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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강호거상(江湖巨商)
비에 젖은 뜨락.
매난국죽(梅蘭菊竹) 사혈비(四血妃)는 만색비궁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갑론을박하다가 그가 나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싱긋 웃으면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 아니?"
"대체… 대체 어찌 된 일이냐?"
"림주는 어찌 되고, 너 혼자 걸어 나오느냐?"
사혈비가 자지러지게 놀랄 때.
"훗훗… 타인의 정사를 구경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지. 그래서 지켜보고 싶었으나, 그 마음을 참고 나온 것이다.“
능조운은 성큼성큼 다가섰다.
사혈비는 그제서야 일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허리에서 연검(軟劍)을 한 자루씩 끌어 냈다.
차앙- 창-!
무지개 같은 검기가 치솟아 올랐다.
"죽어라!"
"하앗! 창궁마예(蒼穹魔刈)!"
매난국죽 사혈비는 능조운을 검권(劍圈)에 휘감기 시작하는데, 능조운의 환한 미소는 그러한 상태에서도 사그러들지 않았다.
"여자가 칼을 휘둘러 대는 것은… 볼썽사납다."
손이 쳐들렸으며, 그 손은 너무나도 우아한 곡선(曲線)을 허공에 그었다.
팟- 팟- 팟-!
거의 동시에 네 곳에서 피꽃이 피어올랐다.
매난국죽 사혈비의 미간(眉間)에는 찬란하게 피어난 한 송이 죽음의 꽃이 새기어져 있었다.
미간혈화(眉間血花).
꽤 오랜만에 재현된 고금십야의 살인 절기이다.
사혈비는 백치처럼 멍한 눈빛을 던지며 조용히 나뒹굴었다.
능조운은 조용히 떠나갔다. 그리고 그가 떠나고 나서 한 시진이 지나서야 여명(黎明)이 시작되었다.
실로 찬란하게 깨어나는 아침이다. 밤새 내내 비가 쏟아져 내렸기 때문인지, 회하(淮河)보다도 길게 늘어진 푸른 하늘의 거울(鏡)은 너무나도 깨끗하게 닦이어 있었다.
도도히 흐르는 회하 가.
한 채의 고옥이 죽림에 안기어져 있다.
천문재(天文齋).
천문서각의 주인이 머물러 살고 있는 곳이다. 그 곳은 시정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으로서, 외부인의 출입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천문재의 뜨락 가득히 수선화(水仙花)가 피어 있다.
능조운은 일각 전에 불쑥 모습을 나타냈으며, 차 한 주전자와 만두 네 개로 아침을 때우고는 뒷짐을 진 채 뜨락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의 뒤쪽에는 흑포를 걸친 무사가 서 있는데, 그의 낯색은 석고를 방불시키고 있었다. 그는 능조운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키는 시위무사를 자처하고 있는 단류흔이었다.
"주공(主公),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무엇을?"
"악마의 무리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속하와 함께 계시어야 합니다.“
"지난 저녁, 슬쩍 사라져 걱정이 많은 듯하군?"
"속하, 꽤나 심려하였습니다."
단류흔이 근엄한 표정으로 말할 때, 능조운은 손가락으로 꽃을 가볍게 건들며 하이얀 이를 드러내었다.
"훗훗… 앞으로는 그러한 일이 보다 많아질 걸세."
"예… 예?"
"상인에게는 거래의 비밀이라는 것이 있지. 아마도 자네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네. 훗훗……!“
능조운은 환하게 웃었다.
지난밤, 그는 황금신붕의 위력을 확인한 바 있었다.
황금신붕을 타고 다닌다면 폭풍대장정은 한결 쉽게 달성이 될 것이다.
'황금신붕은 대막청랑(大漠靑狼)과 더불어 천하쌍수(天下雙獸)라고 불린다. 영리하기로 말하자면, 대막청랑 쪽이 더하다.‘
대막청랑.
징기스칸의 무덤을 지키는 푸른 이리이다.
과거, 잠룡비전으로 날아 내려 초옥린과 함께 사라져 갔던 푸른 이리가 바로 대막청랑이었다.
