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장 신비의 만사혼합주(萬蛇混合酒)
1
백리웅천은 급히 구석의 침상으로 달려갔다.
"어서 옷을 단정히 입으시오. 세련된 여인은 여러 사람 앞에서는 속살을 보이지 않소."
조연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속하게 옷을 추슬렀다.
백리웅천은 침상 위에 벽을 보고 누우며 맥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무 오래 서 있었더니 피곤하구려. 내일은 황녀(皇女)들 사이에 은밀히 전해지는 예법을 전수해 드리겠소."
조연하는 한 동안 자신의 가슴에 붙어 있던 사내의 손이 사라져 버리자 문득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요?"
"혼자서 거울을 보며 연습하시오.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결실은 없소."
"알았어요. 아무튼 공자님 덕분에 세련된 몸가짐을 배우게 되어 소녀는 너무 기뻐요."
이때 문이 삐꺽! 열리며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조운풍과 소덕상이었다.
백리웅천은 벽을 보며 딴전을 피울 뿐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조연하는 그들을 보며 반가운 듯 말을 던졌다.
"어머! 숙부님께서 갑자기 주방에 웬일이에요?"
그녀는 소덕상을 보고도 인사말을 던졌다.
"덕상! 당신도 왔군요."
조운풍과 소덕상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긋나긋한 말을 들은 것은 난생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소덕상은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조연하가 수하들에게 경어를 쓰는 것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변화인 것이다.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해가 서쪽에서 뜰 모양이군.'
그들은 어제 조연하의 걸음걸이가 여자다워진 것을 발견했었다.
하나 그저 웃으며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런데 오늘 말투까지 변한 걸 보니 사람이 아예 바뀐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었다.
조운풍은 미소 지으며 물었다.
"허허...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조연하는 생글생글 웃었다.
"호호호! 소녀는 백리공자님께 도시 상류층 여인들의 세련된 몸가짐을 배우고 있었어요."
"엉! 그래? 알고 보니 저 친구 덕분에 네가 홱 변했구나."
"맞아요. 난 더욱 더 변할 거예요."
조연하는 까르르 웃고는 등을 돌려 사뿐사뿐 걸어서 밖으로 나갔다. 조운풍과 소덕상은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문을 닫고 침상으로 갔다.
"여보게, 몸은 좀 어떤가?"
백리웅천은 힘겨운 듯 낑낑! 거리며 등을 돌려 누웠다.
"그렇게 맞고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다 나을 리가 있겠소?"
"그래? 좀 살펴봐도 괜찮겠나?"
조운풍은 그의 답도 기다리지 않고 침상에 걸터앉더니 그의 사지 여기저기를 주물러보기 시작했다.
"앗! 아퍼!"
백리웅천은 짐짓 비명을 지르며 아픈 시늉을 했다.
조운풍은 그의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이곳저곳의 근육을 조사하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엄살이 너무 심하군. 며칠만 지나면 멀쩡한 몸이 될 것 같은데......."
그는 소덕상에게 고개를 돌리며 살짝 눈짓을 했다. 그러자 소덕상은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소덕상은 청년 두 명과 함께 돌아왔다. 그들의 손에는 육중한 철구(鐵球) 한 개와 굵은 쇠사슬이 들려 있었다.
백리웅천은 불길한 느낌이 뇌리를 스쳐갔다.
'설마 저걸로 내 몸을......!'
그때 느낌이 옳음을 증명하는 말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미안하네, 자네 무공이 너무 강해 안심할 수가 없네. 자네 몸이 다 나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거든......."
백리웅천은 기가 탁 막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는 암담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핫핫핫! 이해하오. 나 때문에 얼마나 큰 고생을 하셨소? 얼마든지 묶으시오. 기꺼이 쇠뭉치를 매달고 생활하리다."
조운풍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고맙네. 무공만 강한 게 아니라 마음도 넓군. 사실 자네가 하는 일은 입으로 지시하는 것뿐이니까 그리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네."
그의 음성에는 미안한 기색이 은은히 드러나 있었다.
소덕상과 청년들이 침상 주위로 다가왔다.
백리웅천은 싱긋 웃으며 그들의 작업이 편하게끔 팔다리에 힘을 뺐다.
철커덕! 철커덕!
금속음이 한 동안 주방 안에 울려 퍼졌다.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된 사슬이라서 식칼 따위로는 아무리 내리쳐도 소용없네. 칼만 부러지고 말아."
조운풍은 한 마디 주위를 준 후 장한들을 이끌고 나가 버렸다.
백리웅천은 양 손목과 양 발목에 쇠사슬이 칭칭 감긴 채 누워 있었다. 손목과 발목 사이에 늘어진 쇠사슬의 길이는 두 자에 불과했다.
이제 그는 양팔과 두 다리를 넓게 뻗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하나 더욱 기막힌 것은 발목을 이은 쇠사슬 사이에 수박 만한 철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후유! 순진한 소녀를 속이고 기녀처럼 다룬 것 때문에 하늘이 벌을 내린 것일까?"
그는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자 허공을 보며 암연히 한숨을 내쉬었다. 주방장 생활은 생각보다 길어질 듯싶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한숨이 푹푹 나오면서도 이가 부드득 갈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적개심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었다.
백리웅천은 미간을 좁히며 생각했다.
'내가 조연하의 속살을 만졌기 때문에 마음이 풀어진 건가? 그래서 여자는 마물(魔物)이란 말이 있는 것인가?'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아니야, 이 도적놈들이 의외로 순진한 데가 있어. 그 때문에 내가 이 모양이 된 거야."
사실 수룡천 무리들은 흔히 듣던 도적과는 다른 점이 많이 있었다. 도적이라면 약탈을 할 때 살인(殺人), 강간(强姦)을 밥먹듯 해야 했다. 그런데 어민들의 이야기에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없었고 여자가 못된 짓을 당했다는 내용도 없었다.
실제 와보니 배설의 대상으로 쓰기 위해 잡아 가둔 여인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식사 등 잡일도 그들 스스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리웅천은 허공에 대고 쉴 새 없이 툴툴거렸다.
"멍청한 도적들, 이러니 열 여섯 살이나 된 계집애가 여염집 아낙의 행동과 기녀의 교태도 구분 못하지. 이러고 살려면 차라리 머리 깎고 중이나 되지 뭐 하러 도적질을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입으로는 비난을 퍼붓고 있었으나 내심은 오히려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돌연 그는 표정을 굳히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눈빛은 망망대해(茫茫大海)의 끝없는 푸르름처럼 깊어지고 있었다.
그는 무거운 심호흡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어 두꺼운 입술을 비집고 결연한 육성이 흘러나왔다.
"그래, 이들을 멸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들을 바탕으로 내 문파를 창건해야겠다. 진미문(珍味門)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는 거야!"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암, 진미신존(珍味神尊) 백리웅천의 전설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조연하, 그 소녀는 내 손바닥의 순결을 앗아간 여인이니 당연히 내가 거두어야지."
다음 순간 엄숙하던 기색은 엷어지고 그의 눈동자가 민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지가 결박된 난관을 타파할 방도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일까?
그의 입이 슬며시 벌어지며 묘한 미소가 흘렀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저녁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고 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