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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행(四川行) 37
“..헉...헉....”
아유타는 뒤로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황금색의 갑옷이 비에 번쩍이고 있었다. 소뇌궁이 날아오기 시작하자마자 뒤로 내뺀 그였다. 말 한 마리 없이 그는 달리고 있었다. 마차를 버리고 내달리는 그의 눈에 저기 오십여 장 앞에 자신의 궁수부대가 도열해 있는 것이 보였다.
저기만 가면....저기만 가면 되었다.
어느덧 오장 근처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그의 궁수부대가 늠름하게 서 있었다.
“어...어서 가서 ...적을 막아라...어서!....”
숨을 헐떡이는 가운데 그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궁수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자신의 앞에서 궁수들이 좌우로 물러서고 있었다. 삽시간에 십여장에 달하는 길이 생겼다. 그 길의 끝에서 한 사내가 검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갑옷상의를 벗고, 두 눈에 살기를 함빡 담은 채...... 쿠파였다.
“!....너...너..배신이냐!...이런 개 같은 놈! 이 자리에 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너를 돌봐줬는데 배신이라니! 배은망덕한 놈! 썩 칼을 내려놓지 못할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아유타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그의 눈에 담긴 살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내 친구 료직은 언제나 날 말렸다.”
쿠파의 입이 열렸다.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였다.
“난 료직에게 항상 말했지...당신은 우리가 모실만한 사람이 아니라
고....”
쿠파의 눈에서 살광이 흘렀다.
“그런 나를 료직이 막았기에 당신이 지금 이 땅에 설 수 있었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척의 장검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헌데 그런 료직이 죽었다......처참한 모습으로......”
어느새 둘의 간격이 삼장으로 줄어들었다. 아유타는 겁에 질려 갔다.
“말해 봐라! 이젠 누가 날 말려 줄 것인지! 당신 스스로 날 말릴 텐가!”
벽력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의 두 눈이 부릅떠져있다.
“그래도 나는 너를 믿고 싶었다. 나만 사라지면 ..... 나만 사라지면 다시 정신 차릴 줄 알았다. ”
쿠파의 오른손이 뒤로 넘겨졌다. 그의 검에 희뿌연 잔상이 서리기 시작했다.
“헌데 ........너만 살겠다고 부하들을 버리고 오다니...”
아유타는 입만 벙긋 거렸다. 공포에 억눌려 목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너를 위해 죽은 료직을 위해서라도..”
그의 오른다리가 크게 앞으로 디뎌졌다. 순식간에 반장의 거리로 좁혀진 간격이었다.
“네놈만은 용서 못한다!~”
그의 오른손에서 빛살이 뻗어 나갔다. 쿠파의 검이 빗줄기를 뚫고 날아간 것이었다.
“커억.........”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허공에 핏줄기가 뿌려졌다. 아유타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르르르륵.......”
피거품을 물면서 아유타는 차가운 진흙에 몸을 박았다. 그의 몸에서 생기가 빠져 나오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쿠파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상관을 죽였다는 사실로 인해 침잠하게 가라 앉아 있었다. 그의 눈에 한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온몸에 피를 흠뻑 묻힌 그의 부관이었다.
“쿠파님...!”
부관은 쿠파앞에 내리자마자 말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었다. 일순 그의 눈길이 아유타 왕에게 돌려졌다. 대강 무슨 일인지 짐작한 그였다. 그의 눈에서 불이 일었다. 그의 입술이 씰룩였다.
“카악...퇘엣!”
입안 가득 가래침을 밷어 아유타의 시체에 뱉었다. 쿠파가 아니면 자신이 죽였을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쿠파를 보았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그의 갑주를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쿠파님!..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다시 저희들을 지휘해 주십시오..이대로 가다간 전멸입니다. 부탁입니다. 쿠파...아니 대왕님!”
피를 토하듯 말하는 부관의 말에 쿠파는 하늘로 얼굴을 들었다. 난감했다....... 신하가 왕을 죽이고 왕에 오른다......패망의 전주곡이었다. 있어서는 안 될 선례였다.
“쿠파..아니 대왕님....저도 부탁드립니다. 제발 저희들 이끌어 주시요!”
“대왕님, 부탁드립니다.!”
“대왕님...”
수많은 음성이 들리며 그의 주위에 있던 일천의 궁병이 무릎을 꿇었다. 쿠파는 고개를 내렸다.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눈이 말위에 매여져 있는 자신의 친우를 향했다.