대막청랑은 악마동맹의 최고자만이 타고 다닐 수가 있다.
만에 하나, 능조운이 그 날 초옥린에게 천랑벽(天狼壁)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대막청랑의 임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석대숭은 능조운 대신에 초옥린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운 녀석들……!'
능조운은 푸른 하늘에서 아홉 소년소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날 저녁이었다. 능조운은 하나의 죽간(竹竿)을 어깨에 멘 채, 서재를 나섰다.
단류흔은 그 때까지 문 밖에 서 있다가 넙죽 허리를 숙였다.
"낚시를 가시려고요?"
"그렇네. 한 사흘 걸릴 걸세."
"속하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러할 필요는 없네. 자네는 여기에서 할 일이 있네. 내가 정리하다 만 서류를 정리하는 일이 그것이네.“
"어이쿠! 속하, 책을 보는 일이라면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을 아시면서 속하에게 그러한 일을 시키시다니…….“
단류흔은 울상이 되고 말았다.
능조운은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초립을 쓰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 가고 있으며, 강 쪽에서는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운이 좋다면 잉어탕을 끓여 먹을 수 있겠지."
능조운은 상큼한 웃음을 지으면서 걸음을 내딛었다.
휘청… 휘청……!
술에 취한 듯한 걸음걸이였다.
단류흔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장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능조운이 자신을 단 일 초에 제압할 수 있는 고수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능조운의 뛰어난 점이었다.
단류흔 정도의 일류고수를 철저히 속일 수 있다는 것만 하더라도, 그는 하나의 기적을 이룩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떠난 서재의 벽.
중원의 지형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 하나의 벽이 있다. 그 곳에는 두 번째의 파흔(破痕)이 새겨져 있었다.
운남(雲南), 장천마교(藏天魔敎).
그 지점이 검게 그을려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는 그 곳을 향해 가고자 한단 말인가?
두 번째의 밤을 이룩하기 위해!
운남(雲南)에 대해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한다.
- 지무삼리평(地無三里平) 인무삼분전(人無三分錢)… 삼 리 넘게 이어지는 평지가 없으며, 사람들은 단 세 푼의 돈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운남지방은 그 정도로 험악한 곳이었다.
가도가도 끝나지 않는 기봉준령(奇峰峻嶺)은 지금 자욱한 새벽안개에 뒤덮여 있었다. 어찌나 짙은 안개인지 삼 보 앞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였다.
안개는 거검(巨劍)을 곧추박은 정봉(頂峯)의 허리께를 휘어 감으면서 아래쪽 능선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통 안개는 바람이 강할 경우 바람에 날려 흐트러지기 마련인데, 지금 흐르는 안개는 바람이 아무리 강하게 불더라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설마, 이 깊은 산 속에 절진(絶陣)이라도 펼쳐져 있단 말인가?
그르르릉-!
산이 우는 소리일까?
산정(山頂) 부분에서는 우레 소리와는 또 다른 소리가 쉴새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아, 그 곳.
언제 세워졌는지 모를 하나의 고성(古城)이 세워져 있었다.
핏빛의 기와를 이고 있는 거대한 성.
짙은 안개는 성의 내부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으며, 인근 십오 리(里) 방원 안을 완전히 휘어 감았다.
보라! 성문 주위에 널려 있는 고루 강시(彊屍)들을.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강시들이 성 안으로 들어서는 백색(白色) 대로(大路) 좌우에 널브러져 있었다.
사기(邪氣)가 짙게 감돌고 있는 곳.
이 곳은 바로 장천마교(藏天魔敎)의 아성이었다.
장천마후(藏天魔侯) 탁특뢰(卓特雷).
그는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이해, 그의 세 치 눈썹이 흉칙하게 꿈틀거리는 것일까?
그는 마뇌음사(魔雷音寺)의 마공을 배운 인물로서, 천마십후(天魔十侯) 가운데 제구위자(第九位者)였다.
한때에는 적룡왕부(赤龍王府)로 잠입해 들어가 그 곳의 화약 제조술을 훔쳐 내었으며, 천축국(天竺國)에 가서 악마동맹의 분타를 설치하는 혁혁한 공로를 세운 바 있다.
