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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안 역사와 나의 생활일기3-3
우리는 왜 못살고 貧困하게 살았을까? 큰집에 큰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와 두형제이였는데 할아버지가 오산 양조장 친척 으로 양자로 이적한 관계 와 재산문제로 큰집 할아버지 형수와 많이 싸운 사실도 기억난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이민으로 지금의 중국
◆만주국(滿洲國) 봉길선(奉吉線) 상하진역 전(橡河鎭驛前) 남문통(南門通) 순성(順成)에서 농사들 짓고 그곳에서 자리 잡아 한국에 살고 있던 자녀들을 만주국으로 불려서 그곳에서 내 위로 손자 1명과 손녀 2명을(3명) 보았으나 당시의료기술 부족으로 육아에 실패하였고 1945년 8.15일 일본 패망과 대한민국 독립 해방으로 만주국에서 살고 있었던 재산을 급처분하여 한국으로 송금을 하였으나 당시 일본 우체국에서 전시 중 증발되어서 귀향했으나 빈손으로 설음을 많이 받으면서 독학으로 무명 한의생활로 고약. 침술. 양귀비 진액 진통제 활용 등 노력으로 아버지代 에서 공부들 못 시키고 빈곤하게 살았다 그중에 아버지가 지금 의학으로 보면 간암으로 진주 윤 양 병원에서 퇴원하여 병환으로 고생 중에 가사가 말도 없이 힘들었다 2대(代) 걸쳐서 가난이 이어져야 했다 한국에 나와서 3대(代)에 나는 첫손자로 태어나서 나는 할아버자와 할머니의 사랑을 너무 크게 많이 받고 성장했으며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을 가는데 그때 아버지 병환등 집안 사정으로 수학여행을 나 스스로 포기해야만 했었다 그 후에 여행이 끝나고 애들이 합천 해인사 수학여행 이야기만 할 때면 나는 움츠려 들었다 졸업을 할 때 나는 그래도 사천 중학교 정도는 갈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는데 중학교가 아닌 상리 고등 공민 학교로 가게 되었는데 가는 과정에 아버지와 충돌이 벌어져서 중학교도 나 스스로포기 하였고 집안 사정이 말도 못 하게 어려웠고 병환도 위급하게 되었고 당시 상황을 파확한 할아버지는
1.〚1965.5.27 할아버지가 자식을 가슴에 묻으면 안 된다는 고집 으로 불명의 약을 제조하여 음독 자해들 하셨고 이어서
2.〚1965.6.4 1주일 만에 아버지가(42세) 돌아가시고 장례들 치 르고 나니 집안은 엉망징찬이 되었고 농사일로 내가 17살 나이에 집안에 기둥역할이 시작되었다〛
1965년 5월 27에는 모들 심어야 하는 농번기였는데 할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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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셔서 장례들 치러야 하는데 장례 치를 사람도 없었고 장지들 마련해야 하는데 우리가 소유한 땅이 없어서 감나무골 공동묘지옆에 있는 길옆 남의땅에 묵은 묘지 옆에 산소들
안장하고 나니
3.〚며칠 뒤에 공동묘지 옆에 있는 산소 천척들이〛
나타나서 묘지옆 침범은 안된다고 시비가 벌어저서 며칠 후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장례들 두번 치루는일이 벌어진 것이다 때마침 그시기에 비가와서 천수답에는 모심기들 해야 하는 농촌에서 항금 빗물가두기 본격적인 모심기들 해야되는 시기적으로 바쁜 농번기 였다 정말 난감한 사건이었다
그때 어떻게 인부들 동원해서 문토골 큰 집산 정상에 약간 가파른 산세에 자리들 잡았고 장사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묘지이장을 하려니 관에는 물을 머금어 무거워서 관을 맘대로
이동시킬수 있는 장비도 없었고 사람의 힘으로 옳겨야하는데 옮길 수가 있는힘이 센사람은 지역에서 할머니의 집안에 이종간 먼 친척아저씨(최인환 인택형)가 우리 집안 사정을 알고 동정으로 힘으로 지게에 짊어지고 옮겨서 산소들 만들었다 며칠사이로 이루어진 일이데 어머니와 작아버지 두 분의 힘이 큰 것으로 알고 있다그리고 몇일후에는 5.27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이때는 비가왔고 모심기가 절정이라 장례할수 있는사람이 없었고 급하게 우리가 산지기로 남의 산과 묘지들 관리해주었던 지금의 우리산및 자락에 묘지가 될수도 없는곳에 아버지 산소들 안치하였다 우리집에는 적당한 묘지가 아닌곳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산소들 만들어 놓았으나 먹고 사는것이 어려워서 이장은 같은것은 생각도 못해보았다 1주일 