‘미안하네. 료직..... 이런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네..진심이네..’
‘하하하 이봐 쿠파! 잘된 일이야, 아주 잘된 일이야. 잘해 보게나. 오늘은 저 하늘에서 한잔 거나하게 마셔야겠네. ......쿠파..자네가 자랑스럽네.’
료직의 머리가 금방이라도 들리며 그런 말을 할 것만 같았다. 그는 .......
그런 친우였다. 그의 눈에 뿌연 습막이 서렸다. 쿠파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갑주를 받아 걸쳤다.
“ ..! ......대왕님! 감사 합니다!”
“대왕이라 하지 말고 그냥 쿠파라고 불러라 그게 편하다.”
“....알겠습니다. 쿠파대장님!”
힘차게 대답하며 그는 일어섰다. 그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기고 있었다.
"궁수대! 지금부터 일제히 저쪽 오이랏트의 본진을 향해 궁격을 시작
한다. 화살은 화시(火矢)로 한다. 훅유에 불을 붙여 날리도록....“
“옛 알겠습니다. 쿠파대장님.. 전군 진격세....도열!”
부관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궁사들의 진형이 변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거
대한 활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위력은 소뇌궁에 떨어졌지만 그 사정거리만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긴 활이었다.
쿠파의 생각은 공격이 아니었다. 적의 진영을 흐트러뜨리고 바로 이 전장을 탈출할 생각이었다. 적이 맞든 안 맞든 화살은 날려야 했다.
“부관, 가자!”
“넷...쿠파대장군님!”
두필의 말이 빗속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저기 눈앞에 지옥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오이랏트!....정말 지옥을 보고 싶다면....그렇게 해주마! 지옥을 보여주마!’
그의 눈에서 살광이 줄기줄기 흘렀다. 그의 수하들이 하나 둘씩 쓰러져 가고 있었다.
“으음....”
침음성을 흘리며 청음검성 경세진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싸움이 아니었다. 이미 상대는 없었다. 오로지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고 막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 뿐 이었다.
자신을 비롯한 장로급 인사들이야 이따위 화살쯤은 문제도 없었다. 허나 문제는 다른 무공이 약한 어린 제자들이었다. 속가를 포함한 그들의 제자들이 지금 속절없이 쓰러져 가고 있었다. 그 무엇을 막론하고 생명은 소중하다. 저 오이랏트인들은 자신들을 사람취급도 안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두 눈에서 신광이 줄기줄기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필의 말이 그의 눈앞, 십여 장 부근에 달려와 멈추고 있었다.
“나는 서장군의 총대장 쿠파다! 철갑병들은 나의 말을 들으라 지금 즉
시 내 옆에 양쪽으로 도열하라! 무기는 필요 없다. 그냥 몸에 갑주만 입은 상태에서 당장 이쪽으로 오라!”
쏟아지는 화살비에도 아랑곳없이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외치는 그였다.
이어 근 오백여명의 철갑병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기는 버리든지, 아니며 검집에 꽂아 넣은 상태였다. 순식간에 그의 좌우로 긴 줄이 형성되었다.
“장창병들과 중원인들은 들으라!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한 짓이다.
내말에 동의를 한다면 무기를 거두고 이쪽으로 오라! 우리 철갑병의 몸에 바짝 붙어 좌우로 달려 이 전장을 빠져 나가라! 시간이 없다! 어서 움직여라!”
“ ! ”
벽력같은 외침이었다. 은은히 내공도 실은 목소리였다. 경세진인은 뒷머리에 일격을 당한 느낌이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헛된 싸움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경계의 눈으로 무림인들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청성의 제자들은 나의 말을 듣거라! 어서 저 인의 장막을 타고 이 전장을 빠져 나가라! 어서!”
다급한 그의 외침이 들렸다. 그와 함께 청성의 제자들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고 있었다. 쭈볏거리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서장군은 왼쪽, 무림인은 오른쪽으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커억!”
“조금만 버텨라! 곧 우리도 빠져 나간다. 으윽!”
갑주를 입고 있다고 해서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정통으로 맞는다면 갑주도 소용이 없었다. 그대로 관통시키는 소뇌궁이었다.
벌써 이곳 저곳 진형이 뚫리기 시작했다. 쿠파의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소뇌궁이 이렇게 위력이 강할 줄은 몰랐던 그였다. 문득 그이 삼장 옆에서 한 철 갑병이 쓰러졌다. 등에 정확히 꽂혀 있는 소뇌가 보였다.
