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루카 6 장 32 절
동양 사상의 한 축이었던 공자의 제자 중궁이 공자에게 ‘인’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공자는 " 인은 문을 나서면 그 누구라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큰 손님을 대하듯 모시는 것이며 (출문여견대빈, 出門如見大賓), 사람을 대할 때 신에게 큰 제사를 드리듯이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이다. (사민여승대제, 使民如承大祭) "(안연 2 장)
그리고 공자는 "인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행동하면 나라에서도 집안에서도 원망이 없을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붓다는 인간 마음의 가장 숭고한 상태를 ‘브라흐 마비하라, Brahmavihara’ 라고 했다.
숭고함이란 해탈의 경지에 도달해 인간의 선과 악을 넘어 자기 자신이 소멸되고 한없는 경외심이 넘치는 단계이다. 이 단어는 산스크리트어로 ‘아프라마나 apramana’라고 하는데, 셀 수 없는/가름할 수 없는/경계가 없는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 용어가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사무량심 (四無量心)’ 즉 네 가지 셀 수 없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
사무량심
첫 번째 마음은 ‘마이트리’인데 한자로는 ‘ 자慈 ’ 로 번역을 합니다. 즉 마이트리는 참된 사랑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어로는 ‘헤세드’나 그리스어 ‘아가페’에 해당됩니다.
참된 사랑은 초점이 상대방에게 있습니다. 만일 초점이 자신에게 있고 상대방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다. 그래서 ‘마이트리’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깊이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신이 아무리 최선의 선의를 보인다 할지라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은다면 그것은 ‘마이트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깊이 살펴야 상대방에게 행복을 줄 수 있습니다.
‘마이트리’ 는 상대방이 행복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그 환경을 조성하는 작업까지 포함하는 큰마음입니다.
두 번째 마음은 ‘카룬나’입니다. 한자로 ‘비 悲’로 씁니다. 슬플 비 悲 인데 상대방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는 마음과 능력으로 영어로는 compassion 이라 합니다. Compassion 은 상대방의 고통 (passion) 을 기꺼이 함께 (com) 나누려는 마음입니다.
카룬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카룬나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관심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걱정, 근심, 슬픔, 불행을 자신의 일처럼 느낄 수 있도록 연습이 필요합니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 사람 옆에 앉아 말없이 그의 슬픈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마음은 ‘무디타’입니다. 한자로 ‘희 喜’ 자로 씁니다. 상대방이 행복할 때,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상대방이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노력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불행을 당했을 때 함께 그 불행을 슬퍼하기는 쉬워도, 상대방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함께 기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네 번째 마음은 ‘우펙샤’입니다. 한자로 ‘사 捨’ 버릴 사로 번역합니다. 사는 마음에 집착이 없고 평온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고생 끝에 산 정상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볼 때 느끼는 바로 그 감정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는 마음입니다. 모든 사람을 그 자체로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마태 5,38-48;루카 6,27 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까지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원수는 과연 누구일까?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기에 유명한 율법교사가 있었습니다. 모든 율법의 규율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율법에 따라 행동하는 완벽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유대 랍비들과 달리 토라, 모세오경을 새롭게 해석하고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며 기상천외한 말을 하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실력을 측정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랍비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루카 10 장 25 절 :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 ‘랍비’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 번째로는 유대 학자, 유대 선생이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로는 큰 사람, 큰 인물이라는 의미이다. 랍비를 번역하면 ‘나의 선생님’ 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부활을 믿었고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 똑똑한 율법교사가 하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시고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신다.
루카 10 장 26 절 :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는 신명기 6 장 5 절과 레위기 19 장 18 절의 내용을 엮어 대답합니다. 27 절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황금률입니다.
신명기 6 장 5 절에 등장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와 레위기 19 장 18 절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를 하나로 묶어 설명하였다.
