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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에서 중도․화쟁으로의 변증적 사유 방식
-원효의 金剛三昧經論을 중심으로-
Dialectic Speculation from Emptiness to Middle way, Harmonization
송 진 현 (Song Jin-h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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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강사
sjh9501@unitel.co.kr
■차 례■
1. 문제의 제기
2. 金剛三昧經論에서의 공의 의미
3. ‘非有非無’와 ‘不一不二’를 통한 중도 이해
4. 공과 중도․화쟁의 변증법
5. 맺는 말
공에서 중도․화쟁으로의 변증적 사유 방식
-원효의 金剛三昧經論을 중심으로-
1. 문제의 제기
올바른 인식은 올바른 실천의 안내자이며, 올바른 실천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고,
깨달음은 열반으로 이어진다. 결국 열반의 성취는 올바른 인식을 출발점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의식은 대상 세계를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가?
대상 세계는 우리의 의식에 투영되고 있는 대로의 모습을 그 고유한 특성으로 간직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서 사물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적 지식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관찰 가능성과 반복성에 의하여 그 객관성을 인증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물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제일 원리에 대한 우리의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지식은 확실성 및 타당성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인식의 이론에서 제기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의문들이다. 불교학에서도 마찬가지의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으나, 불교학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목적은 단순한 지식의 문제 그 이상에 있다. 그것은 바로 올바른 인식을 통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집착과 견해를 제거함으로써 고통의 근원인 번뇌를 벗어나서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지식은 진정한 지식(true knowledge)과 신념이나 의견(belief or opinion)의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지식 가운데 첫 번째 종류의 것만이 믿을 수 있는 지식이라고 하였는데, 철학자나 수학자 이외에는 어떠한 사람도 이런 지식을 얻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두 번째 종류의 지식은 일상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식이라고 믿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 지식은 감각 지식으로부터 이끌어 내지며, 전혀 신뢰할 수 없고, 또 모든 오류의 근본적인 원천이라고
하였다.
진정한 지식과 그렇지 못한 지식을 불교의 관점에서 구분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 진정한 지식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자의 지식을 들 수 있겠고, 신념이나 의견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의 지식을 들 수 있겠다. 이 두 종류의 지식을 구분하는 기준은 철저히 공의 원리에 입각하여 대상 세계의 모습을 파악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혹은 철저히 공의 원리에 입각하여 인식 주관의 양태를 파악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양대 학파인 중관학파와 유식학파는 바로 존재의 모습을 공의 원리에 의거하여, 그리고 존재의 모습은 다름 아닌 인식 주관의 현현이라는 관점 아래에서 인식 주관의 양태를 공의 원리에 의거하여 바라보고자 했다고 하겠다. 이 공의 원리에 의한 사유 방식을 달리 표현하면 중도의 사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학이 다루어 온 주제는 시대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나 다양한 불교학의 주제를 다루는 기본적인 사유 방식은 역시 중도의 입장을 드러냄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중도의 사유 방식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사유 방법론이다. 붓다의 육성이 배어 있는 근본불교를 시발점으로 하여 대승불교의 중관․유식 사상에 이르기까지 다루고 있는 주제는 다르지만, 그 사유 방식의 일관된 흐름은 역시 중도의 사유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 자신이 존재 인식의 측면에서 당시의 사상계에 풍미하였던 유물론적 사상과 관념론적 사상에 대하여 연기로서의 중도설을 천명하였고, 수행의 측면에서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에 대하여 팔정도로서의 중도설을 제창하였다. 이와 같은 중도 사상의 요체는 존재의 모습을 직관하지 못하고서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에 집착하려는 경향을 철저하게 타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의 중도적 사유 방식은 이후 모든 불교 사상에서 현실의 잘못된 문제를 파악하여 이를 비판함으로써, 인식의 측면에서 그리고 실천의 측면에서 고통을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는 논리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본고의 목적은 원효의 화쟁사상을 공과 중도의 관점에서 재조명해 보려는 데 있다. 방대한 불교 경론의 섭렵을 통해 이루어진 원효의 화쟁사상 역시 그 토대를 중도적 사유 방식에 두고 있고, 원효의 중도적 사유 방식은 공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특히 원효의 공에 대한 이해는 大乘起信論疏․大乘起信論別記 및 金剛三昧經論 등에 의거해 본다면 중관적 사유 방식뿐만 아니라 유식적 관점을 독창적으로 원용하고 있으며, 공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일심․본각․여래장을 발현시키고자 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화쟁사상은 원효의 사상 체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이며 특징적인 사유 방식을 드러내 주는 만큼 그간 다방면에 걸쳐 많은 연구 업적이 쌓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효의 화쟁사상을 이해하는 데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공의 의미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진한 감이 없지 않다. 원효가 파악한 공의 의미를 중관 사상과 연관하여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지만, 이것 역시 원효가 파악한 공의 의미를 단편적으로밖에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원효의 화쟁사상 전모를 밝히는 데 있어서 원효의 공관을 좀더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는 일은 반드시 요청되는 작업이라고 하겠다.
