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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안전,확신,기도 조지커팅저
세 가지 대열
인생은 여행하고 있는 나그네입니다.
과거라는 역에서 출발하여, 현재를 거쳐, 영원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이라는 종착역에 이르게 될 순간이 얼마나 가까워 졌는지는 그 누구도 모릅니다.
인생이 나그네라면 당신은 아래에 열거하는 세 대열 중, 한 대열에 속하여 여행하고 계실 것입니다.
․제1대열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
․제2대열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구원받고 싶어 고민하고 있는 사람.
․제3대열 -구원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과연 당신은 어느 대열에 속하여 여행하고 계신지요? 이것은 창조주이시며 결국에는 우리를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 사는 우리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중대한 문제입니다. 또한 이것은 당신의 생명에 환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도외시한다면 그건 너무나 비참한 일입니다.
․관심이 없는 분을 위해 -제3대열
어떤 사람이 막 떠나려는 기차에 헐레벌떡 뛰어와서 가까스로 올라탔습니다. 아직도 숨이 가빠 헐떡이며 땀을 씻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놓치실 뻔 하셨는데 ... 잘 뛰셨군요."
"네! 그렇구 말구요. 이 열차를 타지 못했더라면 4시간이나 무료하게 기다려야 했을테니까요"
4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그처럼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진대, 하물며 영원을 위해서라면 최선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 인류는 현세에서의 행복과 이(利)를 위해서라면 장기적으로 계획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앞에 놓인 영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역사가 분명히 증거해 주고 있는 사실에도 아랑곳없이, 죽은 다음에 있게 될 심판을 무시한 채, 마침내 큰 구렁 저편에 있는 지옥에서 발버둥치게 될 몸서리치는 불행을 도외시한 채, 인류는 이제 불행의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으며, 하나님도, 죽음도, 심판도, 하늘나라도, 지옥도 없는 양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우심으로 자칫하면 헤어날 수 없는 영원한 불행의 문턱에 서 있는 당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이 사실들 믿든지 혹은 믿지 않든지 간에 이상 말씀드린 것이 바로 당신의 운명이요, 모습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영원의 문제에 대하여 외면하지 마십시오, 미루는 것은 당신 자신에 대한 도둑과 같고, 살인자와도 같습니다.
"하루 미루는 일이 열흘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양 속담에 "미루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도 간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이 영원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미루고 계시다면 당신은 영원토록 후회하게 되실런지도 모릅니다.
"차후에 라는 길은 영원이라는 마을로 인도한다"는 스페인 격언이 있습니다. 더 이상 거리를 배회하거나 방황하는 사람처럼 영원의 문제에 대하여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2).
이렇게 말씀 드릴 때 어떤 분은 "천만에요, 저는 결코 제 영혼에 관해 무관심하거나 내버려두고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다만 제 마음이 구원을 확신할 수 없을 뿐이지요"라고 말씀하시면서 반박을 느끼실런지도 모릅니다. 그러시다면 당신은 제2대열에 끼어 여행하고 계심에 틀림없습니다.
․확신할 수 없다는 분을 위해 -제 2 대열
확신할 수 없다는 것도 앞서 말씀드린 관심이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불신(不信)에서 나온 것입니다. 불신으로 말미암아 영원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죄와 타락에 빠졌습니다. 또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섭리를 불신하는데서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므로 무관심과 불확신은 본래 불신을 모체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얻고자 갈망하는 당신을 위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당신이 이 문제로 얼마나 고민하고 계시는지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아울러 당신이 이처럼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보다 진지하고 더욱 관심을 쏟는 만큼 오히려 당신은 구원얻은 것을 확신하기까지 불안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가복음 8:36).
