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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장 보표무정(保-無情)
운명(運命)이란 처음부터 모두에게 정해진 것일까?
마치 그것은 언제나 악을 무찌르는 것으로 끝나는 연희단(演戱團) 패거리들의 경극(京劇)처럼 정해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일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어떤 것.
벗어나려는 노력조차 그 각본의 일부.
그래서 절벽에서 발을 헛디딘 누구는 천년설삼(千年雪蔘)밭을 뒹굴어 천하제일 고수가 되고, 그 보다 백배는 더 지독한 세상의 모든 절망과 통한을 가슴에 담은 채 절벽에 몸을 내던진 어떤 이는 이름 모를 계곡의 차디찬 백골로 남게 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 요상한 운명의 각본이 태호의 한 객잔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태호의 선화객잔.
새하얀 머리카락, 한 자루의 붉은 창.
창왕(槍王) 악주해
그는 객잔의 한 쪽 가장자리에 앉아 말없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차분한 모습.
그는 정확히 세시진 후 그의 독문무공인 회선창법(回旋槍法)의 제 오초식(五招式) 광풍멸사(狂風滅邪)를 사용해 선화객잔의 한쪽 벽면을 날려버릴 것이다.
벽은 통째로 날아갈 것이고 그 무서운 폭풍 같은 기세가 누군가를 덮치게 될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그것은 단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한 뜨내기 낭인의 시비에 대한 응징일 뿐이었지만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줄은 결코 알 수 없었다.
설령 미리 알았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창을 휘두를 것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의 인생 따윈 생각해 본적이 없거니와 결국 그것은 자신의 운명. 스쳐지나가는 다른 운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 운명의 한 조각이 아직은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 * *
따스한 감촉.
우이는 볼을 어루만지는 그 기분 좋은 햇살의 따스함을 한가로이 즐기고 있었다. 우이가 쪼그리고 앉은 곳은 번잡한 무림대회장을 조금 벗어난 외곽지역이었다.
오랜만에 올려다보는 하늘이었다.
그의 옆에서는 과파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고 우이는 거의 포기 상태였다.
어차피 무림대회장에서 과파를 판다는 것은 무리였고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과파를 다 팔 수 있으리라고 생각도 않았다.
결국 우이는 영춘에게 잔소리 들을 각오를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나가던 몇 몇의 사람들이 우이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삶에 지친 과파 파는 청년의 여유로운 휴식, 그 이상의 관심은 가지질 않았다.
멀리서 드려오는 들려오는 함성소리.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
우이는 이 간만의 나른한 휴식을 맘껏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우이를 향해 다가왔다.
“파는 거요?”
준수한 인상의 사내였다.
“아, 물론입니다.”
우이가 일어나 황급히 과파를 포장하려 하자 사내가 가볍게 제지하며 우이 옆에 앉았다.
“볕도 좋은데 그냥 여기서 몇 개 먹고 갑시다.”
사내의 자연스런 행동이 섬뜩한 느낌으로 우이에게 다가왔다.
‘고수!’
우이의 본능이 강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담백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차가움이었다.
담백의 차가움이 어떠한 다른 이질적인 감각(感覺)의 뒤섞임을 용납하지 않는 절대적인 차가움이라면 사내의 차가움 속에는 열정이라 불릴만한 맹렬한 뜨거움이 숨겨져 있었다.
우이는 자신의 본능을 자극할 정도의 고수가 이토록 젊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내는 바로 위지천이었다.
우연히 지나치던 위지천이 우이에게 다가 선 것도 봄볕에 졸고 있는 과파장사에게서 결코 느낄 수 없는 그러한 존재감(存在感)때문이었다.
그냥 지나쳐 갈 수 없는 어떤 끌림.
위지천 역시 그 낯선 당혹감에 당황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표정에는 전혀 그러한 내색이 드러나지 않았다.
우이가 과파를 한 접시 건넸고 위지천이 과파를 하나 집어 먹었다.
“맛있소.”
“솜씨 좋은 숙수가 만들었으니까요.”
잠시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우이의 눈빛이 하늘에 닿아 있다면 위지천의 눈빛은 바다처럼 깊었다.