사이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장례들 치르고 나니 집안은 엉망징찬이 되었고 농사일로 내가 17살 나이에 집안에 기둥역할이 시작되었다 농부는 비가와도 걱정이고 비가안와도 걱정을하는 천수답 농촌에 삶이란 정말 눈물겨운 보리고개로 생활을이어 오든중 에 박정희 대통령이 외국원조 물자 밀가루들 갖고 공사 임금은 밀가루 배급제도로 쇠실동네 조그만 한 저수지들 온동민이 힘을 모아서 저수지공사들 완공시키었다 그때 밀가루들 주식 으로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밀가루 손칼국수 수제비들 많이 먹어서 나는 지금도 중국식 밀가루 음식을 싫어한다그때는 건설 장비도 없이 인력으로 괭이 와 삽 지게 그리고 리어카는 그때 주장비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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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람의 힘으로 그 저수지는 흙으로 중앙에는 방수용으로 황토심을 넣어서 망깨로 다져서 흙을 쌓아 뚝을 만들었다
저수지가 완공되고 그 후로는 천수답이 옥토로 4계절 농작물이
잘되고 먹고사는 식량 문제가 해결이 되니 농촌에 그힘게웠던 보리 고개에서 해방이 되었다 그전에는 벼들 심어도 보리들 심어도 가믐에는 타서 말라죽어 식량생산도 못하는 농촌생활이었으니 그때 시절을 생각하면 동화책 에나 나오는 이야기 같은 말로 들릴 것이다 천수답은 해결되었고 영웅 박정희 대통령 정책으로 산업 현대화로 도시에서 일자리가 많이생겨나고 농촌에서는 전부 도시로 나가서 기술 배우고 생활환경의 틀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계속 같이 4년간 농사들 짓고 생활중에 나도 좁은 동네 안에서 도시나가서 잘된 사람들을 부러워했고 딱 나 또래에 는 나 혼자남아서 일하기가 싫어서 도시로 나오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고 있을 때에 군에서 하사관 징집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여기에 응시들 하려고 하니 구비서류들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의 서류들 위조하고 간단한 면접으로 시험을 3명이 응시 하였고 2명 합격되고 합격한 한친구는 부산에 직장이 생겨서 입대하지 않았고 나혼자만 남몰래 농촌 시골을 도주하여 내인생이 군인으로 바뀌게 뒤었다 군지원 발표하는 날 나는 동네 입구에서 합격이 된 것인지? 안된 것인지? 무조건 우체부가 오는 것을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집 우편물 있냐고? 하여 합격증을 아무도 모르게 소문 없이 빼돌려서 나는 그 길로 혼자서 나 홀로 군인의길을 힘들게 선택하였다 가정형편으로는 도저히 집안을 빠져나올 수가 없는 쳐지였고 군입대는 말로써 꺼낼 수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군입대하면 동네에서 용돈을 걷어 모아서 군에 잘 갔다 오라고 동민들이 행사까지 해주는 시절이었지만
나는 아무도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만이 몰래 야간도주 형식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랐다 군입대시에 필요한 용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4.〚달 밝은 밤에 당시 먹고살기 위한 쌀독아지에서 쌀을 몰래퍼 내어서 신월 초등학교 옆에 있는 쌀장사집에다가 몰래 팔아서 용돈을 만들었고〛
쌀 1되가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30원으로 10되 정도 팔아야 300원 되는데 입대하는 날 하루 전에 창원훈련소 앞 여관 1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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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 내고 나니 내손에 10원도 없이 빈손으로 창원훈련소에 입대하여 용돈은 없고 옆에 같이 입대한 훈련병들이 PX사용하는 것이 정말 부러웠고 나는 1푼도 없는 빈손으로 훈련소에서 비참한 4주간 훈련을 끝나고 충남 하사관학교 20주 교육을 받으려 떠나는날 어머니는 외가댁 둘째 (태길 형님) 하고 당시에 의정부 미군부대