본고에서는 원효의 저술 가운데 특히 金剛三昧經論을 중심으로 원효가 공을 어떤 의미로 해명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공의 이해를 바탕으로 어떻게 중도사상을 천명하고 있으며, 또 이를 토대로 어떻게 화쟁사상이 도출되는지 그 사유 방식을 추찰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金剛三昧經論을 연구 자료로 선정한 이유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원효의 사유 방식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저술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2. 金剛三昧經論에서의 공의 의미
불교에서는 공을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우선 공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漢語大詞典에 의하면, 공은 문맥에 따라 대체로 텅 비어 있다[空虛, 中無所有], 다하다[盡], 광활(廣闊)하다, 깊고 고요하다[幽靜], 명정하여 걸림이 없게 하다[使明淨無挂碍], 꿰뚫다[穿通, 破], 허망하다[謬妄, 虛假], 결여되어 있다[缺少], 공간(空間)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공의 일반적 의미는 범어 śūnya를 번역한 것으로 有의 상대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空無, 空虛, 空寂, 空淨, 非有의 뜻이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현상 가운데에는 자체, 실체, 아 등이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와, 현상에 대비되는 본체는 공적․명정하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공의 의미가 사상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대승불교의 반야부 경전에서 공의 개념을 중요시한 것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반야부 경전은 대승경전 중 가장 초기의 문헌에 속하는데, 중관사상은 바로 반야계 경전에서 전개된 사유를 정연하게 이론적으로 조직한 것이다. 이 사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실재론적인 사유태도를 비판한다는 것이다.
반야부 경전을 소의 경전으로 삼는 중관학파는 붓다의 종교적 정신을 재인식함에 있어 아비달마 불교와는 그 사상적 입장을 달리하는 ‘공의 사상’을 천명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사상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중관학파의 시조인 나가르주나는 그의 주저인 중론에서 설일체유부 등의 법유론을 비판하고, 이른바 ‘공의 논리’로써 일체법의 실재를 확립하려는 사상적 입장을 부정하였다. 법유, 즉 사물이 실체로서 존재함을 타파한 나가르주나의 논법은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사색의 자취를 나타내고 있는데, 바로 그러한 사색에서 그의 ‘공의 사상’이 탄생했던 것이다. 이 ‘공의 사상’은 ‘중도’로 표시되는 붓다의 사상적 입장을 대승적으로 전개시킨 것이다.
유식학파 역시 본질적으로 중관학파의 반야․공 사상을 수용함과 동시에 비유비무의 중도를 확립하고자 했다. 유식학파는 반야․공 사상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삼자성 또는 삼무자성의 새로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공의 이론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삼자성은 인식의 대상 쪽에서 말하면 세 가지 존재 형태를 말하고, 인식의 대상은 결국 인식 주관의 현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세 가지 마음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삼자성은 자기 마음의 세 가지 존재방식이다. 유식학파는 공을 논리의 세계에서 자기 체험의 세계로 끌어올려서 자기 마음이라는 구체적인 인식활동의 장에서 공을 체험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삼자성, 삼무자성에 의한 공의 논리가 성립했다.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관을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공성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그 실재성을 인지하는 허망한 분별을 의식의 사실로서 존재한다고 인정하려는 것이 유식중도의 입장이다.
원효는 金剛三昧經論에서 공의 의미를 몇 가지로 분류하여 사용하였는데, 「無相法品」에서 초기 아함 경전을 비롯하여 여러 경론에 나타난 공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대공의 뜻에는 대략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법의 이공을 대공이라고 하니, 잡아함경의 대공경에서 말한 것과 같고, 유가론에서도 이 설명과 같다.
둘째는 반야바라밀의 공을 대공이라고 하니, 대열반경에서 말한 것과 같고, 능가경에서도 이 설명과 같다.