하늘과 바다가 만들어 내는 끝없는 지평선처럼 두 사람의 시선이 이어졌다. 잠시 서로를 응시하던 시선이 일몰(日沒)과 함께 사라지는 지평선처럼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
위지천은 과파에 집중했고 우이는 다시 떠가는 구름에 눈을 맞추었다.
한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이들이 그들 앞으로 달려 온 것은 위지천이 네 개째 과파에 손을 가져가던 그 때였다.
장난기 가득한 아이들.
아이들의 손에는 밤새 아버지를 졸라 만든 자신들만의 천하제일검이 들려 있었다.
무림대회는 어른들만의 행사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두 패로 갈라선 아이들.
“이 마교의 개들! 정의의 검을 받아라!”
한쪽 아이들이 합창하듯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교의 개라 불리기에는 너무나 어리고 귀여운 녀석들이 합창을 했다.
“감히 마교에게 대들다니. 이 무림맹의 졸개들아!”
아이들의 정사대전은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녀석들의 말은 거침이 없었고 마치 연습이라도 하고 나선 듯 척척 들어맞았다 .
그 모습에 우이와 위지천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빌면 용서해 주겠다.”
“마교는 죽을지언정 무릎은 꿇지 않는다.”
그 말에 다시 우이와 위지천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정해진 대사는 그 정도였는지 드디어 아이들의 정사대전이 시작되었다.
“공격!”
“덤벼라!”
-딱! 딱!
부딪치는 목검들.
처음에는 그저 목검을 갖다 대는 수준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과열(過熱)되기 시작했다.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검들.
-딱딱딱!
그러다가 마교의 검 하나가 잘못 휘둘러졌다.
“아얏!”
팔목을 부여 쥐고 뒹구는 아이.
그러나 정작 놀란 아이는 검을 휘두른 아이였다.
아이가 팔을 붙들고 뒹굴자 놀란 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미안,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으앙!
-흑흑!
이어지는 두개의 울음소리.
맞은 아이가 더욱 크게 울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팔목을 크게 삔 모양이었다.
우이가 벌떡 일어나려다 순간 위지천의 존재를 인식하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마치 그것은 과파를 파는 주제에, 그래서 저 아이의 아픔을 해결해 주지도 못하면서 나서려 한 것에 대한 민망함이 깃든 눈빛이었다.
위지천이 잠시 말없이 우이를 응시했다.
그 속 보이는 우이의 행동에 위지천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위지천은 우이의 그 눈빛을 믿어 주기로 했다는 듯 벌떡 일어나 아이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우이도 그 뒤를 따랐다.
“팔을 이리 내밀어 보거라.”
위지천이 다친 아이의 팔을 만져 주자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토록 아프던 팔이 거짓말처럼 멀쩡해졌던 것이다.
고통이 사라지자 아이가 위지천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여유도 없이 분했는지 담아두었던 말을 자신을 때린 아이에게 쏟아냈다.
“마교가 이러면 어떡해? 마교가 져야지.”
그러자 검을 잘못 휘둘렀던 아이가 눈물을 닦으며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교라고 맨 날 지란 법 있어?”
그 말에 다시 다쳤던 아이가 말했다.
“그럼 마교가 이겨? 그럼 우린 다 죽는다고 아빠가 말했단 말야. 너 마교 편이야? 정말 죽고 싶어?”
“…그건 아냐.”
그 말에 마교 쪽 역할을 했던 아이가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그때 우이가 다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교라고 다 나쁜 사람들은 아니란다.”
우이의 말에 아이들의 시선이 우이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 눈빛들에는 강한 불신(不信)이 담겨 있었다.
“…정말요?”
“그래.”
“마교 놈들은 다 나쁜 놈들이라고 했어요.”
아이들은 여전히 수긍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럼 마교가 좋은 편이면 무림맹 무사들과 왜 싸워요? 그럼 무림맹이 나쁜 쪽인가요?”
그 말에 우이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의 논리란 흑백(黑白)의 논리. 그 두 색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색들을 어찌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다. 무림맹이 좋은 쪽이란다. 마교는 나쁜 편이지.”
위지천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다시 아이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말에 힘을 얻은 아이들이 우이에게 보란 듯이 말했다.
“거봐요. 아저씨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이들의 말에 우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아저씨가 잘못 알았나 보다. 대신 이거 하나씩 먹어라.”
