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들
본문성구 : 눅 12 :16-21
관련찬송: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522,492)
우머1. 시간 있으세요.
어느 남자가 버스를 타려고 지갑을 꺼냈다.
그런데 지갑 안에 땡전 한 푼도 없는 것 이였다.
그래서 옆에 있는 예쁜 아가씨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여자가 하는 말.... "시간 있어요?"
남자는 좋아서... "네.."
"그럼 걸어가!!"
유머2. 지각한 이유
아이들이 선생님께 혼나고 있었다. 지각을 해서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 왜 지각했는지 이유를 대봐!
아이1: “전 공책을 찾느라고요.”
아이2: “전 교과서를 찾으라고요.”그러자 세 번째 아이가 말했다.
“전 학교를 찾느라고요.”
유머3. 크리스마스가 생긴 이유
어느 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심심해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가위 바위 보에서 져서 술래가 되었다.
할아버지를 찾으려고 하니 어디에 숨었는지를 도저히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못 찾겠다. 꾀꼬리"라고 하니 할아버지가 장독 뒤에서 나왔다.
그걸 보고 할머니는 "그리숨었쓰?" 라고 하였다.
"그리숨었쓰"를 잘못 들으면 "클이스마쓰" 라고 들린다.
유머4. 악 몽
어느 부부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벌떡 일어나더니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다.
부인 : 당신 왜 그래요?
남편 : 나 지금 끔찍한 악몽을 꾸었어.
부인 : 무슨 꿈요?
남편 : 이효리와 당신이 나를 차지하려고 싸우다가 결국은
당신이 이기고 말았어.
유머5. 아니, 어떻게…
열대 바닷가에서 두 남자가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한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제가 여기 온 것은 우리 집에 불이 나서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타버렸기 때문이죠.
보험회사가 전부 보상해줬어요.”
“참, 신기하네요. 저도 보험회사가 보상해줘 여기에 왔거든요.
홍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죠.” 처음 말을 걸었던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조용히 물었다.
“불내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홍수는 어떻게 냈습니까?”
풍요로운 삶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었습니다.
하지만 풍요로운 삶에 대한 꿈을 이루었다고 자신 있게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풍요와 행복은 무지개를 잡는 것과 같이 결코 붙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무지개와 같은 꿈을 이루기 위해 불철주야 힘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풍요로운 삶의 수단으로서 가장 우선적으로 물질의 넉넉함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정말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요?
물질이 넉넉하면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정확하게 답변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이 말씀은 본문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소유의 넉넉함을 즐기고 만족해 하는 부자가 얼마나 어리석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해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부자들이 모두 다 어리석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물질을 쌓아두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19절) 일을 일삼는 사람을 가리켜서 ‘어리석은 자’(20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어리석은 자’ 들은 넉넉한 물질을 가지고 쾌락을 일삼는 일에만 주력하기 때문에 영적인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가장 소중한 성경의 교훈들을 알지못합니다. 특별히 ‘어리석은 자’들이 알지 못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인생의 유한함을 알지 못합니다.
모세의 기도 중에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 90:9)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이어서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지나가나이다.”(시 90:10)라고 했습니다.
이 기도는 모세가 평생을 살아온 경험에서 우러러 나온 인생 고백이기 때문에 위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는 시편에 기록된 이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생을 이야기 할 때마다 인용된 명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그의 시를 통해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모세l 인생관은 한마디로 ‘인생은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 어찌 모세뿐이겠습니까? 태초 이후 모든 인생들이 경험하고 고백했던 인생관의 진수가 ‘인생은 유한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면 인생을 논할 때 어느 하나‘유한’이라는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 없습니다. 특히 세 가지 측면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한계입니다.
첫째, 인생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적은 죄를 범할지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칼빈이 말한 바대로 인간에게는 ‘종교의 씨(Seed of Religion)’가 있어서 죄를
범하기 전후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문제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 스스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인생은 질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평생을 살면서 질병을 떨쳐버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 질병의 문제는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의학적으로 그 병명과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수많은 질병이 있다고 합니다. 더구나 현대처럼 과학의 첨단을 걷는 시대에 해결하지 못하는‘에이즈(AIDS)’의 공포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셋째, 인생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자고로 인간들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죽음을 맛보지 않는 인생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갑자기 심장마비로, 어떤 사람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또 어떤 사람은 노환으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죽음의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류의 비극’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죄의 문제, 질병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참으로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같으니이다” (시 90:5)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유한함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2. 진리의 참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진주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상징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비유적으로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진주의 가치를 모르는 돼지에게는 진주의 아름다움이나
소중함이 무참히 짓밟힐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에 대한 주님의 의도는 복음의 진리가 그것의 가치를 모르는 자들에 의해서 무시도j나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진리는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의 진리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복음의 진리는 온 인류를 살리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다시 사신 것이 복음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은 천하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복음에 의해서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야말로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요 꽃입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성경은 학문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재산이 없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를 가리켜서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어디 그것 뿐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며 천국의 진리를 모르는 자드을 향하여 역시 ‘어리석은 자’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여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53:1).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딛 3:3).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는 진리의 가치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각종 죄악을 즐기면서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행하는”(엡 2:3)
진노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어리석은 자는 죄를 벗 삼아 살기 마련입니다.
그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자’는 진리의 참 가치를 알지 못하고 쾌락을 일삼는 자들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5-17)
3. 종말의 도래를 알지 못합니다.
1994년 10월 28일 휴거설로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단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 연약한 성도들을 미혹해서 자기들이 정한 날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했다가 큰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수 년이 지나도록 예수님은 여전히 재림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러한 이단 사설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종말론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자들이라는 것은 이제 만천하에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바로 종말의 도래를 알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종말의 도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대해서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적은 종말의 도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최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어리석음입니다.
개인적인 종말의 도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지상에서의 삶이 최종적인 종착지인 줄 알고 날마다 쾌락을 즐깁니다.
그들은 돈을 버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돈을 좀 벌게 되면 자신의 몸이 상해가는 줄도 모르고 실컷 먹고 마십니다.
그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 시대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당시에도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줄거워하는(눅 12:19)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고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눅 12:20).
‘어리석은 자’는 물질만 풍족하면 한없이 만족을 누리며 즐거워합니다.
그들은 내일 일은 아랑곳 하지 않고 지금 쌓여진 물질을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로 쾌락을 일삼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처럼 자신의 영혼의 종말을 알지 못하고 쾌락을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역사적인 종말의 도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마 24:3)라고
질문함으로써 언젠가 이 땅 위에 역사의 종말이 있음을 예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도 역사적 종말의 도래에 대해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41).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면 성경의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심”(마 24:30)으로 역사는 그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 날은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는”(롬 2:16) 최후의 날이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처럼 역사적인 종말의 도래를 알지 못하고 오늘을 즐기며 사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리석은 자’들은 왜 그렇게 소중한 교훈을 모르고
오늘에 급급하면서 살아갈까요?
그들은 정녕‘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21절(. 다시 말하면 그들의 무지는 소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데 있습니다.
때때로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도 자신들의 지식과 지혜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알아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액세서리로써 소위 종교적인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자신을 속이면서 참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롬 2:16)에 모든 것을 밝힐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어디 그것 뿐입니까?
영생의 진리(요 1:12)를 알지 못한 채 그날 그날의 쾌락을 즐기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의 최후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13:49,5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 가십시오(요 14:6)!
그래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