셋째는 기세계의 공을 대공이라고 하니, 해심밀경에서 말한 것과 같고, 중변론에서도 이 설명과 같다.
넷째는 아리야식의 공을 대공이라고 하니, 십지론에서 말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시방의 상이 공적한 것을 대공이라고 하니, 지도론에서 말한 것과 같다.
원효가 ‘대공’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용하고 있는 경론은 아함부의 경전을 비롯하여 중관부와 유가부에 속하는 경론 및
열반경․능가경이다. 인용 경전들의 성격으로 보아 원효는 공의 의미를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의 인용문에서 공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인식의 주체를 구성하고 있는
감각 기관과 의식,
인식의 대상이 되는 현상적 세계,
현상적 존재의 최종 근거인 아리야식,
그리고 현상적 존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떠나 실상을 여실하게 파악하는 반야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원효는 이와 같은 공의 대상을 다 지칭할 수 있는 공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여기에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로서의 공의 뜻과 함께
‘잡염된 것이 사라져 명정하다’는 긍정적인 의미로서의 공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인식의 주체를 구성하고 있는 감각 기관과 의식,
인식의 대상이 되는 현상적 세계,
그리고 현상적 존재의 최종 근거인 아리야식에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로서의 공의 뜻을 적용할 수 있고, 현상적 존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떠나 실상을 여실하게 파악하는 반야에는 ‘잡염된 것이 사라져 명정하다’는 긍정적인 의미로서의 공의 뜻을 적용할 수 있다.
원효는 다시 「입실제품」에서 경에서 언급된 다섯 가지 공을 세 가지 진여와 관련지으면서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오공[三有․六道․法相․名相․心識의 공함]은 곧 세 가지 진여를 나타낸 것이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유전진여이고,
둘째는 실상진여이며,
셋째는 유식진여이니,
이 뜻은 현양론에서 자세하게 말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 앞의 두 가지 공은 곧 앞의 두 가지 진여이고,
뒤의 세 가지 공은 세 번째 진여이니, 이 뜻이 무엇인가?
처음에 ‘삼유가 공’이라고 한 것은, 삼유에 대한 애착으로 말미암아 삼계에 유전하지만,
삼계에 유전하는 것은 전후의 자성이 없어서 찰나도 머무름이 없어서 공하여 얻을 것이 없으니,
바로 이것이 유전진여문이다.
두 번째 ‘육도의 그림자가 공’이라고 한 것은
선악 업의 각각 두 가지 품으로 말미암아 육도의 과보가 본체와 비슷하게 그림자를 나타내지만,
그림자는 본체를 떠나지 아니하여 공하여 얻을 것이 없으니, 바로 이것이 실상진여문이다.
뒤의 세 가지는 유식진여문이다. 앞의 두 가지는 취하려는 대상인 義와 名을 버리는 것이니,
명과 의는 서로 객체가 되어 실체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고, 뒤의 한 가지는 취하는 주체인 심식을 버리는 것이니,
능과 소가 서로 의지하여 홀로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위의 인용문에서 원효는 공의 의미를 크게 세 가지로 파악하고 있다.
처음의 공은 끊임없이 생멸을 반복하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에는 변치 않는 고유성이 없다는 의미이고,
두 번째의 공은 생멸하는 현상계의 원인이 되는 본체의 모습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세 번째의 공은 지시체인 언어[名]와 언어에 의하여 지시되는 개념[義] 및 사유의 주체[心識]는
서로 의존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자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공의 의미에는 일체의 집착
, 즉 주체와 객체,
그리고 현상과 본체 등을 상대적으로 분별하여 각각 자체로서
성립한다고 고집하는 것을 벗어나게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원효는 공에 대한 해명을 통하여, 존재의 측면에서 현상의 세계는 우리의 관념에 포착되는 것과 같은 실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영원히 실재한다고 생각되는 본체의 세계도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으며, 인식의 측면에서 인식의 내용물인 언어와 개념 및 인식의 주체인 심식 역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부정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허구의 은폐물이 제거될 때 그대로 진실의 세계가 드러난다. 진실의 세계는 우리가 인식하는 허구의 세계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본체와 현상이라는 두 존재의 세계에 대한 분별적 사유가 사라지고 참된 인식이 생겨날 때, 하나의 진실의 세계만이 현전하는 것이다.
3. ‘非有非無’와 ‘不一不二’를 통한 중도 이해
앞에서 공의 의미에는 대략 두 가지가 있음을 살펴보았다.