“우와!”
우이가 과파를 하나씩 나눠줬고 생각도 않은 횡재에 아이들의 입이 한껏 벌어졌다.
언제 싸웠냐는 듯 아이들이 과파를 오물거리며 다시 몰려갔다.
다친 팔도 잊고 또 다시 정사대전을 시작할 것이다.
그 모습을 우이와 위지천이 말없이 지켜보았다.
“나쁘지 않은 마교인을 본 적 있소?”
문득 위지천이 우이에게 말을 던졌다.
우이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전 고작 과파를 파는 사람일 뿐입니다.”
다시 얽히는 두 사람의 시선.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위지천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보며 우이가 환하게 웃었다.
세상을 살다보면 손이라도 한 번 맞잡아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 마련인 법이다.
…그러나.
위지천이 문득 저 멀리 칼싸움을 하며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도 내일도 아이들은 매일 패를 갈라 싸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언제나 친구일 것이다. 적어도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잘 먹었소.”
값을 치룬 위지천이 발걸음을 옮겼다.
우이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그저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 * *
소향이 담린과 남궁소천을 데리고 무림대회장을 찾은 것은 세 번째 예선조의 출발로 비무대회의 열기가 더욱 뜨거워진 그 즈음이었다.
태호에 무림맹 일행들이 도착했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혁월을 찾아 갔어야 했음에도 소향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조금 더 시간을 달라는 연락을 보냈고 소향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혁월이 흔쾌히 허락했던 것이다.
소향은 맹으로 귀환할 면목이 없었다.
비록 연화소저를 호송하는 임무는 결과적으로 성공했다고 해도 제갈혜가 실종된 상태였다. 게다가 담린은 하루빨리 우이를 찾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 지경이 아닌가?
그 모든 것이 불가항력(不可抗力)적인 일들이었다고 위안하기에는 소향의 성격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후배들을 위험에 빠뜨린 것은 결국 자신의 책임이었다.
거기다 담린과 권왕을 해친 흉수의 정체도 아직 밝혀내지 못한 상태였다.
담린의 말에 의하면 나이어린 소녀였다고 하지만 권왕을 살해할만한 어린 소녀는 자신이 아는 한 강호에 존재하지 않았다.
‘과연 권왕을 해친 흉수는 누구며 그 소녀는 또한 누구일까? 그리고 왜?’
사람들의 물결 사이를 걸으며 소향은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그렇게 말없이 걷던 중 처음으로 침묵을 깬 것은 남궁소천이었다.
“엄청나군요.”
남궁소천이 사람들의 물결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소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니까.”
그 말에 남궁소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향이 말한 오랜만이란 의미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긴 세월동안 강호는 정사대전이라는 너무나도 독한 몸살을 앓아왔다.
강호인들은 이번 무림대회가 그 긴 몸살을 털고 일어날 계기가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기분은 좀 어때?”
소향이 담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좋습니다.”
담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게 억지미소란 것을 소향도, 남궁소천도 알 수 있었다.
소향은 담린에게 조만간 그를 치료할 사람을 찾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많이 망설인 결정이었지만 소향은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담린의 반응은 담담했다. 오히려 그런 의외의 반응이 소향과 남궁소천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귀맹(歸盟)하지 않으실 작정입니까?”
이번에는 남궁소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향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지만 이내 소향이 고개가 끄덕여졌다.
“제갈혜를 찾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 말에 담린과 남궁소천의 표정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그때 저 멀리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들리는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
“싸움이 났나 봅니다.”
“하루라도 칼질을 안 하면 소화가 안 되는 자들이 있지.”
소향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구경하다 너희들 먼저 들어가. 난 잠시 만날 사람이 있어.”
남궁소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아침 일찍 나간 위지천과 만나기로 한 모양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어?”
담린의 발걸음을 딱 멈춰 섰다.
“왜 그래?”
남궁소천의 물음에 담린은 대답도 않은 채 사람들의 물결을 정신없이 가르며 달렸다.
그의 그러한 행동에 소향과 남궁소천이 조금 놀란 듯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이내 실망한 표정의 담린이 다시 나타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갑작스런 담린의 행동에 놀란 남궁소천이 황급히 물었다.