"울화림이 붕괴되면… 본교마저 위태로워진다."
그는 식전에 한 장의 밀지를 건네받았다.
그것은 비응전서(飛應傳書)로 날려 온 것으로, 그 내용으로 인하여 장천마후 탁특뢰는 식욕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울화림주, 의문의 주검으로 화함! 자세한 사정은 추후에 다시 통고하겠음.>
실로 머나먼 곳에서 전해진 밀지이다.
울화림의 여왕봉, 울금란의 죽음.
강호는 죽음이 흔한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호인들의 목숨을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방울로 비유하곤 한다.
"울금란, 꼭 한 번 품어 보았을 뿐이나… 그 아름다운 동체를 쉽게 잊지 못하였지. 한데, 시체가 되다니……!“
장천마후는 쓰디쓴 표정을 지었다.
십대마후 가운데 말석을 차지하고 있던 울금란의 죽음은 천하도처에 퍼진 악마십화세의 지도자들에게 신속한 경로를 통해 전달이 되었다.
"마의 아성은 실로 거대하지. 하나의 희생자가 나는 것은 그리 큰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
장천마후는 나름대로 천기(天機)를 보는 인물이었다.
그는 마의 승리를 철석같이 믿었기에, 자신의 모든 세력을 이끌고서 악마무후 휘하로 들어선 것이다.
한데, 지난 저녁이었던가?
그는 세 명의 미첩과 번갈아 정사를 벌인 다음, 소피를 보기 위해 뜨락으로 나섰고… 그 때 너무나도 놀라운 천기를 보았던 것이다.
묵궁(墨穹)을 가르며 떠오른 하나의 빛.
그 빛은 야음(夜陰)을 환히 밝힐 정도로 강렬했었다.
일순 사라지고 만 성광(星光)이었으되, 장천마후는 그 빛의 엄숙한 위용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컬어 천광신홀(天光神笏)이라는 것이었다!"
짙은 안개 가운데 하나의 그림자가 바람처럼 이동해 가고 있었다.
거의 소리도 없이 안개의 바다를 가르고 나아가는 자, 그의 왼쪽 어깨에는 청죽간(靑竹竿)이 하나 걸쳐져 있었다.
'장천마후는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을 자랑하고 있는 자이다. 그리고 마도에서 거성(巨星)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스팟-!
유성처럼 그는 허공을 가르며 나아갔다.
그가 시전하는 신법은 무향이십구류(無香二十九流)라고 불리우는 신법으로, 바람을 타고 미끄러져 나가는 은잠술이었다.
초립이 얼굴을 절반가량 가리고 있는데, 초립 아래로 보이는 아래턱이 매우 아름다운 선과 면을 이루고 있었다.
'울금란은 미색으로 십대마후에 끼여 들었으나, 장천마후는 진실된 마공으로 마후 자리에 올라섰다.‘
아아, 능조운.
황금신붕을 타고 회하의 하늘로 떠오른 능조운은 꼬박 하루 내내 새를 타고 비행한 결과, 운남 깊은 곳에 날아 내릴 수 있었다.
장천마교는 악마십화세 가운데 가장 남단에 자리 잡고 있다.
능조운이 제이의 표적으로 그 곳을 선택한 이유는, 악마동맹 전체를 대경동(大驚動)시키기 위함이었다.
병법(兵法)을 익힌 사람들은 삼십육계(三十六計)를 알며, 그 가운데 타초경사(打草驚蛇)의 병법을 알고 있다.
- 자칫 풀을 잘못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지 말라!
타초경사는 성급한 행동을 자제시키는 율법이었다. 하나, 능조운은 그것을 역(逆)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장천마후를 제거한다면, 악마동맹이 대동요하리라. 훗훗, 그러한 가운데 그들은 실체를 드러내게 되리라.‘
능조운은 악마의 안개를 가르며 잠입해 들어갔다.
일대에는 꽤 많은 무사들이 머물러 있는데, 능조운이 유유히 잠입해 들어가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묘시(卯時) 초(初)이다.