원효는 이러한 공의 의미를 바탕으로 어떻게 중도를 설명하고 있는가?
중도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어느 하나의 고정된 관념에 집착하려는 경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고정된 관념을 나타내 주는 대표적인 것으로는 나가르주나에 의해 부정된
‘生’과 ‘滅’,
‘常’과 ‘斷’,
‘一’과 ‘異’,
‘來’와 ‘去’를 들 수 있다.
이것은 결국 하나의 사태를 두 극단적인 사유 방식에 의하여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金剛三昧經論에서 극단적인 사유 방식의 유형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세속의 법이 일어난다[生 혹은 有]”는 것과 “세속의 법이 소멸한다[滅 혹은 無]”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속제와 진제는 다르다[二]”는 것과 “속제와 진제는 같다[一]”는 것이다.
우선 “세속의 법이 일어난다”는 유의 입장과
“세속의 법이 소멸한다”는 무의 입장에 대해 원효가 어떻게 대치하는지 알아보자.
‘환화의 상에 대하여 마음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처음 관을 닦을 때에 모든 유의 상을 깨뜨려서 환화의 상에 대하여
그 마음을 내는 것을 없앴기 때문이다. ‘환화의 상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음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환화의 상을
깨뜨리고 나서는 다음에 그 공의 상마저 버려서 환화의 상이 없는 공에 대해서도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중생이 본래 마음은 상을 떠난 것임을 모르고 온갖 상을 취하여 생각을 움직이고 마음을 내기 때문에
먼저 모든 상을 깨뜨려 상을 취하는 마음을 없애며,
비록 다시 환화의 유의 상을 깨뜨렸더라도 오히려 환화가 없는 공성을 취하니,
공성을 취하기 때문에 공에 대해서 마음을 내므로 또한 환화가 없는 공성마저 버리는 것이다.
이때에 공을 취하는 마음이 생기지 아니하여 둘이 없는 중도를 깨닫게 되어
부처님께서 들어가신 제법의 실상과 똑같아지니, 이와 같이 교화하기 때문에 그 교화가 큰 것이다.
여기서 원효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유로서의 환화의 상과
무로서의 공성이다.
‘환화의 상’은 생멸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위의 세계를 나타내는 비유로서 꿈, 아지랑이, 신기루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것은 인식의 주관인 마음이 실재하지 않는 인식 대상에 대하여 실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의 주관에
나타나는 갖가지 영상이 인식의 주관을 벗어난 외계에 실재하는 대상과 상응한다는 생각을 제거하는 것은 올바른 인식을
위한 출발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외계의 인식 대상을 ‘환화의 상’으로 여겨서 이에 대하여 허망한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인식의 방법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식의 대상을 ‘환화의 상’으로 여긴다는 것은, 인식의 대상이 인식의 주관과는 독립적으로 외계에 실체의 모습을 가지고 존재하지만 인식 주관이 그 인식 대상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여 잘못된 인식 내용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환화의 상이라고 할 수 있고,
인식의 대상이 인식의 주관과는 독립적으로 외계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자성을 가지고 있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시적인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것일 뿐 그 조건이 소멸되면 그 대상 역시 사라진다는 의미에서 환화의 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인식의 대상은 일시적으로라도 조건에 의해서 외계에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식 대상은 단지 인식 주관의
내적인 심리 작용이 투영되어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의미에서 환화의 상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원효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환화의 상’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것은 마음에 발생하는 모든 관념적 사유를 지칭한다. 관념적 사유는 어떠한 형태이든지 대상을 실재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왜곡하게 마련이다. ‘환화의 유의 상’이든 ‘환화가 없는 공성’이든 모두 관념적 사유의 결과인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존재의 실상을 올바로 인식하는 데 장애가 된다. 따라서 존재의 실상을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관념적 사유를중단한 채로 이원성을 초월한 중도의 사유 방식에 의거해야만 한다.
원효는 이 중도의 사유 방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것은 연기의 원리로서, 이 연기의 원리는 현상을 파악하는 데에 ‘일체는 존재한다’라든가 ‘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견해를 치유하는 방편적 성격을 띠고 있다. 연기의 원리는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으로서 근본불교 이래 존재의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는 고통의 발생과정과 고통의 소멸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연기의 원리를 통하여 모든 존재하는 것의 실체가 공함을 밝히려고 했던 것은
중관학파의 나가르주나였다.
