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기도문 낭독
기도와 기도문 낭독이 같다고 하며 써서 읽으라고 가르치는 목회자가 의외로 많다. 목회자들이 그렇게 가르치니까 교인들도 그런 줄 알고 대부분 써서 읽으면서 기도와 기도문 낭독이 같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건 구역 예배(속회)처럼 대부분 사람이 적게 모이는 예배 때는 보통 써서 읽지 않고 그저 기도하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행사나 주일 낮 예배 때 대표기도는 써서 읽으라고 가르치고 기도하는 사람도 순종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는 기도문을 낭독하라는 말이 없고, 모두 '기도하다'를 기본형으로 '기도하라' '기도하니' '기도하고' '기도하자' '기도하는' '기도하면' 등으로 365번 활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낭독(읽다)이라는 단어가 없는 것도 아니다. 구약에는 출이집트기를 비롯해 신명기, 여호수아, 에스라, 느헤미야, 예레미야에서 모두 18번 낭독이라는 단어가 쓰였고, 신약에서는 눅 4:16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낭독)에 한 번, 행8:28 (에티오피아 재무대신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다)에서 한 번 나온다. 즉 신약시대에도 낭독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기도문 낭독이라는 말이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적게 모이는 구역 예배(속회) 같은 데서 기도할 때는 구할 내용이 많지 않으나, 주일 낮 예배 같이 사람이 많이 참석하는 예배 때의 기도는 상대적으로 구할 내용이 많아 기도가 길어진다. 그래서 써서 읽지 않고 기도하다가 기도할 내용이 떠오르지 않으면 기도하는 사람이 당황하게 되고, 그러면 예배 진행이 순조롭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 속담처럼 누이 좋고 매부 좋게 써서 읽으라고 하는 것이다. 기도와 기도문 낭독이 왜 같냐고 물으면, 열이면 열 다 자기가 구하는 걸 써서 읽는 거니까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런 논리라면
설교와 설교문 낭독이 같아야 하고, 강의와 교재 낭독이 같아야 한다. 과연 설교문 낭독한 걸 설교했다고 할 수 있고, 교재 낭독한 걸 강의했다고 할 수 있을까? 적합한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기도문을 낭독하라고 가르치는 건, 마치 시험 시간에 교과서를 보고 답안지를 작성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책에 있는 내용을 옮겨 적는 것이니까.
무엇보다 기도와 기도문 낭독이 같다고 하는 게 어불성설인 것은, "기도"는 두 글자이고 "기도문 낭독"은 다섯 글자다. 분명한 건 기도문 낭독은 기도라는 말에 "문 낭독"이라는 세 글자가 첨가 되었다. 잠언 30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하나님 말씀에 더하지 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너를 책망하며 너를 거짓말쟁이라고 하실 것이다." 이보다 더 무서운 말씀이 요한계시록 22장 15절에 있다. "거짓말하는 자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두렵고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다면 기도와 기도문 낭독이 같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기도와 기도문 낭독은 이렇게 다르다. 기도는 말 그대로 하나님께 구하는 내용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녹취해 글로 옮기면, 한 문장의 단어 수가 많지 않은 간결한 구어체 문장이다. 그에 반해 대부분의 기도문은 수려한 수식어를 많이 덧붙였기 때문에 문장이 긴 문어체 문장이다. 단어 수로 말하면 구어체 문장의 단어 수는 많아야 열서너 개에 불과하지만, 문어체 문장의 단어 수는 스물두세 개를 넘는 문장도 꽤 있다. 언어학자들의 공통된 이론은, 한 문장의 단어 수가 최대 스무한두 단어가 넘어가면 청자는 듣기를 포기한다고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도한 사람은 기도를 마치고 나서 자기가 무엇을 구했는지 바둑처럼 복기할 수 있지만, 기도문을 낭독한 사람은 장문의 글을 낭독 했기에 자기가 무엇을 구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혼자 만족할 뿐이다. 참고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면 일곱 가지 내용을 구하는데 수식어가 하나도 없이 간결하다. 그리고 수식어가 많아지면 내용이 진실하기보다는 가식일 가능성이 많다. 북조선에서 최고 지도자 앞에 붙는 수식어가 대여섯 개 된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진심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기도문을 써서 읽으라고 가르치는 사람과 그 말에 순종하는 사람의 사고 발상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위주가 아니라, 목회자 위주의 목회 편의와 낭독하는 사람 위주의 인본주의 사고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써서 읽으라고 가르치는 목회자 처지에서는 예배 순서의 차질을 예방할 수 있어서 좋고, 낭독하는 사람은 기도 중에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당황하게 되는 일이 없을 테니,우리 속담처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되기 때문에 인본주의 사고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글을 맺으며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도하는 방법을 공유하고자 한다. 일주일 전에 통고 받은 것을 전제로,
1) 통고 받은 날 기도문을 작성한다. 기도문은 전술한 대로 평소 자기 말투로 쓰되, 한 문장의 단어 수가 많아도 열서너 개가 넘지 않도록 간결하게 쓴다.
2) 세 부를 인쇄해 한 부는 집에, 한 부는 승용차나 주머니에(대중교통 이용 시), 한 부는 일터에 비치한다.
3) 연습은 가능한 한 실제처럼 소리를 내서 연습한다. 연습은 실제처럼, 실제는 연습처럼.
4) 일주일에 70회에서 100회 정도 연습한다.
5) 기도 당일 단상에서 굳이 고개를 숙일 필요 없다. 눈을 감았으니 그저 하나님에게 시선을 맞추고 담담하게 하나님께 말씀드린다.
6) 이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당일 단상에서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회중이 눈에 아른거려 불안하면, 불안감을 극복할 때까지 단에 오르지 않는 게 하나님에 대한 예의다.
7) 교회에서도 주보에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로, 기도문 낭독하는 사람은 "기도문 낭독"으로 진실하게 써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기도문을 낭독하는 사람에게는 기도에 도전하는 동기 부여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