경천마교가 가장 활발하게 깨어나는 시각이며, 장천마후가 친히 연무장(練武場)에 나타나서 수하들에게 마공을 재현해 보이는 시간이기도 했다.
장천마교에는 사천(四千)에 달하는 무사들이 머물러 있다. 그들은 이곳에서 마공을 익힌 다음, 천하도처에 퍼진 악마십화세로 거처를 옮기게끔 안배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흐리멍텅한 눈빛들이다.
피가 묻은 연무복을 걸치고 있으며, 수중에는 철검(鐵劍)을 한 자루씩 지니고 있다.
흐느적거리며 걷는 무사들. 이들은 잡다한 신분내력을 갖고 있으며, 장천마교 사람이 되기를 바란 사람들보다는 바라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무공을 익히는 사람들의 눈빛은 강렬하기 마련인데, 연무장을 그득 메우고 있는 자들의 눈빛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가히, 회색의 눈빛.
그것은 그들이 마약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증거이기도 했다. 장천마교에서는 강호의 영재들을 납치해 마약중독자로 만들어 하수인으로 화신시키는 것이다.
삘리리리… 삐리리리……!
귀기 서린 소성(簫聲)이 흐른다.
꾸역꾸역 모여들던 악마의 제자들은 철검을 쳐들며 환호하기 시작했으며, 환호성은 합창이 되어서 드넓은 연무장을 우레 소리로 휘감아 버렸다.
"카아아… 카아아……!"
"우우우……!"
포효하는 듯한 고함 소리.
철검을 쳐들고 있는 무사들의 눈빛은 핏빛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사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들이다.
많아야 열일곱 정도. 대부분의 무사들은 기껏해야 십삼사 세에 불과했다. 그들이 피에 굶주린 늑대의 눈빛이 되어 환호를 시작할 때, 구층(九層) 탑(塔) 쪽에서부터 한 무더기 핏빛 구름이 둥둥 떠서 나타나고 있었다.
악마의 소성은 그 곳에서부터 들려왔다.
정확히 묘시(卯時).
장천마후는 등풍비행공(登風飛行功)과 혈영마공(血影魔功)을 동시에 시전하며, 거만하고 당당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강호를 피로 씻을 이리들!"
장천마후는 수많은 소년무사들을 보자, 아까까지 뇌리를 지배하던 암울한 생각을 씻어 버리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 무더기 붉은 바람을 일으키며 연무장 한가운데에 마련된 단상(壇上)으로 날아올랐다.
마치 제왕(帝王)인 양.
그의 머리 위에는 면류관이 씌워져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높이 쳐들며 날아 내렸으며, 이제까지 환호하던 소년무사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장천마후, 적어도 이곳에서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는 팔백 교두들과 더불어 수많은 영재들을 악마의 후예로 기르고 있는 입장이었다.
우람한 몸뚱이는 혈옥(血玉)처럼 단단해 보였다.
장천마후는 핏빛 안광을 폭사시키며 사방을 쓸어 보았다.
누구도 그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할 정도로 그의 눈빛은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대들은 마룡(魔龍)이 되리라!"
"……."
"……."
"항차 강호천하가 그대들에 의해 피로 씻길 것이다. 훗훗, 그 날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참아야 한다. 용맹한 마룡의 무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수하여야만 한다!"
웅휘롭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가공스러운 마공이 스미어 있는지라, 인근의 건물들이 목소리에 의해 들썩거릴 정도였다.
소년무사들의 눈에는 진심으로 그의 마공을 찬미하는 경이의 빛이 떠올랐으며, 잠시 동안 끊어졌던 환호성이 다시 시작되었다.
"와아아… 와아아……!"
"카아아… 카아아……!"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소년무사들. 그들의 환호성은 끝도 없이 이어질 듯했다.
만에 하나, 그가 연무장 사이의 대로(大路)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오지 않았더라면… 환호성은 일각 내내 이어졌을 것이다.
저벅… 저벅……!