인자한 아버지의 외아들이 항해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들이 탄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선가 그 아들은 구조를 받아서 건재하다는 믿을 만한 소식을 듣기까지는 그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 답답하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객지에서 겪으셨을런지도 모르겠지만, 바람은 사납게 불어오고 주위는 한가닥 불빛도 찾아볼 수 없는 깊은 밤인데 어디고 가야 할런지 길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갈랫길에서 발을 통통 구르고 있을 때에 마침 길손이 지나가고 있어 길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글세요, 저 길로 가시면 맞을 상 싶습니다만 저도 초행이라서 확실히는 모르는걸요, 부디 길을 잃지 않게 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면 당신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겠습니까? 어두운 밤, 초행에 향방을 모르고 간다는 것은 점점 당신에게 불안과 초조를 더해 줄 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에 대해 염려하고 초조한 나머지 침식을 잊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은 결코 이상스러울 것이 없으며, 오히려 우리의 영혼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재물을 잃게 되는 것은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건강을 잃게 된다는 것은 더욱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잃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확신을 얻기를 원하시는 분에게 - 제1대열
이제 당신에게 구원의 확신을 얻는데 도움이 될만한 세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사도행전 16:17).
둘째, 구원에 관한 지식(누가복음 1:77).
셋째, 구원을 통한 기쁨(시편 51:12).
위의 말씀드린 세 가지 사실이 상호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은 사실이면서도 동시에 각각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개중에는 자신이 구원의 확신은 없지만 구원의 도리는 잘 알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구원의 확신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에 따라야 할 기쁨이 없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성경을 펴서 출애굽기 13장 13절의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봅시다.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 중 모든 장자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저와 함께 삼천여년 전에 있었던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하나님의 제사장과 어느 가난하기 짝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화가 그들 곁에 떨면서 서 있는 어린 나귀에 관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스라엘 사람은 "사정 말씀을 드리려고 왔는데요, 제사장님. 제발 이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실 수 없을까요? 이 약하고 어린 것이 제 첫 나귀새끼 입니다. 저도 율법에서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하신 말씀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대속할 만한 어린양이 없는데, 어떻게 제 나귀의 생명을 살려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제발 부탁입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나귀 새끼 한 마리 뿐인데, 이것마저 잃어버릴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픔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딱 잘라 말합니다.
"사정은 딱하지만 안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물론 대속할 어린양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 양이 죽든지 아니면 나귀의 목을 꺾든지, 다른 방도란 없지 않습니까!"
"이젠 다 틀렸군요, 마지막 한가닥의 기대마저 사라져버렸어요."
그 때 옆에서 이 딱한 사정을 듣고 서 있던 친구가 "아무 염려하지 말게나. 내가 해결해 보겠네. 언덕 너머 우리 집에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양이 한 마리 있는데 이제껏 제멋대로 집을 나가서 길을 잃은 적이 없는 양이어서 아주 귀염을 독차지하고 있다네. 내, 부지런히 가서 그 양을 끌고 올테니 잠시 기다려 주게나."
마침내 나귀를 대신하여 점 없고 흠 없는 양의 피가 단 아래 뿌려지고 양의 몸은 불살라졌습니다.
비로소 제사장은 가난한 사람에게 "이젠 그 나귀를 데리고 평안히 돌아가시오. 목을 꺾지 않아도 되었으니 참 기쁘겠소. 양이
대신 죽었으니 나귀는 털끝만큼도 다칠 필요가 없소. 당신의 친구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시군요".
이상 말씀드린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게 되는 경륜을 깨닫게 됩니다.
제사장이 나귀의 목을 꺾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듯이 당신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은 당신의 범죄한 머리를 꺾을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 죽음을 피 할 수 있는 길은 가난한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 그의 친구가 예비해 주었던 양처럼 대속 제물이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당신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어린 양, 독생자를 통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 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29) .
세례 요한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외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갈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의로운 분이셨지만, 불의한 자를 대신하셔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베드로전서 3:18). 과연 주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주신 바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로마서 4:25).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경건치 않은 자들을 의롭다고 따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하심으로 공의와 거룩을 나타내시게 됩니다(로마서 3:26).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구주를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믿습니까?
"예! 저는 사형선고를 받은 가련한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고 의지할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해 주셨음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이제 저는 주님을 확실히 믿습니다".
당신이 마음 중심에서 이처럼 고백하신다면, 주님께서 이미 당신을 위한 희생물이 되어 죽으셨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위한 그리스도의 제물을 받아 주셨으므로 당신의 죄 값은 완전히 청산되었으며, 확실히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이한 구원의 섭리입니까!