나가르주나가 이해한 연기의 원리는,
조건에 의하여 모든 존재가 성립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따라서 그들 자체로서 생기하고 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기는 원래 미혹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가 어떻게
성립하는가 하는 차례를 명확히 하기 위해 설해졌는데, 그것의 가장 발전된 형태가 무명에서 노사에 이르는 12지 연기설이다.
그것과 아울러 연기는 “사물이 있다”, “사물이 없다”, 혹은 “사물이 생기한다”, “사물이 멸한다”라고 하는 현상의 존재 방식을
교시하는 것으로서 ‘인과성’, ‘관계성’으로 제시되었다. 이처럼 연기는 실천적․종교적 입장에서 십이연기로 대표되는 미오의
차례를 밝히는 것과, 그 논리적 구조로부터 존재의 ‘관계성’, ‘인과성’을 밝히는 것이 있는데, 나가르주나에게서도 그 연기가
갖는 양면성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원효가 연기의 원리를 다루는 방식은 조금 독특한 점이 있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원효는 공과 유에 대하여 집착하는 견해를 치유하는 방편의 의미에서 연기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해 보자.
‘법이 일어남을 볼 때’라는 것은 속법이 인연으로 일어남을 바로 관찰하는 때이니, 이때에 空을 취하는 견해를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없다는 견해를 멸하게 하라’고 한 것이다. ‘법이 멸함을 볼 때’라는 것은 속법이 본래 멸하는 것임을 바로 관찰하는 때이니, 이때에 有를 취하는 견해를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있다는 견해를 멸하게 하라’고 한 것이다. ……
이 뜻은 관행을 닦는 사람이 법이 일어남을 관찰할 때에는 다만 없다고 하는 견해를 떠날 뿐 일어난다는 생각을 두지 않고,
적멸을 관찰할 때에는 오직 있다고 하는 견해를 떠날 뿐 멸한다는 생각을 취하지 않음을 바로 밝힌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일어난다는 생각을 둔다면 일어남은 본래 적멸한 것이고, 만약 멸한다는 생각을 취한다면 멸함이 곧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의 원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의도는 실존의 고통이 발생하는 과정을 현상적으로 파악하여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그 고통을 소멸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연기의 원리는 관계 일반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모든 존재에 자성이 없다는 기본 관점에서 출발하여 “일체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과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의 두 극단적인 견해를 부정하는 중도로서 제시되어 있다.
원효 역시 연기의 원리를 중도를 현시하는 사유 방식에 적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생기하고 소멸하는 현상을 관찰하여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의 견해와 일체가 존재한다는 유의 견해를 대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연기의 원리를 통하여 현상의 세계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견해를 부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연기의 원리에 의하여 현상의 세계가 생기하고 소멸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나서, 이를 토대로 유와 무의 견해를 대치하는 것이다
즉 여러 가지 조건이 형성되어 현상의 세계가 인식의 대상으로 현현할 때, 그리고 조건이 소멸되어 현상의 세계가
인식의 대상에서 사라질 때, 조건에 의해 형성된 현상의 세계를 근거로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의 견해를 치유하며
조건의 소멸에 의해 사라지는 현상의 세계를 근거로 “일체가 존재한다”는 유의 견해를 대치하는 것이다.
원효가 연기의 원리에 의하여 “일체가 존재한다”는 유의 견해와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의 견해를 대치하고,
“일체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중도를 제시하는 것은 결국 그릇된 인식의 허망함으로서의
공을 지적함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의미로서의 공을 지적하는 것은 단지 회의주의 혹은 허무주의에 머무르려는 것이
아니고, 중도의 사유 방식을 통한 참된 인식의 가능성을 지향하려는 데 그 의도가 있다고 하겠다. 다음의 글은 이와 같은
원효의 생각을 잘 나타내 준다.
‘有도 공하여 있지 않다’고 한 것은 거듭 相을 벗어난 것이니,
八識의 有相의 법이 공적하여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無도 空하여 있지 않다’고 한 것은 거듭 性을 벗어난 것이니,
九識의 無相의 性이 공적하여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심은 이와 같이 상을 벗어나고 성을 벗어나서 곧 무량한 공덕의 더미이니,
이와 같은 것을 ‘불가사의한 더미’라고 하였다.
