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운영체계 (누가복음 10;21-24)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는 체계가 다른 나라이다.
운영체계가 다른 것이다.
예) 개인용 컴퓨터(PC)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OS로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마이크로소프트 디스크 운영체계
(ms- dos),
윈도, IBM사의 OS/2,
애플사의 맥 OS 등이 있으며,
워크스테이션급으로는 AT&T사가 개발한 유닉스(UNIX),
리눅스(Linux)
부팅이 안 된다.
아예 활용 할 수가 없다.
소프트웨어가 다른 것이 아니다.
전체가 다르다. 신앙을 이해하면서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이유이다.
세상의 운영 체계 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일어났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굉장한 모험이다. 지금 가진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제로
상태에서 받아들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내 안에서 새로운 운영체계가 일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내가 죽어야 한다.
그런데 소프트웨어가 죽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방법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더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난다.
예) 이어령 교수의 고백
나의 글쓰기는 20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문단에서는 문학 평론 으로 시작하여 에세이, 드라마, 소설,
시나리오 올림픽 개폐회식 대본까지 썻지요.
대학 강단 에서는 누구도 잘 읽어주지 않는 기호론 관계의
논문 언론계에서는 신문 칼럼을 수 십년 동안 집필 했고요.
문화부에 취임하여 담화문에서부터 ‘갓 길’ 같은 공공용어까지
그러나 시에 대해서만은 자의든 타의든 성역으로 남겨 두었다.
세례와 시집을 통해서 한꺼번에 나 자신도 모르게 두 성역을
침범하고 만 것이다.
그는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지만 자신의 소프트웨어
에는 아무런 해가 없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분야, 즉 그동안 침범하지 못했던 시학과 신학의 세계도
열렸다는 것이다.
운영체계가 달라지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소프트웨어를
구동할 수 없다. 활용할 수 없다.
새로운 운영체계 안에 들어가면 새롭게 열린다.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는 방법도
우리의 재능을 사용하는 방법도
우리의 상상력을 사용하는 방법도
심판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
우리는 현재를 중요시 한다.
과거에서 현재를 본다.
그러나 심판은 미래의 가치에서 현재를 보는 것이다.
과거에 근거한 현재가 합리적이라면
미래에 근거한 현재는 신비적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징조는 그것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하게 관계에 있다.
하나님이 왕인 나라에 가는 것이다. 그 하나님과 관계있는 ‘
사람들이 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관계로 서는 사람만 가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아버지인가를 증명하라고 하는 것 그것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를 부자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철저하게 신비적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론으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영적 세계를 보는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육적 운영체계로는 구별하기 어렵다.
파송했던 70인이 기뻐한 것은 그런 것이다.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항복 하더이다.”
보이는 일인가요?
아니요!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만 보이는 일입니다.
신출귀몰 하다. 라는 말은 나보다 더 큰 세계를 보는 일에 대한
고백입니다.
귀신의 형상이 떠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형상이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물러가는 것이다.
미화하고 교만하고 병들을 한 근심하고 하며
미워하고 살인하고 거짓을 만드는 일들이 물러가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화답합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이제 영적인 코드가 맞는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이런 영적 코드가 맞아가는 것입니다.
신비의 세계를 보는 이들이 많아지고 그것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 아직도 교회는 이런 영적인 교제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여야 하는가?
이것이 신비입니다.
꿈을 꾸었다.
음성을 들었다.
그 신비함이 정확함이 되어 지게 하게 하기 위해서 영적 지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겪으면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까?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서?
- 교회 안에서 카네기 처세술을 이야기 합니다.
아닙니다. 영적인 운영체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 운영체계를 이해하면 그 너머의 일들을 말하게 됩니다.
더 풍성한 삶을 살려고?
경제 전문가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정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야 합니다.
그리고 더 깊이 가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
심판을 이길 힘이 있음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나의 가치가 현재보다 미래에 더 유용함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아닌 순수한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보고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지혜로운 사람에게 숨기심이 왜 감사할까요?
예) 무엇을 배운 사람의 예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바꾼다.
배운 그대로 한다.
자신의 문화가 되도록 훈련하고 사용한다.
자신의 경험을 포함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운영체계가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운영체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수용한 사람이 다른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순수하게 받고 행하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안과 밖이 같은 사람에게
이런 사람들은 다른 운영체계를 이해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다는 사실을 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듣는 그 눈과 귀가 복이 있다는 말이다.
죄 - 거룩
고난 - 감사
죽음 - 부활
질병 - 온전함
평신도가 깨어야 한다고 했다.
깨어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일까?
행정적으로?
아니다. 영적 운영체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의 회의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72편 -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의 공의를 아들에게
공의로 재판하고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파한며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렇게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꺽으리로다.
시편 101편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