또한 이 구원의 섭리야말로 얼마나 위대합니까!
과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며,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보배로우신 영광의 독생자로 벌레 같은 인생, 구더기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다니!
이 얼마나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신 주님이십니까! 사랑하는 독생자로 하여금, 찬양을 받아 마땅한 이 모든 구속 사업을 이루게 하심으로 불쌍하고 가련한 나 같은 죄인이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축복을 누리게 해 주시고, 영영 주와 함께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찬양, 찬양, 찬양을 드립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시편 34:3).
그렇지만 당신은 아직도 의문이 사라지지 않은 채 "물론 저는 자신의 행실이니 능력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공로만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구원의 확신이 없으니 어찌된 일일까요? 한 때는 구원받았다고 장담을 할 것 같다가도 얼마 못가서 모든 소망이 사라져 버리는 데는 아주 미칠 지경입니다. 마치 제 마음은 폭풍 속에서 닻을 내리지 못한 채 파도따라 출렁이는 배와도 같은데 어찌해야 좋을까요?"라고 반문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당신의 착각을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닻을 배 안 어느 구석에 붙들어 매어 놓고 배가 안정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도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닻은 배의 밖에 든든한 곳을 골나 매는 것이 상식이 아니겠습니까?
분명히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달려 있는 것이며. 당신의 기분(감정)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하루에도 수십 번 , 수백 번 변덕을 부리는 느낌, 감정, 기분으로 확신을 얻으려고 하니, 이만 저만 착각이 아닙니다.
구원에 관한 지식
그렇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이 어떻게 영생을 얻었다(구원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5장 13절의 말씀을 먼저 조금 바꾸어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기쁜 느낌(감정)을 준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위 글과 아래 기록된 본문을 대조시켜서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유월절 밤, 곧 애굽에 재앙을 쏟으시던 그 밤에 수 천의 이스라엘 장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생명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출애굽기 12장 참조) 그들 중 두 가정만 찾아가서 그들과 이 야기를 나눠 봅시다.
우리가 방문했던 첫째 집에서는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불안해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집 장남이 우리에게 귀띰을 해 줍니다. "죽음의 천사가 과연 우리 집을 그냥 넘어 갈지 아니면, 우리 집에도 찾아올지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 순간이기에 우리는 안절부절하고 있습니다. 요행히도 죽음의 천사가 우리 집을 지나쳐 가버리고 이 밤이 밝아 온다면야 제가 안심할 수 있지만, 그 때까지 장담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옆집 친구는 확신한다고 장담하고 있지만 외람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쨌든 이 지루한 밤이 지나봐야 알 일이지요".
"그렇지만, 당신들이 믿고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 지 않았던가요?"
"물론 가르쳐 주셨지요. 그래서 하나님에서 말씀하신 대로 점도 흠도 없는 1년된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랐답니다. 그렇지만 누가 알아요? 만에 하나라도 재앙을 만나게 된다면 어쩌겠어요?"
이제 우리는 그가 말하던 친구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그들은 첫째 집의 침울하고 불안한 분위기와는 딴판이었습니다. 그들은 허리에 띠를 띠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서서 구운 어린양의 고기를 먹으면서 기쁨에 넘쳐 있었습니다.
"아니 어찌된 일이요. 죽음의 천사가 다니고 있는 이 밤에 모두들 이처럼 즐거워하고 계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어찌 기쁘지 않겠어요? 이제 날이 밝아오고 여호와께서 떠나라고 명령만 하신다면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종살이에서 풀려나게 되고 육신적 고역과 채찍에서 벗어나게 될 텐데."
"그렇지만 이 밤이 가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오늘 밤이야말로 애굽 전국을 휩쓰는 심판의 밤이 아닙니까?"
"물론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
큰 아이는 아주 안전하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신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뿌렸거든요."
"그렇지만 ... 바로 옆집 사람도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불안해하던데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그 피를 볼 때 넘어가리라"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해 주셨기에 안심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리가 없지 않아요?"
이제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두 집중에서 어느 집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뻐하고 있는 두번째 집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두 집 모두 안전합니다. 그들이 집안에서 어떻게 느끼고 있던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뿌려진 피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실로 당신이 구원을 확신하려고 하신다면, 하루에도 수 십, 수 백 번도 더 변하는 감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만고불변의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복음 6:47).