두 가지의 생멸이 완전히 그쳤을 때에 여덟 가지 식의 움직임이 모두 고요한 데로 돌아가고,
여섯 가지 染心의 흐름이 영구히 없어져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식이 안정되고 고요하여,
흐름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흐름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법계가 원만히 나타나고,
모든 식이 안정되고 고요하기 때문에 네 가지 지혜
[大圓鏡智, 平等性智, 妙觀察智, 成所作智]가 원만히 이루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원효의 중도적 사유 방식에는 연기의 원리를 통해 중도를 입증하려는
방식과 함께 인식의 허망성을 통해 중도를 입증하려는 방식이 모두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효는 공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일심․본각․여래장과 같은 개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공의 논리를 통하여 부정의 방향으로만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부정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긍정의 면까지 아울러 부각시키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원효는 “일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에 의하여 중도를 드러낼 뿐 아니라,
“세간의 진리와 출세간의 진리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는 말에 의해서도
중도를 드러내고 있다. 전자에 의하여 드러난 중도의 의미가 세간의 존재의 실상을 여실하게
파악하여 인식의 허망함을 드러내 줌으로써 참된 지혜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후자에 의하여 드러내고자 하는 중도의 의미는 허망함과 진실함, 미혹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
중생과 부처가 궁극의 관점에서 보면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니지만 하나를 고집하지도 않으니,
둘이 아니기 때문에 곧 일심이고,
하나를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전체가 둘이 된다. ……
생이 적멸이지만 적멸을 고집하지 않고, 멸이 곧 생이지만 생에 머무르지 않으니,
생과 멸이 둘이 아니고 움직임과 적멸함이 다를 것이 없다.
이와 같은 것을 일심의 법이라고 한다.
비록 실제로 둘이 아니지만 하나를 고집하지 아니하여 전체가 연에 따라서 생동하고 전체가 연에 따라서 적멸하니,
이와 같은 도리로 말미암아 생이 적멸이고 적멸이 생이어서,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으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우리의 사유 방식에 의거한다면, 미혹의 세계인 세속적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인 해탈의 세계는 성격을 달리하는 세계이며,
우리는 이 세속적인 세계로부터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유 방식 역시 하나의 현상을
본질의 관점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분별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데에서 연유한다. 즉 미혹과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미혹의 속성을 없앰으로써 깨달음의 속성을 획득한다는 이원적 사유 방식 때문이다.
그러나 미혹의 세계와 구별된 깨달음의 세계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허구일 뿐 있는 것은 하나의 세계일 따름이다. 분별의 관점을 넘어서서 미혹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근거는 역시 미혹의 세계든 깨달음의 세계든 그 자체로서 항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공의 원리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미혹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가 다르지 않다고 해서 분별의 관점이 완전히 무시되는 것도 아니다. 분별의 관점은 또한 하나에만 집착하는 견해를 없애는 데 유효하다.
“일체가 존재한다”고 하든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든,
혹은 “세속과 진여가 다르다”고 하든 “세속과 진여가 다르지 않다”고 하든 그 말 자체로서 병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원효는 공의 원리를 근거로 해서 일체의 존재 속에서 일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동시에 사유할 수 있고,
세속 가운데 진여가 내재해 있음을 함께 고찰함으로써 인식의 성향이 극단에 치달리는 것을 차단하려는 데 이와 같은
논의의 목적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4. 공과 중도․화쟁의 변증법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 의하면, 원효는 金剛三昧經論에서 공에 관하여 언급할 때,
그리고 공의 원리를 통하여 중도를 설명할 때 그것을 존재의 문제 및 인식의 문제와 관련지으면서 설명하였다.
그리고 공의 원리를 통하여 중도를 파악하는 데에 중관학의 관점과 유식학의 관점을 적절히 원용하고 있으며,
그렇게 파악된 중도가 지향하는 것은 궁극의 실재인 일심․본각․여래장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지금까지 살펴본 공과 중도에 대한 원효의 설명이 어떻게 그의 화쟁사상과 연결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원효는 金剛三昧經論의 대의문에서 金剛三昧經의 핵심 내용을 一心과 三空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일심은 결국 삼공을 통하여 드러나는 긍정의 측면이라고 한다면, 삼공은 일심의 근원에 도달하는 데 부정되어야 할
모든 집착의 타파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삼공을 통하여 일심에 이르는 과정을 부정과 긍정의 변증적 방식에 의하여
보여주고 있다.
‘공상도 공하다’고 한 것은, ‘공상’은 곧 속제를 버려 진제를 나타낸 것으로서 평등한 상이고,
‘또한 공하다’는 것은 곧 진제를 융합하여 속제를 삼은 것으로서 공공의 뜻이니,
마치 진금을 녹여 장엄구를 만드는 것과 같다. ……
이것은 속제의 유와 무, 옳음과 그름의 차별의 상이 바로 공공의 뜻임을 밝힌 것이다.