"꼭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는 큰 걸음으로 연무장 한가운데로 접어들고 있었다.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는 청년, 그는 죽간 하나를 어깨에 떠멘 채, 장천마교의 연무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일 보를 내어 디딜 때마다 십여 장씩을 미끄러졌으며, 환호하던 소년무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입을 쩌억 벌린 채 숨을 죽였다.
홀연히 나타난 자, 그의 입매에는 아주 밝은 미소가 맺히고 있었다.
"나도 과거에는 너희들 같았었지. 과거 한때에는…….“
묘한 웃음을 던지며 접어드는 자는 능조운이었다.
장천마교 둘레에는 아홉 개의 관문이 있었으나, 그 어떠한 것도 능조운을 가로막지 못한 것이다.
기(氣)…….
절정고수라면 상대방에게서 기를 느낄 수 있다. 느끼어지는 기는 무공이 강할수록 강하게 여겨지는 법이다.
단상에 서 있던 장천마후는 능조운이 백 장 안으로 다가설 때, 몸이 태산(泰山)에 깔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무서운 힘이다.'
그의 장포가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질식할 듯한 분위기가 시작되었으며…….
차앙- 창-!
"저 자를 베라!"
"외부의 순찰들이 모두 장님이로군. 잠입자가 버젓이 대로를 따라 들어서는 데에도 막지 못하다니.“
"카카… 진짜 살인은 이러한 것이다! 잘 보아라."
휘휙휙휙-!
백여 명의 혈포인(血袍人)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으며, 사람 수와 같은 숫자의 귀두도(鬼頭刀)가 허공 가득 도기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치리리릿- 치릿-!
악마혈천도세(惡魔血天刀勢).
귀검마혼류(鬼劍魔魂流), 잔음칠십이홍(殘陰七十二虹), 천리혈화도(千里血花刀).
소년무사들은 자신들이 이 년 내내 익힌 초식들이 능숙한 솜씨로 인해 시전되는 것을 바라보았으며, 능조운의 몸이 혈포인들의 몸뚱이로 인해 문득 감추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까지 보았던 어떠한 광경보다도 가공스러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슷-!
은선(銀線)이 날아오른다.
예도(銳刀)의 날(刃)보다도 가는 낚싯줄이 허공으로 쭈욱 치솟아 오르더니, 돌연 무수한 은색 원호를 허공 가득히 그리기 시작했다.
팽글팽글 바람개비가 돌아가듯, 은색의 원이 무수하게 만들어지더니… 십 장 안이 찰나적으로 은빛에 휘어 감겼다.
투둑- 툭- 툭-!
대체 이럴 수가?
신처럼 군림하던 마검교두(魔劍敎頭)들이 어찌 저렇듯 형편없이 떨어져 내리는 것일까?
혈접(血蝶) 떼가 날아 내리듯, 백사십오 명의 교두들은 피비 가운데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소년무사들은 교두들이 널브러진 이후에야 능조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는 죽간을 왼손에 쥔 채 걸음을 내디디고 있는데, 죽간에 매달린 은사 끝에 정확히 한 방울의 피가 맺혀 있었다.
그가 시전한 초식은 암흑일점홍(暗黑一點紅).
역시 마접의 살예(殺藝)였다.
그것은 완벽(完璧)한 예술과도 같았다.
능조운은 일필(一筆)을 휘저어 수묵화(水墨畵)를 그리는 듯한 동작 가운데, 마검교두들을 모조리 베어 버린 것이다.
암흑일점홍의 위력은 능조운 자신마저 놀라게 할 정도로 가공스러웠다.
능조운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소년무사들은 그가 또 한 차례 포위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림없다. 네놈이 어떠한 사술을 썼는지 모르나, 이제는 사술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피빚은 피로 갚아야 하는 것이다."
핏빛 파도처럼 달려드는 자들. 그들은 장천마교의 호법 이상 가는 자들로서, 하나같이 납처럼 칙칙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숫자는 일흔둘, 그들은 능조운의 전후좌우를 일순 포위해 버렸다.
그리고 능조운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그래, 피빚은 피로 갚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오른손을 천천히 쳐들었다.
그의 손바닥은 뼈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반투명해졌다.
휘휙휙-!