뿌려진 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흘려주신 보혈 외에는 우리를 멸망의 심판에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실 수 없으며,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 외에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다른 어떠한 것이 없음을 명심하십시오.
한 농부가 농토를 빌리려고 물색하던 차에 자기 집 근처에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농장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지주에게 부탁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왜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지주에게서는 아무런 회답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웃 사람이 찾아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마 저 농장은 지주가 당신에게 사용하도록 허락해 줄 것 같아요. 작년 크리tm마스 때만 해도 당신에게 선물을 푸짐하게 보내왔고, 지난 번 그분이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당신을 보고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인사해 주지 않았어요?"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농부의 마음은 희망에 부풀어 올랐고 뛸듯이 기뻤습니다.
그 다음날 이 농부는 다른 이웃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이웃사람이 말했습니다.
"아직도 농장 사용 승락을 못하셨다지요? 실은 지주와 친한 사람이 그 농장을 부탁했다는데 요즈음 그 사람은 문턱이 닳도록 지주의 집을 드나든다던데요. 모르긴해도 금년에 당신이 그 농장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요?"
이 야기를 듣는 순간 농부는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 것만 같아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한 때 희망으로 부풀었던 가승이 이제는 절망으로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불안한 가운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우체부가 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지주에게서 온 편지였기에 얼른 펴서 읽어 내려갔습니다. 몇 줄을 읽어 내려가는 농부의 얼굴에는 미소가 넘쳤습니다. 농부는 환호성을 올리며 아내를 불렀습니다.
"여보, 이젠 됐어! 이제는 안심해도 돼. 이 편지를 보라구! 이제는 누가 뭐래도 상관이 없어.
지주의 말 한 마디면 대법원 판결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수많은 영혼들이 가련하게도 이 농부와 같이 불안해하며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의견이나 부질없는 생각으로 당황하고 초조해 하는 것입니다 의혹과 초조를 물리치고 확신가운데서 기쁨을 누리게 되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과연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불신자에게 멸망을 경고하신 말씀이든, 성도들에게 구원을 약속해 주시는 말씀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만고불변하는 확실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5절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고, 시편 119편 89절에는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다"고 말씀하셨으며, 민수기 23장 19절에는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하나님께서 보증해 주고 계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단 하나의 열쇠입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믿는 것 외에는 어떤 이론이나 핑계나 주장이라도 쓸 데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래도 당신은 "그렇지만 제가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확증할 수가 있어야지요"라고 반문하실런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저도 당신에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올바르신 분,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믿고 의지하십니까?"올바른 믿음이란 얼마나 잘 믿고 있는가 하는 분량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연 믿을 만한 분을 믿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의지하며, 어떤 사람은 옷깃만을 만져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단순하고 위대한 믿음으로 의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둘 중에 어느 누가 보다 안전하거나 불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한가지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우리가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고 얼마나 열심으로 믿고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은 쓸모 없는 죄인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공로로만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사실을 말씀에 따라 신뢰하는 그것이 곧 믿음이요 구원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 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복음 6:47) .
당신이 선행이나 종교적인 의식을 잘 지켰다거나 경건해졌다는 느낌이나,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려서부터 훌륭하게 교육을 받았다는 것으로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일로 인하여 그릇된 확신을 갖고 계실지라도 마침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연약하기 짝이 없을지라도 이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이상 말씀드린 것들이 자신을 구원해 주리라 확실히 믿으신다 해도 착각이요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17)고 증거하셨습니다. 실로 나 자신은 전혀 믿을 수 없을지라도 주님만은 믿고 의지하기에 마땅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당신은 울상이 되어 "저는 확실히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구원받았느냐고 물어 올 때에는 딱 질색이거든요. 내 말이 거짓말이 될까봐 걱정이 돼서 아예 침묵을 지켜 버리곤 해요"라고 말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시다면 다음 이야기를 잘 들어보십시오.