평등공에 대해서 공하다고 하는 것은 속제의 차별을 나타낸 것이니, 그러므로 이 차별을 ‘공공’이라고 한 것이다.
‘공공도 공하다’고 한 것은, ‘공공’은 속제의 차별이고, ‘또한 공하다’고 한 것은 다시 속제를 융합하여 진제를 삼은 것이니,
마치 장엄구를 녹여 다시 금덩어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 세 번째 가운데 ‘소공도 공하다’고 한 것은,
처음 공 가운데의 공이 나타낸 속제와 두 번째 공 가운데의 공이 나타낸 진제의 이 두 가지가 다름이 없기 때문에
‘또한 공하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이제를 융합하여 일법계를 나타낸 것이니, 일법계라는 것은 이른바 일심이다.
원효가 세 가지 공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로
空相과
空空과
所空이며,
이때 세 가지 대상이 공하다고 할 때의 공의 의미는
‘머무르지 않는다’,
‘공적하다’의 뜻이다.
공상이라는 것은
현상계의모든 차별적인 모습을 부정함으로써 드러나는
무차별․평등의 여실한 세계를 가리키고,
공공이라는 것은
다시 무차별․평등의 여실한 세계를 부정함으로써
드러나는 차별적인 현상계의 모습을 가리키며,
소공은
앞의 공상과 공공을 함께 가리킨다.
공상은
진제에 해당하고,
공공은
속제에 해당한다.
원효가 같은 용어인 속제와 진제에 대하여 개념적 층차에 의해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하고 있는 데에서 전형적인 변증적 사유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속제에 대하여 살펴보자.
첫 번째 의미의 속제는 평등공을 얻기 위하여 버려야 할 속제이고,
두 번째 의미의 속제는 평등공조차 공하다는 인식에 의하여 얻어지는 속제이다.
같은 속제이지만 처음의 속제는 무분별지를 얻기 위해 버려야 할 속제이고,
두 번째의 속제는 처음의 속제를 부정하여 얻어진 무분별지를 통해서 존재의 실상이 여실하게 파악된 속제이다.
진제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 의미의 진제는 속제를 부정하여 얻어진 진제이고,
두 번째 의미의 진제는 무분별지를 통한 후득지에 의하여 존재의 실상을 여실하게 파악하여
그 차별성 속에 평등성이 그대로 내재해 있다는 점에서 진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시 같은 진제이지만, 처음의 진제는 속제와 대별되는 것으로서의 진제이고,
두 번째의 진제는 차별성을 지니고 있는 속제를 벗어난 것으로서의
진제가 부정되고 그대로 차별성을 지니고 있는 속제에 내재한 모습으로서의 진제이다.
세 가지 공의 마지막은
바로 공상과 공공을 함께 부정함으로써 변증적으로 드러난
속제와 진제는 결국 같은 모습도 아니며 다른 모습도 아닌
일심으로 귀결됨을 나타내 준다.
여기서의 ‘공’, 즉 ‘소공도 공하다’고 할 때의 공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 ‘眞도 아니고 俗도 아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제에 의거하여 중도를 설명하는 방식은 중관적 사유 방식을 원효 나름대로 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이제에 의하여 중도를 설명하는 중관적 사유 방식에 덧붙여 원효는 다시 유식의 三性說을 가지고도
중도를 설명하고 있다.
처음 공의 문 안에서 버린 속제는 소집상이고,
두 번째 공 가운데에서 융합한 속제는 의타상이니,
속제에 두 가지 상이 있기 때문에 버리는 것과 융합하는 것이 하나가 아니다.
또 처음 문 안에서 속제를 버려서 나타낸 진제와 두 번째 공 가운데에서 속제를 융합하여 나타낸 진제는,
이 두 문의 진제는 오직 하나이고 둘이 없으니, 진제는 오직 한 가지로서 원성실성이다.
그러므로 버리고 융합하여 나타낸 진제는 오직 하나다. 세 번째 공은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니며,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은 것이다.
유식의 삼성설은 중관의 이제설을 바탕으로 하면서 속제를 더욱 세분하고 있다.
즉 속제를 변계소집상과 의타기상으로 구분하여 본다. 원효는 이것에 의거하여 세 가지 공이 의미하는 것을 다시 설명하고 있다.
