적 속셈은, 영화 개봉 후 숱한 가톨릭 단체에서 보낸 항의 편지로 보답을 받았다. 상업 저널들조차 "저주받을 위선" "완벽한 쓰레기"라며 공격했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직자들은 "싸구려의" "역겨운" "불순한" 등의 표현을 이었으며, 미국 보수영화 단체의 막후 실력자였던 다니엘 로드 신부는 "참기 힘든 영화"라고 한마디로 정리했다. 결국 이 영화는 미국 가톨릭계에 'Legion of Decency'(LOD. 직역하면 '품위의 군대')라는 조직을 결성케 했고, 이후 LOD는 자체적인 영화 등급을 매겨 신도들과 미국 사회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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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 <사랑 L'Amore>_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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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로베르토 롯셀리니
- 세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롯셀리니의 옴니버스 영화 <사랑>에서 <기적 Il Miracolo> 에피소드는 베니스영화제에서 공개되었을 때 영화제 집행위원회로부터 '신성모독' 판정을 받았다. 지나치게 신앙심이 깊은 어느 순진한 시골 아낙이, 종교적 황홀경의 상태에서 강간을 당해 임신을 하지만, 성 요셉에 의해 수태했다고 믿고 자신이 예수를 낳게 될 거라고 착각한다는 내용의 <기적>. 바티칸은 이 영화가 "종교적 본성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야기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고, 가톨릭 내의 검열 기관인 '가톨릭 시네마토그래픽 센터'는 "종교적, 도덕적 관점에서 지극히 혐오스러운 신성모독"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탈리아 당국은 이 영화의 상영을 허락했고, 기독민주당은 "누군가가 비판하는 것처럼 신성모독의 혐의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답고 인간적이며 진실된 영화"라고 극찬하며 "오해의 소지는 전혀 없는 영화"라고 평가했다. 이후 미국에 상륙했을 때, 이 영화는 다시 논쟁에 휩싸였고 결국 미국 대법원에서 다뤄진 첫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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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_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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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어빙 피첼
- 가톨릭의 타락을 비판하고 종교개혁을 이룩한 마르틴 루터에 대한 전기영화는, 태생적으로 가톨릭으로부터 비난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LOD는 모든 영화를 A등급(일반적인 관객들에게 도덕적으로 지장 없는)과 B등급(일부 관객들에겐 도덕적으로 지장을 줄 수 있는)과 C등급(비난받아야 할)으로 나누었는데, <마르틴 루터>는 이 기준을 좀 더 세분화해야 할 필요성을 제공했다.
그 결과 <마르틴 루터>는 '몇몇 조건의 성인들에겐 도덕적으로 지장을 줄 수 있는' 영화인 'A-4'라는 등급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에서 가톨릭 저널들은 이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불공정하게 다루고 있으며 "가톨릭 교회에 대한 역사적 오해를 영속화시키려는 의도의 영화"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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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 <베이비 돌 Baby Doll>_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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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엘리아 카잔
- 갓 스무 살이 되는 베이비 돌(캐롤 베이커)을 둘러싼 두 아저씨들의 음험한 시각을 그린 <베이비 돌>에 대해 시사 주간지 <타임>은 "지금까지 합법적으로 상영된 미국영화 중 가장 더러운 영화"라고 평했고, 스펠만 추기경이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은 부도덕하고 타락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자 전 세계의 2천만 가톨릭 신자들이 영화에 반대하며 일부는 극장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영화를 걸 예정이었던 극장의 77퍼센트가 상영을 철회했으며, 이 영화는 흥행 참패를 기록했다. 보수주의자와 전통주의자들이 이 영화에 이토록 분노했던 건, 성적 암시들 때문. 결코 직접적인 노출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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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 <달콤한 인생 La Dolce Vita>_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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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페데리코 펠리니
- 영화는 예수의 조형물을 매단 헬리콥터가 로마 상공을 지나가면서 시작한다. 감독은 낡은 종교의 유물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은 물질 중심의 현대 사회에 대한 도덕적 우화. 사람들은 가치관을 상실했고, 그저 쾌락을 좇을 뿐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세속화된 종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품고 있는데,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를 봤다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신을 '미신화'시킨다.