목장을 경영하는 어떤 사람이 몇 마리의 양을 사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아빠, 몇 마리나 사오셨는지요?"하고 묻는 딸에게 "열 마리"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이웃 사람이 "아빠가 양을 몇 마리 사오셨니?"하고 물었을 때 "글쎄요. 아빠가 말씀해 주셨지만 거짓말이 될까봐 말씀드리고 싶지 않은데요"라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이야말로 아빠를 거짓말장이로 취급해 버리는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아직 당신은 이 비유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복음 6:47)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긴 하지만 거짓말이 될까봐 두려워 구원받았다고 말하기를 꺼린다고 한다면 아버지를 거짓말장이 취급을 했던 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를 거짓말장이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저는 믿어 보려고 무던히 노력을 해 왔지만 모두가 허사였어요. 나 자신을 들여다 볼수록 확신은 고사하고 내가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내가 믿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을까요?"
친구여! 장신이 믿으려고 무던히 노력해 왔다는 말을 듣고 보니, 당신은 믿음을 얻기 위해서 방향을 잘못 잡으셨고 길을 잘못 택하셨습니다.
어느 날 저녁 당신이 집에서 조용히 쉬고 있는데 이운 사람이 찾아와서 역장이 철도사고로 죽었다고 말했다 합시다. 그런데 지금 찾아와 일러준 그 사람은 인근에 소문이 자자할 만큼 거짓말장이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사람의 말을 믿으실 리가 만무하지요?
어리석게도 제가 "왜 믿을 수 없느냐?"고 반문한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처지인 걸요. 누가 그런 사기꾼의 말을 믿어 줍니까?"라고 대답하시겠지요.
이로 보건대 당신의 기분이나 감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해 준 사람의 됨됨이를 보아서 믿을 수 있는가 없는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역장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장이의 뜬소문으로 단정하고 있는 참인데 친구가 찾아와서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다녀간 사람은 다정한 친구였습니다. 그가 가버린 후에 "글쎄 내가 어려서부터 알고 있는 처지이지만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는 한두번 밖에는 거짓말한 적이 없었지. 그렇다면 믿어 줄만도 한데"라고 중얼거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이번에도 당신의 기분이나 감정은 전혀 상관없이 낄게 말해준 사람의 됨됨이를 보아서 판단을 내리 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 막역한 친구가 찾아와서 동일한 사실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자네 말이라면 여부가 있겠나? 딱하게도 역장이 교통사고에 회생을 당했군"하고 말했다 칩시다. "당신은 어떻게 그 친구의 말을 고스란히 믿을 수가 있으십니까?"하고 묻는다면 "그야 그 친구와의 사이에는 흉금을 털어놓고 지내는 터인데 피차 이제껏 거짓말을 한다거나 속인 일이 없거든요"라고 대답하시겠지요. 결국 당신은 사고 현장을 보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마음속에 그럴듯하게 보여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의심치 않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는데 어찌 못믿을 것으로 여기십니까?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십니다"(로마서 3:4).
"만일 우리가 사람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셨음이라"(요한일서 5:9,10).
아브라함은 사람의 증거보다 믿을만한 하나님의 증거를 받았을 때, 하나님의 증거를 믿음으로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습니다(로마서 4:3).
언젠가 구원의 확신을 갈망하는 한 부인이 전도인에게 찾아와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도무지 믿어지질 않으니 어쩌면 좋죠?"하고 호소했습니다. 그때 상담을 하고 있던 전도인은 조용하고도 슬기롭게 반문했습니다. "그래요? 아주머니께서 믿을 수 없다는 그 분이 누구시지요?" 그때에야 비로서 이 부인은 자신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 나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님과 십자가의 공로를 바라보고 믿는 대신, 그리고 이에 대하여 증거해 주시는 성경말씀을 의지하는 대신, 자꾸만 자기 자신이 무언가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기 속에서 증거를 찾고자 했던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태양을 바라보면 그림자는 등지게 되는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심령에 불안이 사라지고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하늘나라에 계신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볼 수는 없습니다.