칠십이 장천호법이 사방을 포위하며 날아들 때, 능조운의 손바닥에서는 등불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몽롱한 녹광(綠光)이 아른거리며, 연화(蓮花) 송이 같은 빛더미가 허공으로 피어 올랐다.
하나, 둘……!
등(燈)은 아홉 개 거듭해 허공에 나타나더니, 능조운의 머리 위쪽에 구궁진(九宮陳)으로 떠올랐고… 일순, 그 빛을 사방으로 확산시켰다.
"구마잔혼등(九魔殘魂燈)-!"
능조운이 가볍게 외치는 찰나, 아홉 개의 등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한순간, 너무나도 강렬한 빛줄기가 방원 일백 장 안을 휘황찬란하게 밝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홉 개의 등은 하나하나 내공정화(內攻精華)였다.
능조운은 마도절예에 대해 통달한 인물이었다. 비록 그가 마공을 시전하지 않기는 하되, 악마동맹의 마공에 대해 그보다 해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할 수 있었다.
호법들이 시전하는 마공은 능조운이 익히 아는 수법들이었다.
능조운은 마공의 파해법을 지난 이 년에 걸쳐 연구한 바 있는지라, 마공을 실로 간단하게 격파해 냈다.
"케에에엑……!"
"으윽! 강호에 네놈 같은 고수가 있다니?"
츠으으- 츠으으-!
사방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구마잔홍등이 시전되는 가운데, 칠십이 인의 마도호법은 시커먼 숯덩어리가 되어 나뒹굴고 마는 것이다.
능조운은 손을 쳐든 상태였다.
그는 상당히 쓸쓸한 눈빛을 던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고금십야공의 위력이 너무나도 처절한 결과를 야기시켰기 때문이었다.
'강호의 대지여! 나로 인해 피에 젖게 되는구나. 아아, 대지를 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그가 천천히 손을 내릴 때, 사방에서는 환호성이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와아아… 신의 절기이다."
"우우, 가히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다."
넋 나간 얼굴로 바라보던 소년무사들은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하였으며… 그 중에 어떤 소년은 가공스러운 절기에 매료된 나머지,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들이 잠룡비전의 소년소녀들과 흡사한 상태이지 않았더라면, 능조운은 지극히 조용한 암살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소년무사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우울한 과거를 보았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살기를 폭발시키고 만 것이다.
장천마후는 묘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
그는 소문대로 대단한 인물로, 능조운이 자신의 휘하무사들을 잇따라 척살하는 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능조운이 자신을 향해 다가섬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쫘악 펴는 것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자상한 미소가 머금어지기까지 했다.
"훌륭하군. 중원무림에 그대 같은 승부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었네.“
"과찬이오."
"훗훗… 대단해. 일당천(一當千)이야. 그러나 그 정도 실력으로 본좌를 죽일 수는 없다. 본좌를 죽이기 위해서는, 두 배 더 강해야 한다.“
장천마후는 손으로 가슴을 힘차게 두들겼다.
쿵-!
큰북 치는 소리가 들렸으며, 그의 뼈마디가 우두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본시 거대한 체구인데, 통비유가마공(通臂瑜伽魔功)이 시전되며, 신체가 본래보다 두 배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래, 두 배 더 강해야 본좌의 금강불괴지신을 깨뜨릴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네놈이 어떠한 수법을 쓰던, 본좌의 신체에 흠집을 내지 못한다!“
장천마후는 사악하게 외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가 마공을 시전하며 무수한 분신을 만들어 낼 때, 능조운은 꽤나 느긋한 자세에서 오른손을 떨쳐 내고 있었다.
"바란다면… 두 배 강하게 쳐 주지. 봐라."
그의 손은 우아한 곡선을 끌며 한 자 정도 이동했다.
허무일도(虛無一刀).
신승 초의(草衣)가 창안한 절기이다.
타종할 때의 손동작이 시전되었으며, 옥수(玉手)의 끝에서는 둔팍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퍽-!
둔팍한 소리와 함께 장천마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보라! 그의 양 미간(眉間)에 붉은 점 하나가 찍히어 있지 않은가?