이 말씀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 율법 교사에게 가서 그렇게 행하면서 살라고 하십니다. 율법 교사는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 예수님께 알리고 싶어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우리가 이웃하면 어떤 사람들을 떠올리십니까? 내 옆집에 사는 사람들, 내가 자주 만나고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이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레아’ (rea)인데 친구, 동반자, 또는 몸종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은 옆집 사는 철수 엄마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이나 동물, 민족과 종교,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 율법교사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웃이란 자신과 같은 종교, 이데올로기, 취미 등을 공유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해 주심으로써 그가 깨닫지 못했던 ‘레아’ 즉 이웃의 정의를 새롭게 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하신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이 세상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라고 생각합니까?’ 율법교사는 눈물지으면서 말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말씀하십니다. ‘말만 하지 말고 가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십시오.’ |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은 북쪽 사마리아 지역에 사는 유대인을 지칭합니다. 기원전 8 세기 아시리아 제국의 산헤렙이 사마리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왕족과 귀족, 기술자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간 뒤 그곳에는 천민과 아시리아에서 넘어온 이주민들이 거주하도록 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아시리아인에게 점령당한 후 이들과 결혼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유대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유대인들은 혼인에 대해서 같은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과의 혼인을 금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역사와 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느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 즉 우상숭배, 미신행위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과 혼인을 함으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합왕과 이세벨이며, 솔로몬 왕도 이방신을 모시는 여자들과 혼인하여 국가가 종교적으로 혼탁한 경험을 하였으며, 특히 이스라엘은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의 멸망이 하느님만을 섬기는 야훼 신앙에서 벗어나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에 내린 하느님이 징벌로 생각하였기에 야훼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과 혼인을 금지하였던 것입니다.
기원전 596 년 아시리아를 함락하고 근동지역에서 새로운 패권국이 된 바빌로니아 제국은 예루살렘을 함락 시킨 뒤 유대의 왕족과 귀족 그리고 지식인들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이 때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의 땅인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전통 종교인 사마리아교를 신봉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이란에 등장한 페르시아제국이 바빌로니아를 함락시키고 잡혀왔던 유대인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냅니다.
기원후 1 세기 독립에 열망이 높아진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들은 눈엣가시나 다름없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원수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황금률을 설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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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인과 황금률
영어에 ‘옥시모론 oxymoron’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뜻은 ‘형용모순’ 이라는 뜻의 수학적인 용어입니다. ‘옥시모론’은 고대 그리스어의 ‘날카로운’이라는 의미를 지닌 ‘owy’ 와 ‘무딘, 멍청한’ 이라는 의미를 지닌 ‘moron’의 합성어입니다.
이를 글자 그대로 번역을 하면 ‘날카로운 무딤’ 혹은 ‘똑똑한 멍청함’이라는 뜻입니다. 서로 상반되는 의미의 두 단어가 합쳐져 논리적이지 않은 뜻을 가질 때 ‘옥시모론’이라 하고, 단어를 넘어 문장 자체로는 모순이지만 진실일 수 있을 때는 ‘패러독스 paradox’라고 합니다.
패러독스는 ‘~에 반해’라는 그리스 전치사 ‘para’ 와 ‘ 풍문이나 소문에 기초한 의견 ’이라는 의미의 ‘doxa’의 합성어로 ‘겉보기에는 상호 모순이지만 그렇다고 비논리적이거나 완전히 허구인 것은 아닌 문장’ 을 뜻합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옥시모론’이며 즉 전혀 선하지 않은 사마리아인을 선한 사마리아 인이라고 하니 서로 상반된 개념을 사용했기에 옥시모론이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겉보기에는 상호 모순 같지만 완전히 허구가 아니기에 패러독스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복음서 중 루카 복음 10 장 25-37 절에만 등장한다. 이 비유가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비유는 루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만 회자되던 이야기인 듯하다. 즉 루카 고유의 자료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수님이 말한 비유 중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이야기로, 오늘날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착한 사마리아인이라고 한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착한 사마리아인은 길을 가다 피투성이가 된 이방인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를 도와주었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의 그리스어 ‘스플랑크 니조마이 splanchnizomai’의 의미는 ‘내장을 쥐어짜는 아픔을 느끼다.’이다.
이 단어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보고 느낀 감정을 표시하는 단어로 마태오 복음 14 장 14 절에서도 같은 동사가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절뚝거리는 걸음을 보시고 그 장애인의 절뚝거리는 걸음을 느꼈고, 병든 자의 아픔을 느꼈고, 문둥병자의 외로움을 느낀 예수님은 그들을 돕지 않고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마음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었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으며 불가에서 말하는 네 가지의 마음을 집대성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너희는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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