오직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볼 때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 완성해 주신 구속사역을 통하여 이미 나를 영원토록 안전하게 해주셨으며,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을 믿는 자에게 영원토록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통하여 완성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완성해 주신 구원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구원을 통한 기쁨
"제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추호도 의심이 없어요. 그렇지만 구원받기 전이나 다름없이 낙심하고 답답해 할 때가 자주 있거든요. 위안이나 기쁨을 송두리째 잃게 될 때도 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군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위안과 기쁨은 주님을 믿는 성도의 심령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유지할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육신이라 불리우는 옛 성품이 여 전히 남아 있는데, 옛 성품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악한 성품을 가리킵니다. 육신이라 불리우는 옛 성품은 어머니의 무릎에서 젖을 빨고 있는 어린아이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성도의 심령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육체의 소욕을 대항하시기 때문에 언행심사에 있어서 육신적인 모든 일은 성령님을 근심케 합니다. 주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시는 대로 행할 때 성령님께서는 성도의 심령에서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의 말씀대로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반대로 성도가 육체의 소욕대로 행하게 되면 성령님을 근심케 해 드리게 되며, 성령님의 열매도 별로 맺히니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사역과 당신의 구원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당신의 행위와 기쁨 역시 불가분의 관계임을 명심하십시오.
천만부당한 가상이지만, 그리스도의 공로가 무효한다면 당신의 구원도 무효화될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당신의 행위가 그릇될 때에 당신의 기쁨은 사라질 것입니다. 물론 전자는 어디까지나 가상에 불과하지만, 후자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같은 체험을 했던 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돼 있습니다.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했다"는 사도행전 9장 31절의 기록과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는 사도행전 13장 52절의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구원받은 후에 심령에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당신의 순종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하셨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구원의 확신과 기쁨이 전연 별개의 사실임에도 마치 하나인양 혼동하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제멋대로 하며 절제하지 못하고 세속적으로 살게 될 때에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게 되고 자신도 기쁨을 잃게 되는데 이를 구원의 확신과 관련시켜 생각하셨기 때문에 확신마저 흔들렸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당신의 구원은 당신을 위하여 이미 이루어 주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달려 있는 것으로 전혀 안전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성경을 통하여 당신에게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는 것으로 절대 불변합니다.
당신의 기름은 언행 심사간 주께서 합당히 여기시는대로 행함으로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지 않는데 달려 있기에 이것만은 당신의 책임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릴 일을 저질렀을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정상적으로 교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어진 부자간의 관계가 무효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드린대로 부자간에 틈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교제의 기쁨을 회복하고 불화를 해소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자신을 살펴보고 죄를 자백하는 것뿐입니다.
당신의 자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럴 때 당신은 자녀의 언행과 표정에서 이 사실을 역력히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리광을 부리며 태연자약하던 아이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서려 있고 행동이 어색하며 자꾸만 낮을 피하려 할 것입니다. 이제 이 아이가 해야할 일은 부모님께 솔직하게 잘못을 자백하여 용서를 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쉽사리 자백하지 않은 채 울며 버틴다고 부자간의 관계가 회복될 리가 만무합니다. 오직 부모님께 자백하면 용서해 주시리라는 확신으로 겸손하게 자백해야 할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순간부터 자백사고 용서를 받기까지 이 아이에게는 기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순간에 모든 기쁨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이는 잘못을 저질름으로 더 이상 교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자관계마저 끊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자관계는 출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자간의 교제가 어린아이의 행실로 인하여 중단된 것뿐입니다.
이 아이가 뉘우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자초지종을 부모님께 자백할 때에, 용서해 주고 달래주며 위로해 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때에야 비로소 이 아이는 다시금 부모와 스스럼 없는 교제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그의 중신이었던 우리아의 아내로 더불어 중죄를 범했을 때 "주의 구원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했던 사실은 이 진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시편 51:12).
앞서 말씀드렸던 예화에서, 당신의 아들이 시무룩해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불이야"하는 소리가 났다고 합시다. 그럴 때에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불에 타 죽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 당신은 그 아이를 제일 먼저 데리고 뛰쳐나갈 것입니다.
혈연 관계를 통한 사랑과 교제가 주는 기쁨은 이처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범죄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원만한 영적 교제가 중단되고, 자백하기까지, 즉 자신을 반성하고 통회할 때까지는 결코 구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통회와 자백이 있었다면 죄사함을 받게 될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요한일서 1:9)고 확실히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맺어진 생명의 관계보다 더 강한 것도 없으며, 더 아름다운 것도 없습니다. 온 세상과 지옥의 세력이 힘을 합쳐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로마서 8:38, 39).