그것은 그의 천령개(天靈蓋)를 부쉈으며, 그의 뇌수(腦髓)를 찰나적으로 바수어 버렸다.
허공에는 장천마후가 죽기 전에 토한 말이 메아리쳤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말이었다.
- 아까 시전한 무공은 너의 오 성 전력에 불과했었군?
죽음의 상인(商人).
그는 강호를 일약 폭풍에 휘어감아 버렸다.
울화림주가 제거되었고, 장천마교주가 어처구니없이 으스러졌다.
영웅검막주(英雄劍幕主)와 월하마궁주(月下魔宮主)도 비슷한 수법에 의해 쓰러지고 말았다.
겉보기엔 지극히 고요하던 무림계는 그의 출현으로 인해 발칵 뒤집어지게 되었다.
강호거상(江湖巨商).
그는 신화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만에 하나, 그를 막지 못한다면 악마동맹의 기반은 철저하게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휘리리리링-!
강한 바람이 북원(北原)을 강타하고 있다.
유월(六月)의 깊어 가는 날, 북천고원(北天高原)으로 백여 마리 매(應)가 날아들고 있었다.
꽤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난 듯, 매는 지친 날갯짓을 하면서 북천고원 깊은 곳에 세워진 하나의 거대한 성채(城砦)로 날아드는 것이다.
목에 철통(鐵筒)을, 철통 안에는 밀지를 담은 채로.
<울화림주를 살해한 자와 장천마후를 살해한 자는 동일인물로 밝혀졌으며, 그는 바로 강호거상(江湖巨商)이라는 자입니다!>
<울화림은 울금란 림주의 죽음으로 인해 세력 기반이 반 넘게 붕괴되었으며, 장천마교의 몰락은 심한 타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강호거상이라는자는 장천마교에서 악마수업(惡魔修業)을 받던 사천마룡(四千魔龍)에게 하나의 청명심법(淸溟心法)을 전수하였는 바, 그로 인해 지난 이 년 간 그들에게 전한 마혼(魔魂)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즉시 강호거상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흑도(黑道)의 본맹에 대한 지지는 와해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를 제거하여 우리들의 힘을 천하무림계에 보여 주여야만 합니다!>
무수한 밀지들은 황금으로 이루어진 방 안으로 전달되었다.
그 곳은 천하에서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장소였다.
하나의 고영(孤影).
금빛에 휘어 감겨 있는 인물 하나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벌레들! 이단자 하나를 막지 못하고 쓰러지다니……!“
금색 고영의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눈빛이 폭사되어 나왔다. 가히 강철을 녹일 눈빛이다.
그는 쪽지를 구겨 쥐면서 발을 세게 굴렀다.
쿵-!
황금의 방이 뒤흔들렸으며, 바닥에 세 치 깊이의 족인(足印)이 패여졌다.
"어이해,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 하나 막지 못한단 말인가? 잠룡비전이 붕괴하며 강호의 절대자들은 거의 다 제거되어, 이제까지 한 번의 방해도 없었거늘……!“
눈빛은 점점 더 흉맹스러워졌다.
악마무후(惡魔武侯) 사엽풍(史葉風).
그는 마도의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는 자이다.
그는 원(元)의 후광 가운데 악마동맹을 창건하였으며, 십대악마화의 세력을 강호십지에 구축한 채 제왕을 능가하는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사엽풍은 절대적인 효웅(梟雄)이었다.
그는 스스로 나서지 않는 상태에서 천하무림의 반을 거머쥐었으며, 사해팔황(四海八荒)의 마도세력을 하나로 규합하는 업적을 달성한 바 있었다.
그는 이제까지 한 번의 방해도 받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실로 가공스러운 방해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강호거상.
그는 차츰차츰 살아 있는 신화며, 존재하는 공포로 화하고 있었다. 전 마도무사들은 그가 방문하는 것을 공포로 여겼으며, 그를 만나는 자는 모조리 죽는다는 불문율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천마대성(天魔大城).
고요함 가운데 천하마도를 배후 조종하던 장소였는데, 강호거상의 출현에 대한 세세한 소식이 알려지며 천마대성의 공기는 험악하게 변화되어 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