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제1장 중관학파 수행론
2.금강경의 수행론 (15) 의법출생분
『금강경』의 가르침은 집착의 소멸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어떠한 집착의 소멸인가? 초기 경전에서부터 줄곧 강조해 온 나와 인식 대상에 대한 집착, 즉 나와 법에 대한 집착의 소멸이다. 수다원에서는 나에 대한 집착을 다스리고, 사다함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법에 대한 집착을 다스려야 한다.
법은 인식의 대상이고, 인식의 대상은 인연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에 자체적 성질[자성], 즉 실체가 없으며 집착할 바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진심을 담아서 설하려고 하신 가르침의 참된 의도, 진의는 무위라는 해체된 열반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공덕은 무위의 공덕일 뿐이며, 일반적인 공덕은 부처님이나 성자에게 큰 의미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허망하여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덕의 무더기는 [참된 무위의]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기 때문에 [단지 유위의] 공덕의 무더기이다.”라고 설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형성이 해체된 무위의 상태를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러한 상태에 머무르시기에 세간의 가치인 유위의 공덕을 방편적으로 인정해 주긴 했지만,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으셨다. 이러한 이유로 다음과 같이 설하신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해 설해 주었다면, 그 복덕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보물을 보시한 공덕보다 훨씬 뛰어나리라.
여기서 언급된 사구게는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사구로 된 문장을 말하고, 또 하나는 인도 논리학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존재의 네 가지 양태에 대한 표현을 말한다.
존재는 있거나[유] 없거나[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유 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비유비무] 상태,이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구게가 바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이다. ‘범소유상’은 존재하는 세계의 ‘유’를 지칭하고 ‘개시허망’은 ‘무’를 말한다.
‘약견제상비상’은 ‘유’와 ‘무’의 동시적 상태를 말하고, ‘즉견여래’는 ‘유도 무도 아닌 것’, 즉 ‘비유비무’를 말한다.
『금강경』의 또 다른 사구게는 10장 장엄정토분의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색. 성. 향. 미. 촉. 법은 ‘유’이고 색에 머물지 않음은 ‘무’이고,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유도 무도 아닌 것‘이고,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은 수행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처럼 네 개의 구절에 네 가지 의미를 모두 갖춘 것을 사구게라 하고, 여기서는 탐. 진. 치에 의해 드러난 현상의 측면, 현상의 무상한 측면, 그리고 탐. 진. 치를 소멸한 본래의 궁극적 상태의 수행 과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수행자는 현상의 가치에서 본래적 가치로 회귀하려는 이를 말한다. 본래적 가치로 회귀한다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보배를 보시한 공덕이 경의 사구게를 설명한 것만 못하다고 『금강경』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성자가 바로 무위의 체험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금강경』은
불모의 경전이다. 『금강경』의 사구게가 바로 무위의 체험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부처님이 시설하신 가르침은 왜 참된 가르침이 아니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언어에 의지한 유위법이고, 참된 가르침은 무위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구게가 의도하는 바는 무위라는 해체된 상태이고, 이는 언설에 의해 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법은 참된 상태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참된 무위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에 [유위의] 가르침”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금강경』은 모든 법에 ‘본체 없음’, ‘본래 없음’, ‘모양 없음’이라고 하는 해체된 측면을 강조한다. ‘본래 없음’이라고 하는 것은 해탈. 열반. 무위의 상태이고, 그러한 관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집착의 수행이란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법의 궁극적이고 본래적인 측면이다. 이런 관점에서
『금강경』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이 실제 우리 생활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고락[수], 시비[상], 호오[행]의 욕망들은 모두 형성된 유위의 법이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집착할 것이 없으니 머무르지 말고, 자유로워진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다.
강미농의 금강경 강의
제15 지경공덕분
“수보리여!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하루를 셋으로 나누어 아침에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도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몸으로 보시하고, 저녁에도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몸으로 보시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백천만억 겁을 몸으로 보시하더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서 믿는 마음을 거스르지 않으면 그 복이 저 복보다 수승할 것이다. 하물며 이 경을 쓰고 베끼고 받아 지니고 독송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하는 것이겠는가?
수보리여! 요점을 들어서 이야기해 보건대, 이 경이야말로 가히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느니라. 여래는 대승을 발하는 사람을 위해 설하며, 최상승을 발하는 사람을 위해 설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능히 금강경을 수지독송하여 널리 모든 사람을 위해 설법하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보아서 헤아릴 수도 없고 칭량할 수도 없고, 가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리니, 이와 같은 사람들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지는 사람이니라.
어떻겠는가? 수보리여! 만일 작은 법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기 때문에 이 경전을 받아 듣고 독송하여 남을 위해 해설해 주지 못하리라.
수보리여! 어느 곳이든지 이 경이 있으면, 모든 세간의 천. 인. 아수라가 응당공양을 올릴 것이니, 마땅히 알라. 이곳은 곧 탑이 있는 것과 같아서 모두 공경의 예를 지어 빙 둘러 돌 것이며, 여러 가지 꽃과 향을 그곳에 흩어 공양하리라.”
---2568. 4. 6. 혜연 무구행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