그렇지만 불순종의 생활은 쉽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어 놓으며, 당신의 기쁨을 앗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잠시 동안이라도 심령이 답답하여 고민하고 계신다면, 주님 앞에 마음을 낮추시고 자신을 반성해 보십시오. 당신에게서 기쁨을 앗아간 도둑을 발견했을 때에는 즉시 빛 가운데 드러내십시오. 다시 말씀드려서 왜 내가 기쁨을 잃게 되었는가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 당신의 죄를 자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도둑이 들어와서 노략질하도록 부주의하고 나태했던 자신을 깊이 뉘우치기 바랍니다. 결코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즐거움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성도라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불신자보다 다소 관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나 불신자를 불문하고 죄에 대하여 절대 공평하게 다루십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죄는 낱낱이 하나님 앞에 드러났고,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을 때 이미 그 죄값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신자들의 죄의 문제는 단번에, 그리고 영원토록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베드로전서 2:24).
"오직 그리스도는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브리 서 10:12, 17, 18).
주 예수님을 끝내 믿지 아니 한 사람은 죄 의 댓가로 영원토록 불못에서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구원얻은 사람이 다시금 죄의 댓가로 지옥 형벌을 당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성 령님을 근심케 할 때 교제는 끊어지거나 원만하지 못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달밤에 한 친구가 연못에 비친 달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고요찬 연못에는 눈부실 듯 빛나는 은빛 보름달이 찬란하게 비쳤습니다. 그런데 다른 친구가 느닷없이 돌멩이를 연못에 던졌습니다. 쟁반같은 보름달은 순식간에 일그러져 버렸습니다.
"달이 산산조각 나버렸군! "
중얼거리는 친구에게 한 친구가 응수했습니다. "달이 깨어지다니! 무슨 소릴 하고 있나.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나. 달의 모습은 조금도 변한 것이 아닐세. 변했다면 연못 속에 비쳤던 달의 모습에 불과하지 안그런가?"
과연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의 마음은 이 연못과도 같습니다. 아무런 장애물이 없으면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위로와 기쁨과 평안을 당신의 심령에 비쳐 주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근심케 할 때에는 순간, 평안과 기쁨은 사라지고 내 마음은 돌멩이가 날아든 연못처럼 어지럽게 흔들리게 됩니다.
다시금 당신이 통회하는 심령으로 죄를 자백하실 때에야 비로소 평화롭고 즐거운 교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평안과 불안이 교차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도 연못에 비친 달과 같이 수시로 변하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공로가 변하지 않는 한 당신의 구원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당신의 심령과 심령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이 변했을 뿐입니다. 당신의 심령이 그리스도의 영광과, 주님께서 합당히 여기실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고 죄의 소욕으로 채워져 있다면 성령님께서는 근심하시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정죄하시고 대적하시는 죄악에 대하여 당신도 한가지로 정죄하고 대적하지 않는 한 당신은 위로와 기쁨을 체험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에베소서 4:30)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순종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사랑하는 독자여 !
(1) 당신의 믿음이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당신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신 주님께서는 결코 변치 아니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고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니라"(히브리서 13:8).
(2)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공로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나이다"(전도서 3:14).
(3)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베드로전서 1:24,25).
당신의 구원과 확신의 터가 되시는 주 예수님께서 결코 변치 아니하시기에 당신의 구원은 안전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주 식는 나의 사랑, 조수같은 나의 기쁨
변치않는 주의 사랑, 변치않는 주의 약속
나는 항상 변하여도 주는 항상 동일하네.
사랑없는 나의 맘에 주의 사랑 내 안식처
진실없는 나의 맘에 주의 진리 날 붙드네.
이제 끝으로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당신은 어느 대열에 서서 여행을 하고 계십니까? 이제 진정 하나님께로 돌이키심으로 이 영원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요한복음 3:33) .
이 글을 읽으시는 가운데 당신도 이제부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구원의 확신 가운데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시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