에 카츄사로 현역복무 중에 휴가들 나와서 어머니하고 창원기차역에서 잠깐 만날 수가 있었다 나는 어머님을 보는 순간 눈물을 쏟았고 그때 어머니는 나에게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마음 아파하고 우셨는지? 그때 어머니가 내한테 얼마인지 용돈을 주었다 나는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으로 하사관하교로 가서 군대생활에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참아 내는데 어머님 모습을 생각하면서 큰 힘을 길러주셨다 어려운 여건과 긴 고비들 이겨내면서 충남 예산 육군하사관 학교 기술행정하사관반 기행 20기들 수료하고 김해공병학교 야전공병 14기 후보생으로 16주 교육을 이수하고현역 육군하사로 1970.5.10 임관하여 동해안 경비사령부 1 유격여단 1대대 제3지역대에 배속받아서 군대생활이 시작되었다 유격여단은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 청와대기습 사건 이후 북한특수부대와 같은 특수부대들 만드는 박정희대통령의 국방정책으로 당시에 훈련 강도는 무척 힘들게 실행하였고 그런 훈련을 지금실행 한다면 현역으로 남아서 군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실전같은 훈련을 강하게 하였다 일상생활에도 발목에다가 모래주머니 1.5Kg 양쪽 다리에 항상 걸어 메고 다녀야 했고 식사시간은 검사들받고 식사배식을 하는 철저한훈련으로 무장구보20kg 완군장 으로 8km 40분 안에 주파하는 무장구보 사격, 수영, 스키, 고공강하, 주특기 등 많은 종목의 특수훈련을 숙달시키면서 특전요원을 키우는 과정에
5.〚특전사도 월남전에 파병을 하게 되었다〛
나는 많은 훈련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당시 파월전쟁에 자원을 3회 걸쳐 지원해서 맹호 공수지구대로 파견되어 그곳으로 약 7개월간 월남전에 참가하였다 대한민국에서 베트남으로 오고 가고 하면서 그리고 참전 하면서 좀 더 큰 눈으로 군대 생활에 눈을 뜨게 되었고 당시에 한국군 하사봉급을 선지급하고 월남에서 받은 봉급으로 현재 소곡리산 87번지 3,300평을 구입해 놓으셨다 그산에 할아버지와 우리 집안의 선영(先塋)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홀로 6남매들 키우면서 그살아 가기가 힘들었던 시기에 조금씩 나오는 돈을 그대로 모아서 헛되게 사용하지 않고 내명의 등기로 부동산을 구입해 놓으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이고 아프다 어머님 의 그정신에 조상님들을 모시는 선영을 많들어주신 그 정성은 나에게는 큰 보물이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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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 선영이 되어 있고 나로서는 무었으로도 바꿀수없는
우리 집안에 큰 재산 목록이 되어 있다 월남에서 귀국하여 한국군으로 복귀하니 고된 훈련과 각종보급품 및 급식이 월남에서 미군보급기준으로 지원받은 것보다 부실하였고 힘들어서 군생활이 염증을 느끼고 나는 육본에
6.〚전역지원서들 올렸고 모든 업무들 인계하고 전역을 대기하면서 놀고 있을 때 육군본부에서 당해연도 전역취하 결정이 방침으로 선포 되어서〛
나는 다시 군생활을 하게 되었다 취소 이유는 북한 김일성이가
1975년도에 부산에서 자기 회갑을 하고 남북을 통일시킨다는
정보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다시 군생활을 시작하는 느낌으로 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을 때 여단본부에서 보직자리가 나왔는데 여려 사람들을 추천받아서 군수참모가 심사하였는데 그중에서 내가 선발이 되어서 군수처에서 가서 또 새로운 근무들 하게 되었다 업무는 중책이어서 자리들 비우기가 힘들어고 대체로 힘든 군사훈련은 받지 않고 서도 계속 군생활을 할수가 있었다
7.〚열심히 잘 근무중에 부대 편제 조직상 내가 근무하고 있는 자리가 준위로 상위 보직으로 바뀌게 되었다 당연히 내가근무해야 하나 또 한번의 고비들 격어야했다 많은 아픈 시련을 격어가면서 나는 조직 속에서 힘들었고 어려운 시기와 인간관계들 유지하면서 많은 것들을 느끼면서 배웠고 군생활을 34년까지 무난하게 하게 되었다 근무 중에는 여려가지 좋았던 추억도 싫었고 힘들었던 추억도 많이 있었지만 기억에 생생한 것으로 몆 가지만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줄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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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남에서 잠자고 있는 막사 취사장 배수로들 베트공이 침투하여 B-40m 휴대용 박격포 공격으로 당시 옆팀 故 중사 이우순 현장사망 (국립현 충원 묘지번호 2-2 묘비번호 3497번) 그때 구조헬기가 야밤중에 연병장으로 착륙하는 것은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2. 