“그녀를 본 것 같았는데….”
담린의 말에 소천이 놀라 소리쳤다.
“혜아를?”
담린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못 본 것 같아. 그녀가 이런 곳에 있을 리 없겠지.”
그 말에 남궁소천은 가만히 담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 담린의 심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목숨은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사랑하는 사람은 실종된 상태.
한 마디로 최악이었다.
“혜아는 틀림없이 무사할거야. 너무 걱정 마.”
다시 그들이 사람들의 물결 속에 몸을 맡기던 그때 불과 삼십 여장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과파를 다 팔아치운 제갈혜와 단목혜가 객잔을 향해 바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 *
“내 이럴 줄 알았어.”
선잠을 깬 우이의 눈앞에 허리를 굽힌 채 내려다보고 있는 아연의 얼굴이 한가득 들어왔다.
자다 들킨 사람이 마치 시치미를 뚝 떼는 그런 얼굴로 우이가 아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나 가까웠던 탓에 순간 아연의 볼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아연이 황급히 허리를 펴며 말했다.
“사람을 그리 빤히 쳐다보면 어떡해요?”
“난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우이의 뻔뻔한 표정에 아연은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짐짓 화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변태!”
“누명쓴 억울한 변태겠지.”
“흥!”
누웠던 몸을 일으키며 우이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객잔일은 어떻게 하고?”
“달호 아저씨가 오셔서 잠시 맡겨두고 왔어요.”
결국 참다못한 달호가 복대만 남겨두고 기어코 천막객잔으로 왔던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용케 찾았네.”
그러자 아연이 여기저기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이 근처에서 음흉한 냄새가 나더군요.”
우이를 찾아 한참동안을 헤매었을, 그 아연의 농담에 우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연도 자신이 말해놓고도 우스운지 덩달아 함께 웃었다.
우이는 아연이 지금 마음과는 다르게 최대한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이는 모처럼 아연의 환한 웃음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아연의 웃는 얼굴.
제갈혜와 단목혜는 웃지 않아도 아름다웠다.
아연이 까치발을 딛고 발버둥을 치며 필사적으로 웃는다 해도 그녀들의 화난 표정보다도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강호의 미인들을 차지하기 위한 혈투.
그 싸움에서 이긴 자만이 영웅이 되는 시대.
모든 여인들은 아름답기를 바랐고 모든 남자들은 영웅이 되기를 바라는, 어쩌면 미(美)란 환상에 먹혀버린 강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생각이 들자 우이는 철무가 떠올랐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미인에 대한 욕망이 이상하리만큼 없는 철무였다.
왜 그리 미인들에게 관심이 없냐는 물음에 껄껄거리며 철무가 대답했었다.
‘형님, 영웅은 미인을 좋아한다는 말, 그거 다 개소리요. 그게 다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래서 죽어라 겉가죽만 붙들고 늘어지는 머저리들의 말장난 아니겠소? 으하하하!”
우직하고 단순한 철무였지만 여인을 보는 철무의 눈만큼은 신념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우이를 보며 아연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우이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항상 웃을 수 있도록 내가 꼭 지켜주마.’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아연이 물었다.
“과파는 다 팔았어요?”
그 말에 우이가 산더미처럼 남은 과파를 애처로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역시 하나도 못 판 거군요?"
“그게 말이지….”
하나도 못 팔았을 뿐더러 아이들에게 그냥 과파를 나눠 주는 바람에 오히려 적자상태라는 것을 우이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여기에 이렇게 태평하게 누워 자면 과파가 저절로 팔린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요? 누가 몰래 집어가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러자 우이가 장난스런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
“혹시 과파도 좋아하고 양심도 있는 그런 사람이 지나갈지도 모르잖아?”
그 어이없는 말에 아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음, 너무나도 배고픈 소리군요.”
그 뜬금없는 소리에 우이가 되물었다.
“무슨 뜻이야?”
아연이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저씨가 과파를 다 못 판 사람에게는 저녁을 주지 말라 했거든요.”
“정말이야?”
당황한 우이의 얼굴을 보며 아연이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이는 금고 문을 활짝 열어둔 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들을 기다리는 영춘의 얼굴을 떠 올리자 더욱 울상이 되었다.
