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1. 22
지난 10일 인도의 수도 뉴델리. 국내의 눈길이 김정은의 방중에 쏠리던 사이, 이곳에선 우리 운명과도 직결된 행사가 열렸다. 인도 정부 주관 아래 올 네 번째로 열린 ‘라이시나 대화(Raisina Dialogue)’다. 인도 총리 관저가 있는 라이시나 언덕에서 이름을 딴 이 행사는 미 트럼프 행정부가 노래하는 ‘인도-태평양 시대’의 4대 주축국 (미국·일본·호주·인도) 간 협력을 위해 마련됐다. 국제무대에선 이미 이 네 나라 간 안보 협력을 ‘4자동맹(Quad Alliance)’이라 부른다.
왜 이름조차 생소한 4자동맹을 주목해야 하나. 미국 입장에선 4자동맹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쪼그라드는 탓이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은 그간 ‘축-바큇살(hub-spoke) 전략’을 펴왔다. 미국을 중심으로 바큇살처럼 한국·일본·대만·호주·싱가포르 등 우방국과 양자동맹을 맺어 동아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전략이었다.
그랬던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취임 이후 돌연 ‘인도-태평양 전략’이란 개념을 들고나와 안보 구도를 흔들기 시작했다. 미·일·호·인 4자동맹국을 잇는 새 안보 축이 떠오른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의 핵심 동맹국으로 대접받던 한국은 졸지에 안보 변방으로 전락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요즘 외교·안보 전문가 사이에선 ‘신(新) 애치슨라인’이란 말이 망령처럼 떠돈다. 애치슨 라인은 1950년 미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이 밝힌 극동방위선이다. 당시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방위선 안에 남한은 포함되지 않았다. 남침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정책으로 북한이 믿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불길한 애치슨 라인이 새삼 거론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우선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곳곳에서 주한미군 감축설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부터 한국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내세우며 대놓고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온 인물이다. 가뜩이나 빼고 싶은 판이라 그럴듯한 핑계만 생기면 당장이라 불러들일 게 뻔하다.
더 심각한 건 주한미군이 줄면 보병 전투부대가 빠진다는 거다. 현재 미 2사단 제1여단 소속 4500명은 9개월 순환 근무 원칙에 따라 오는 7월 돌아가야 한다. 한국에 올 예정인 새 부대를 안 보내면 자연스레 감축이 이뤄진다는 얘기다.
일본과의 소모적인 분쟁도 미군 감축을 부추길 악재다. 일본은 그간 주한미군 철수를 누구보다 강력히 반대해 왔다. 물론 한국이 아닌 자신들의 안보 때문이다. 일본으로선 주한미군 철수 시 대한해협이 북한을 상대할 최전방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6월 트럼프가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자 오도데라 이쓰노리 방위상이 즉각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에 전화를 걸어 “그대로 두라”고 요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랬던 일본 분위기가 확 변했다. 주한미군 철수를 가정해 놓고 일본의 안보 문제를 논의하는 경우가 늘었다. 미국이 주한미군을 빼려 해도 일본이 발 벗고 나서서 말리지 않을 공산이 커졌다는 뜻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일본과 끊임없이 각을 세워온 정부의 책임도 크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면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일본의 수수방관 속에 주한미군 철수 또는 감축이 갑자기 이뤄질 가능성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주한미군 철수도 언젠가는 진지하게 논의돼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지금은 아니다. 이런데도 현 정부는 위기를 느끼는 기색도 없다.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남정호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nam.je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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