군수처 근무당시에 여단탄약고 도난사건 (태권도선수 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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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군수처 특수장비창고 도난사건(안재학)
4. 부. 마사태 사건 현장출동 계엄군
5.12.12사태 사건 현장출동 계엄
6. 광주사태 사건 현장출동 계엄군(故 상사 정관철 전사)
7,15대대 주임원사 근무 시 강릉 무장공비침투 사건(故 중사 이병휘 전사)
8. 대대 권총 분실사건 법적문책없는소원수리작성으로(회수함)
9. 사망사건(음주운전 1. 구타 1. 무장구보중1) 3명
10.특전대 행보관 근무 시 현지 탈영 1명 (원대복귀 후 정상 전역군필(이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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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무중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으나 무난하게 헤처나갔고 군생활은 자기 성질을 앞세우면 힘들고 연속하지 못한다 리드는 항상 여려 전우들의 공감할 수가 있도록 소신을 가져야 하고 성숙하지 못한 지휘관 을 잘못 만나면 정말 힘든 생활이 된다
군생활은 조직상 혼자 특별하게 티어 나지 않고 성실하게 근무하고 남을 많이 이해하고 배려하여야 잘 버티나 갈 수가 있었다 그르나 자유들 구속하는 조직체에서 34년간 이겨낼 수가 있었던 것은 첫째는 가정을 이루고 있었고 아내의내조가 큰힘의 밑 바탕되고 있었기에 인내하고 참고 견디면서 외길로 오늘의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한다 기간 중에는 전역지원서 2회가 육본에서 심사들 받았고 한 번은 부대사정으로 취소되었고 한 번은 내가 취소한 일이 있었다 지금생각하면 2번 취소는 잘 결정된 일이었다. 내 인생에 가장 힘들었고 아쉬움이점이 남아 있다면? 군 생활 중에 내가 배우지 못한 서러움이 군에 첫발을 디디면서 부터서 시작하여 끝날때까지〗는 잊어 질수가 없는 괴로움 연속이었고 죽는날 까지는 남아 있겠지만 당시 고등학교 자퇴하고 있던 동생을 학업연장을 이어놓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보람이 있고 잘한 것이었다 그리고 시골에서 고향을 지킨 동생이 있었기에 집안을 떠나 군생활을 그 끝까지 하였고 한시도 집안 걱정을 떠나본 적은 없었고
8.〚2014년3월 27(음2월27)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비로소
지금의 장소에 선영을 모실수가 있었다 그동안 산소 이전을 위하여 4촌들 까지 회비들 모아서 조상묘들 이장하여 모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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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은 정성과 깊은뜻이 있는 선영으로 조상들을 모시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 힘든생활을 혼자힘으로 이겨내면서 6남매들 키워내셨고 구입한 소곡리 산 87번지 땅을 우리에게 어떻게 만들어 주고 가셨을까?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가슴이 메어진다 금번 2024.04.04 (음력02.26) 어머니 기일에서 우리는 시대풍습에 따라 기일모시는 방법을 바꾼다고 했기에 이번기회에 우리 형제간들은 어머님 살아온것은 알고 지나가기들 바라면서 집안 역사들 한번 뒤돌아 보았고 기록으로 정리 하니 참고하길 바라다 그리고 세상은 험란하게 바뀌어도 〚우리 집안 형제들은 항상 부모님을 생각 하면서 友愛있고 단결된 집안이 되길 바란다〛
2024.04.21 권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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