즉 처음 ‘空相亦空’에서의 공상은 변계소집상을 제거함으로써 얻어지는 원성실성이고,
두 번째 ‘空空亦空’에서의 공공은 변계소집상을 떠난 원성실성을 그 자성으로 삼고 있는 존재의 실상, 의타기상을 가리킨다.
세 번째 ‘所空亦空’에서의 ‘공’의 의미는 앞에서 이제에 의거하여 중도를 설명할 때의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의 뜻은 앞에서 이제에 의거하여 중도를 설명할 때의 뜻과는 다르다. 앞에서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진제를 내포하고 있는 속제와 그 속제에 내재해 있는 진제였는데,
여기에서 ‘같지 않음’의 뜻은 속제의 두 가지 측면, 즉 공상을 얻기 위해 버려야 할 변계소집상으로서의 속제와, 진제를 내포하고 있는 의타기상으로서의 속제가 같지 않다는 것이고, ‘다르지 않음’의 뜻은 변계소집상을 제거하여 나타나는 진제와 의타기상의
융합을 통해 나타나는 진제는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삼성설을 적용하여 공의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도 원효는 변계소집상과 의타기상과 원성실성에 대해 유식의
삼성설과는 다른 독특한 관점으로 이를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원효의 사유 방식은 앞에서 속제와 진제에 중층적
의미를 부여하여 변증적으로 중도를 나타내려고 한 것과 마찬가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삼공의 부정을 통하여 일심을 현양하는 원효의 논리 방식에서 그의 화쟁사상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화쟁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의미는 세속을 초월하여 진여로 나아가려는 것도 아니고, 진여의 세계를 무시하고
세속에 안주하려는 것도 아니다.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 세속과 진여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의 틀을 공의 원리에
근거하여 타파함과 아울러 보다 높은 인식의 차원을 제시해 줌으로써 궁극의 도달점을 지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게
하려는 것에 화쟁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5. 맺는 말
본고의 목적은 원효의 화쟁사상이 공과 중도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원효는 공과 중도를 근거로 자신의 화쟁사상을 확립하는 데 대승불교의 중관학과 유식학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원용하여 나름의 사유방법을 마련했음을 金剛三昧經論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원효의 주석 태도는 하나의 경전을 하나의 관점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경론을 인용하여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특히 金剛三昧經論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원효가 방대한 양의 지식과 다양한 이론적 틀을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하여 적재적소에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는 데에서 우리는 그의 화쟁사상이 도출된 연원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원효는 자신의 화쟁사상을 同事攝의 자비행으로 실천함으로써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불교인으로서의 典範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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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lectic Speculation from Emptiness
to Middle way, Harmonization
-based on Wonhyo’s GeumgangSammaeGyeongRon-
Wonhyo’s Hwajaeng-ism(和諍思想) includes the core of his speculation which frames the system of all of his thoughts. Hwajaeng-ism, resulted from extensive examination of massive Buddhist writings, also has its roots in Middle way(中道) of speculation which is based on the understanding of Emptiness(空).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illuminate Wonhyo’s Hwajaeng-ism in the veiwpoint of Emptiness and Middle way. On the basis of DaeseungGisinRonSo․Byeolgi(大乘起信論 疏․別記) and GeumgangSammae- GyeongRon(金剛三昧經論), Wonhyo applied Yogācāra as well as Mādhyamika way of speculation to explainin the idea of Emptiness. This is a very important point that reveals the characteristics of Wonhyo’s Hwajaeng-ism.
The key of the thoughts of Mādhyamika lies in realization of Middle way by identifying the truth of existence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Pratītya-samutpāda, and the key of Yogācāra is in revelation of Middle way by analysing the structure of Vijñāna and removing the obstacles of cognition which Vijñāna implies. As it is mentioned, thoughts of Mādhya- mika and Yogācāra together aims the realization of Middle way, they have both strengths and weaknesses in their way of demonstration. Observing this, Wonhyo points out the limitation of these two thoughts and at the same time, he establishes his unique system of speculation by making best of the strenghths of these two ideas. That is none but the Hwajaeing-ism.
By examining Wonhyo’s Hwajaeng-ism from the viewpoint of Emptiness and Middle way, we can look the profundity and logical throughness of his speculation. In addition, we expect to get some tips to understand the origin and the development of whole-Buddhistic tendency, or the typical traits of Korean Buddhism which takes harmony serious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