“타아아아압!”
어디선가 기합소리가 들리며 철갑병이 쓰러진 곳을 막아서고 있었다. 청수
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청성의 장문인 청음검성 경세진인이었다. 그의 일장에 화살들이 힘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각파의 고수께서는 지금 이 대열을 지켜주시길 바라오.....청성의 장문인으로써 부탁하는 바이오”
내공을 가득 실은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그와 함께 상당한 수의 무림인들이 구멍을 메우기 시작했다. 아니... 아예 철갑군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앞에서 장력을 날리며 막아 내고 있었다.
쿠파는 그 노인을 바라보았다. 청성의 장문인이라 했다. 과연 일파의 지존다웠다. 그의 고개가 힘차게 끄덕였다. 그때였다.
“씨시시시싱..싱.시시시시시싱”
귓가를 간질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하늘 가득 붉은 화시가 수놓고 있었다. 자신의 궁수부대가 공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와 함께 적의 화살이 현저 하게 줄었다. 지금이었다.
“철갑군은 전력으로 빠져 나가라! 지금이다. 어서 나가라!”
그의 일갈이 터졌다. 그와 함께 철갑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파의 고수들께서는 조금만 더 계셔 주시오....이들이 완전히 벗어날 때 까지 전력을 다해 주시오!”
몸을 움직이던 쿠파는 신형을 멈추었다. 그는 돌아섰다. 승,도,속의 무림인들이 힘겹게 막아 내고 있었다. 그는 소리를 친 노인은 바라보았다. 정중한 자세로 그의 허리가 조용히 숙여졌다.
‘감사하오.....잊지 않겠소....청성!....’
그가 허리를 폈다. 신형을 돌려 전장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전열을 정비하고 저 야비한 오이랏트를 박살내야 했다. 허나 그전에 할일은 해야 했다. 자신들이 빠져나간 후 남아있는 중원인들이 완전히 빠져 나갈 때까지 화시는 쉼 없이 날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게 최소한 인간의 도리일 것이었다.
“이...이런 멍청한 경우가!...”
부르라칸은 온몸을 떨었다. 공주는커녕 잘못하면 당하게 생긴 것이었다.
처음엔 모든 것이 잘 되었다. 헌데, 이상한 시커먼 놈이 나타나고부터 되는 일이 없었다.
혈귀.... 혈귀라고 했다. 그는 잘 몰랐다, 허나 대단한 놈임에는 틀림없었다. 십여 장이 넘어 보이는 단단한 망루를 저리 박살내는 것을 보면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 그의 눈에 이번엔 서로 피터지게 싸우다 힘을 합치는 놈들이 보였다. 어이가 없었다. 전쟁은 이유가 없다. 살육도 이유가 없었다. 살인의 충동이 가장 빠져 들기 쉬운 곳이 전장이었다. 그런 전장에서도 저렇게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치켜떴다. 화가 있는 대로 뻗쳐올랐다.
허나 그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모든 사람은 전사가 아니었다. 살인의 충동이 강하게 흐르는 곳은 전장이라는 말은 맞지만 가장 적나라하게 살고 싶은 인간의 군상을 그려내는 것도 전장이었다. 너무 한쪽으로 몰았던 것이었다. 그저 망루에서 저들을 떨어뜨려 놓기만 해도 성공할 작전이었던 것이었다.
“씨이잉...... 씨시시시시싱”
“뭐...또 뭐야 이건!”
신경질 적으로 말을 내 뱉는 그의 눈에 하늘 가득 불화살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상당한 사정거리였다. 쏘는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았다. 허나 무서워 할 것은 없었다. 빗속이기에 이렇게 큰 포물선을 그리는 화살들은 별로 두려워 할 것이 없었다. 대부분 여기 까지 오지도 못할 것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사정거리가 줄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궁사는 늘상 해오던 대로 쏠 것이고...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저 불화살...화살 끝에 달린 붉은 화염이 두려움을 주고 있었다. 뻔히 안 맞을 줄 알면서도 움찔거리는 병사들이 그의 눈 가득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동요가 시작되었다.
“이 머저리 같은 놈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나! 쏴라, 쏴! 저 화살은 신경 쓰지 말란 말이닷!”
부르라칸의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목에 핏대가 올려졌다, 하지만 이미 통제력을 잃어가는 그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