이 영화가 이탈리아에서 개봉되었을 때 로마 가톨릭은 둘로 분열되었다. 자신의 교구 신도들에게 영화를 보지 말라는 사제들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사제들은 "진정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신앙심의 얄팍함"을 지적한 <달콤한 인생>의 영적 가치를 높게 사 신도들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그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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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 <엑소시스트 The Exorcist>_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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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윌리엄 프리드킨
- 사실 이 영화에 대한 논쟁은 원작 소설이 나왔을 때부터 존재했고, 제작자는 그런 부분을 일정 정도 노리고 영화를 기획했다(실제로 이 영화의 상영관 앞에 앰뷸런스를 대기시키는 '이벤트'도 있었다). 하지만 'The Motion Picture Association of America'(MPAA. 미국영화협회)는 너그럽게도(?) <엑소시스트>에 R등급을 부여했고, 'United States Catholic Conference'(미국가톨릭연합)은 X등급을 줘야 한다며 대대적인 상영 금지 운동을 펼쳤다. 몇몇 도시에선 미국가톨릭연합 회원과 경찰의 충돌이 있었으며, 미시시피주의 해티스버그에선 아예 경찰들이 영화를 본 후 극장주를 '악마의 영화'를 틀었다 는 혐의로 법원에 고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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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 <칼리귤라 Caligula>_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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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틴토 브라스
- 미국의 대표적인 성인잡지 중 하나인 <펜트하우스>에서 제작하고 이탈리아의 에로 거장 틴토 브라스가 연출한 <칼리귤라>는 파격적인 성 묘사로 유명했던 영화. 하지만 이 영화가 유럽 개봉을 마치고 1981년 2월1일에 뉴욕에서 개봉되었을 때, 시련은 시작되었다.
당시 'Morality in Media'(미디어 도덕)이라는 단체의 수장이었던 힐 신부는 음란물 반대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었는데, <칼리귤라>가 미국에서 개봉되자 뉴욕과 LA와 시카고의 로마 가톨릭 사제 3,300명과 개신교 목사 2,200명을 대표해 반대 운동을 펼치며 법정 투쟁도 불사했다. 각 도시에서 재판이 벌어졌고, 영화의 배급업자와 제작사 <펜트하우스>에 대한 고소가 뒤를 이었다.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쪽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칼리귤라>는 몇몇 장면을 잘라낸 후에도 X등급으로 상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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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예수의 마지막 유혹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_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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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마틴 스콜세지
- 가톨릭 집안 출신이며 어린 시절엔 신부를 꿈꾸기도 했던 마틴 스콜세지. 그의 10년 숙원이었던 이 영화는 촬영은 물론 시나리오도 완성되기 전에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가톨릭 세력에 의해 거센 항의를 받았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갈등하는 예수의 모습을 그린 이 영화에 대해 반대 세력들은 "그 어떤 예술가도 이따위 작품을 만들 순 없다"고 저항했으며, 자극적 소재와 스콜세지라는 감독의 이름을 믿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했던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손을 털고 나가 떨어졌다.
결국 제작을 맡게 된 유니버셜 스튜디오는 갈등을 무마하기 위해 팀 펜랜드라는 사람을 '크리스천 컨설턴트'로 고용했으나, 그는 곧 그만두고 안티 세력에 합류해 버렸다. 대학 선교 단체인 CCC의 창립자 빌 브라이트 목사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이 영화의 제작비인 650만 달러를 줄 테니 완성된 필름을 넘기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개봉 일주일 전부터 극장 근처에 피켓 시위가 일어났으며, 전 세계의 가톨릭 및 기독교 국가에서 보이코트 운동이 발생했다. 프랑스에선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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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Passion of Christ >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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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멜 깁슨
- 멜 깁슨은 단지, 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고난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뿌리깊은 가톨릭 집안 태생이며, 영화 속에서 예수의 신성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성서 해석은 조금 독특한 점이 있었고 묘사는 지나치게 직접적이어서 몇몇 장면은 호러 영화로 보일 정도였다. 독실한 크리스천들이라면 예수의 고난을 보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묘사는 다분히 선정주의적이었고, 유대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지나치게 편협했다. 메이저 스튜디오로부터 펀딩을 거부당한 멜 깁슨은 자신의 돈으로 이 영화를 완성해야 했으며, 개봉에 임박했을 땐 논쟁의 정점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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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다빈치 코드 Da Vinci Code>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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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론 하워드
- 소설 <다빈치 코드>가 저작권 침해와 표절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다면, 영화 <다빈치 코드>는 훨씬 더 많은 대중들과 만난다는 매체적 속성 때문에 종교단체의 거센 항의를 감내해야 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반유대주의 때문에 골머리를 썩었다면 <다빈치 코드>는 예수의 신성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었는데, 가톨릭과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단체들은 영화 상영에 맞추어 투쟁 전선에 섰다.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자식을 낳았고 그 혈통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설정이 논란의 초점. 한국에선 기독교 단체가 가처분신청을 통한 상영 철회를 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