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 하나 달랑 차고
김형진
시방 나는 팬티 하나 달랑 차고 컴퓨터 앞에 앉아 진땀을 줄줄 흘리고 있다. 목덜미는 물론이고 등줄기에서도 땀이 줄줄 흐른다. 시력을 모아 자판을 내려다보지만 문자가 둘로 보이기도 하고 흐릿하기도 하여 쉬 알아볼 수가 없다. 아래 속눈썹에 땀이 괸 모양이다. 그래도 손가락을 자판에서 뗄 수는 없다. 마감에 임박한 글을 탈고해야 한다는 강박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어서다.
글이 그런 대로 풀릴 때는 목덜미에도, 등줄기에도, 눈썹에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는데 글이 막히니 온몸이 끈적끈적하고 머릿속도 난마亂痲가 된다. 하는 일 없이 자판 위에 머물러 있는 손가락도 후줄근한 느낌이다.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한다. 활짝 열려 있는 미닫이문 앞에 서서 혹시 불어올는지도 모르는 시원한 바람을 바라지만 역시 무풍지대다. 벽에 걸린 온도계는 섭씨 37도. 바람을 기다리는 가슴 속에도 땀방울이 맺힌다.
달랑 하나 차고 있는 팬티마저 벗어버리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들고 수도꼭지를 튼다. 찬물인데도 미지근하다. 냉수 쪽으로 꼭지를 더 세게 트니 찬물이 쏟아진다. 샤워기를 머리 위에 대고 물을 맞는다. 피부가 놀라 움찔한다. 물줄기가 몸을 뒤덮자 찬 기운이 피부 안에 침투한다. 등에 한참, 가슴에 한참, 팔과 겨드랑이에도, 엉덩이와 허벅지에도 물을 맞는다. 시원하다. 한참 동안 몸을 식히고 물방울이 뚝뚝 듣는 몸으로 욕실에서 나온다.
차가워진 몸으로 섭씨 37도를 넘나드는기온 속에 드니 청랭한 가을바람을 맞는 듯 기분이 상쾌하다. 알몸으로 거실 바닥에 드러눕는다. 폭염속에서 맛보는 이상쾌함, 상쾌한 기분에 온전히 사로잡히기 위해 눈을 감는다.
지난번 하계올림픽이 열린 나라의 해변에서 벌어졌다는 나체 올림픽이 떠오른다. 해변 사장에서 각 나라에서 모인 남녀들이 알몸으로 줄다리기와 비치발리볼 등 경기를 했다는 기사가 떠오른 것이다. 문명을 거부하고 원시를 동경하는 것이 히피족들만은 아닌 모양이다. 관객들마저 팬티 하나만 입어도 입장 불가였다니 그 광경을 상상만 해도 오장이 시려온다.
그러나 그 상상은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한다. 몸의 물기가 차츰 가시면서 내가 알몸이라는 의식이 들기 시작하자 갑자기 부끄러움이 다가선다. 보는 눈이 없다고는 하지만 벌거벗은 내가 부끄럽다. 아무래도 내 용기에는 한계가 있는가 보다. 박차고 나가지도 안주하지도 못하는 반편일시 분명하다.
기억 속의 장면들을 이리저리 뒤적여 봐도 방 안에서 웃통 벗은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삼복염천에도 등등거리를 넣는 것이 일상이었고,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는 어머니께 부탁하여 물 적신 무명수건으로 등과 가슴을 닦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들일 끝에 땀범벅이 되어 다른 이들이 훌훌 멋고 근처 방죽에 뛰어들어 멱을 감을 때에도 겨우 손발만 씻고 집에 돌아와 등물을 했다. 그럴 때에도 어머니가 내어주는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야 방에 들곤 했다. 몰락한 사대부의 후예로서 몇 마지기 농토를 붙여먹고 살면서도 조상의 풍도에 대한 향수를 몸으로 표현하며 사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지금 내 벌거벗은 모습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끌끌 차실 게 분명하다. 몸을 일으켜 거실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팬티를 주워 입는다. 팬티를 입고 메리야스랑 바지를 입을까 생각하다가 피식 웃고 만다. 내게는, 아버지가 평생 버리지 못했던 사대부의 풍도에 대한 향수 같은 건 없다. 있는 듯 없는 듯 숨죽이며 살아가는 서민임을 자인하는 사람이다. 추우면 두꺼운 옷을 껴입고 더우면 팬티 한 장으로 부끄러움을 가리고 지내다가 그로도 못 견디면 홀랑 벗고 샤워를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샤워를 하고 알몸으로 거실에 나와 드러누운 것은 내가 나체족이나 히피족이어서가 아니 듯, 알몸으로 누워 있는 게 부끄러웠던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풍도가 아니라 내가 사람임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팬티 하나 달랑 차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남마처럼 얼크러졌던 머릿속을 애써 비우고 마감일이 임박한 원고를 쓰기 위해 자판 위에 손을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