“좀 도와줘.”
우이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아연에게 매달릴 때 그때 멀리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와아아!
대회장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었다.
함성소리를 듣고 있던 아연이 힘없이 말했다.
“모두들 최고가 되고자 할 때, 당신은 이곳에서 과파를 팔고 있군요.”
갑작스런 아연의 말에 우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최고가 되기를 바라니?”
아연이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미 아연에게 우이는 최고 그 이상이었다. 아연이 그러한 말을 한 것은 혹여 자신이 우이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함성소리가 들려올 때 마다 아연에게 그 소리를 강호가 우이를 부르는 소리로 느꼈다.
-쿠르르릉!
두 사람의 침묵을 깨며 또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함성이 아니라 천둥소리였다.
먹구름이 서서히 몰려들고 있었다.
“비가 오려나 봐요.”
“오랜만의 겨울비네.”
“이 비가 내리고 나면…봄이겠죠?”
“그래. 이제 따뜻해지겠지.”
“….”
“이만 돌아가요.”
“…그런데.”
“네?”
“…저녁은 어떡하지?”
“…바보.”
“벌써부터 배가 고파.”
“…제 것을 나눠 먹어요.”
“흐흐”
“그렇게 웃지 말아요. 정말 바보 같아요.”
두 사람은 그렇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객잔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몰려드는 먹구름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이는 볼 수 있었다.
그 길의 끝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한 여인을.
여인은 바로 소향이었다.
-덜컥.
순간 우이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우이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소향은 아직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우이가 휙 하고 등을 돌렸다.
갑자기 이렇게 소향과 마주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우이였다.
우이가 멈춰선 것도, 그리고 돌아선 것도 모른 채 아연은 생각에 잠긴 채 묵묵히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소향과 아연이 불과 몇 걸음정도의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우이가 반대편으로 몇 걸음 옮겼다.
그리고 그때….
그들에게 준비된 마지막 운명의 한 조각이 맞혀졌다.
-퍼엉!
귀를 찢는 폭음!
“아악!”
동시에 들리는 아연의 찢어지는 비명소리.
순간 우이의 몸이 번개처럼 아연을 향해 돌아섰다.
그 폭음에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아수라장이 되는 그 순간.
순간적으로 우이의 모든 감각이 최고조에 달했다.
온 몸의 모세혈관이 열렸고 몸속을 흐르는 모든 기(氣)가 하나로 통일되었다.
우이의 눈에는 모든 사물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이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연이 걷고 있던 길옆 건물의 한쪽 벽면이 부서져 내리며 맹렬한 강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선화객잔의 한쪽 벽면이었다.
-슈우우우!
우이의 몸이 폭발하듯 아연을 향해 날았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 선 속도였지만 몸을 날리는 순간 우이는 알 수 있었다.
…이미 한발 늦어 버렸다는 것을.
이미 무시무시한 강기가 그녀의 몸을 휘감아가고 있었다.
“안돼!”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던 우이가 절망의 비명을 내질렀다.
우이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리고 한 방울의 눈물이 허공에서 흩어지던 그 순간,
누군가 아연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냥 그대로 지나쳤으면 어쩌면 평생 다시 만나지 못했을 지도 모를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소향이었다.
소향이 순간적으로 아연을 감싸 안았고 벽을 부수고 흘러나온 강기가 소향의 등을 강타했다.
“크윽”
내장 깊숙한 곳에서 핏물이 솟구쳐 올랐지만 소향은 이를 악물고 아연을 안은 채 날아올랐다.
소향의 비상(飛上).
그 무한(無限)의 공간에서 그녀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 허공 속에서 우이와 소향의 눈이 마주쳤다.
소향은 그것이 환상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빛처럼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이 교차했다.
-쿠아앙!
남아있던 벽이 무너져 내렸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먼지가 가라앉자 환상은 현실이 되어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꿈처럼 환상처럼 그렇게 우이가 서 있었다.
만나면 밤새도록 퍼부어 주리라 생각했던 그 수많은 증오의 말 한마디 못한 채 소향의 몸이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도 여전히 아연은 그녀의 품에 소중히 안겨 있었다.
태호에 겨울이 가고 있음을 알리는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3 권 끝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