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제주
손진숙
강추위가 예고된 1월 말. 2박 3일 제주 여행의 발을 내디뎠다.
첫째 날이다. ‘생각하는 정원’을 관람하러 간단다. 일찍 서두르느라 아침을 먹지 않은 뱃속이다. 정오가 가까운데 식당으로 가는 게 아니란다.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는데, 수염 없는 나야 말해 무엇 하리. 그렇다고 내 배고픔을 내세울 수야 없잖은가.
‘생각하는 정원’을 관람했다. 안내판의 “분재는 뿌리를 잘라주지 않으면 죽고 사람은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빨리 늙는다.”라는 성범영 원장님 저서에서 따온 글귀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중국 등 해외에서 더 호평을 받고 있다는 ‘생각하는 정원’과 성범영 원장님. 누구도 하지 못한 생각을 바꾸었기에 일개 농부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이룩할 수 있었으리라. 그저 안이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내 생각도 뿌리를 자르고 필요한 가지를 손질해야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정원 한쪽에 위치한 넓은 홀의 식당에 들어섰다. 그러면 그렇지, 깜짝 이벤트처럼 갈치정식이 차려져 있었다. 내 팔뚝만 한 갈치가 통째 구워져 긴 사각접시에 초탈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한 토막씩 덜어 먹기 좋도록 칼질이 되었다. 갈치의 전신에는 왕소금이 설설 뿌려져 있었지만, 간수를 빼서 짜지 않다고 직원이 일러 주었다.
부드럽고 고소한 갈치 살점에서는 제주 선원들의 손길과 바닷바람의 감칠맛이 느껴지기도 했다. 거기다 가스불 위에는 갈치조림이 보글거렸다. 진하고 깊으면서 달콤함이 이제껏 먹어본 맛과는 약간 차이가 났다. 고급 갈치정식으로 밥 한 공기를 게눈 감추듯이 먹어 치웠다.
둘째 날 저녁은 ‘성산갯마을식당’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갈치장이 미각을 당겼다. 내 고향 농촌의 장아찌는 주로 무, 마늘종, 콩잎 등 식물인데 비해 제주도는 갈치, 새우, 게 등 해산물이었다. 파래전과 튀김에 이어 푸짐한 생선회와 얼큰한 매운탕이 노곤해진 입맛을 살렸다.
너그러운 제주 인심이었다. 귤을 후식으로 내놓아 남겼는데, 식사를 마치고 일어날 때 봉지에 넉넉하게 담아 주었다. 배부른 이상으로 포만해진 마음이 제주 바다처럼 풍요로워졌다. 제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귤을 식당 주인의 선심으로 실컷 맛볼 수 있었다. 봉고차 기사가 준비해 준 귤도 줄곧 기분을 상큼하게 했다.
셋째 날, 마지막 자유시간이 동문시장에서 주어졌다. 우리들 발걸음은 어느 갈치상점 앞에서 멈추었다. 제주 바다의 영양을 양껏 섭취한 갈치가 은빛 푸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천하장사 팔뚝 저리 가라의 굵기로 싱싱함을 한껏 자랑했다.
갈치에 끌린 회원들은 한두 마리씩 주문하기 시작했다.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제주 시민인 심 회장님은 “제주 상품을 사 주는 일이 제일 좋다.”라며 미소를 지으셨다. 제주를 진정 위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여사장의 오른손엔 빨간 고무장갑을 꼈으나 장갑을 끼지 않고 갈치를 다듬는 왼손은 거북등처럼 갈라져 있었다. 억척스러운 제주 어시장 여인의 삶이 거친 손 마디마디에 새겨져 있는 듯했다.
저녁 시간으로는 이른 편이었지만 국숫집으로 갔다. 탁자 3개가 놓여 있고, 일행 12명이 앉으니 꽉 찰 정도의 협소한 공간이었다. 소문난 맛집으로 인정을 받았는지 ‘MBC-TV방영 생방송 오늘저녁’이라는 광고판이 벽면에 붙었다.
고기국수, 비빔국수, 멸치국수 중에서 나는 멸치국수를 택했다. 어릴 때부터 먹던 국수의 본맛을 즐기고 싶었다. 양념간장 없이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했으나, 멸치 우러난 국물에 졸깃한 국수 가락이 길고 담백하게 젓가락을 타고 내 입안에 빨려 들었다.
구미에 당기는 국수를 먹은 힘으로 제주공항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내가 발붙이고 사는 포항을 향해 평화롭게 날아올랐다.
제주에서 지낸 사흘. 내 입맛을 사로잡은 음식을 두고두고 잊지 못하리라.
11명의 제주 이야기 『제주, 바람이 ------걸어오다』 (한그루, 202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