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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주년사 강의
권오상 가시미로 신부
하느님과 함께 가라!
25년 동안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니 한국 구속주회의 역사가 35쪽 분량으로 정리된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구속주회가 얼마나 굉장한지 그리고 크게 성공했는지를 보여주려고 시도된 것은 아니다. 물론 과시하기 위한 목적은 더 더욱 아니다. 그저 바르게 기념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사를 통해 중요한 무언가를 드러내어야 한다는 중압감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누군가는 해야 할 작업이지만 원치 않는 길을 가는 사람의 마음과 같았다. 그래도 발자취를 하나씩 따라가자니 어느새 그 발자취의 시작과 중간과 끝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질적이고 낯선 길을 걷는 불편함이 있지만, 문서와 기록들을 뒤지고 자료를 번역하면서 마치 섞여있는 퍼즐을 맞추어 가는 즐거움이 나를 위로해 주기도 한다. 아무리 보아도 어설픈 35쪽의 분량에 25년의 역사를 담아낼 수 있을까란 의문도 든다. 그럼에도 한 단어, 한 문장의 발자취가 완성될 때마다 기록되어진 순간들이 친절하게 나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과 함께 걸어왔는가? 그 길을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기를 원하는가? 그래서 오늘 강의의 주제는 “하느님과 함께 가라!”이다. 첫 번째로 기억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가라! 두 번째로 희망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가라! 마지막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가라! 결론적으로 기억, 희망, 사랑이라는 세 가지 단어로 25년의 발자취를 정리하고 싶다.
첫 번째 - 올바르게 기억하기 (부제 : 기억과 망각)
인간은 기억하는 데 서툴다. 인간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진다. 우리는 때때로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무의식적으로 망각한다. 기억과 망각은 이처럼 인간과 친숙하다. 그래서 인간은 기록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영상 등을 이용해 기억 속에 저장하려고 한다. 한편, 인간은 기억 안에 저장된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린다. 이처럼 인간은 중요하지만 파악하기 힘든 경험을 좀처럼 붙들고 있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만 년 전 인류의 조상들은 동굴 한 쪽 벽에 무수히 많은 손도장을 찍어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했다. 우리 역시 한국 구속주회의 지난 발자취를 기록을 통해 기억하고자 한다. 이렇게 구속주회의 한국 선교 25년을 정리한 까닭은 망각의 결과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망각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에 대응하기 위해 지난 25년 동안의 기억과 경험을 기록을 통해 보존하려 한다.
1980년대 당시 동방의 작은 나라 “KOREA”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경제적 성장은 세계를 놀라게 한다. 한국은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비롯해 무엇이든 빨랐던 나라다. 그리고 뜻밖에 신자들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Korea라는 작은 나라에서 전해진 복음화에 대한 열망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의 방한과 맞물려 세계 교회에 알려지고 최고점을 찍는다. 그 이후 도시 곳곳에 성당이 세워지고 신자가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성당 문을 두드린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이 1985년 10월 21일 로마에서 개최된 구속주회 세계 총회에서도 다루어지고 한국 선교에 대한 불씨가 집혀진다.
5년 동안의 한국 진출 준비 작업에는 라소 총장 신부, 헤체노바 신부, 이만용 신부, 로저 신부, 톰 그리핏 신부들이 참여한다. 이들이 한국 진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보고서들이 오고 갔고, 한국을 들여다보는 낯선 이방인 사제들의 노력은 구속주회와 한국사회의 이질감을 극복하고 연결점을 찾기 위한 시간들이다.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과 동행을 결정하게 될 때,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란 물음에 봉착하게 된다. 당시 헤체노바 신부는 한국 진출을 위해 수원교구와 인천교구의 문을 두드렸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라고 추천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서울 교구에서 응답이 왔다. 양쪽 문을 두드리는데 갑자기 중앙 문이 활짝 열리며 구속주회를 맞이해 준다. 이렇게 하느님의 섭리는 시작된다. 그리고 1991년 1월 14일 인도에서 개최된 아세아-오세아니아 장상회의에서 한국 진출을 결정하게 된다.
1991년 3월 15일 브라질에서 성장한 이만용 신부가 입국한다. 당시 38세이다. 그리고 8월 1일 공식적인 첫 선교 미사를 봉헌한다. 10월 7일 당시 54세의 필리핀 출신 나윌리 신부가 입국한다. 10월 31일, 31세의 태국 출신, 파이분 신부가 한국에 도착한다. 서로가 다른 환경에서 사목해 오던 이들이 구속주회 회원이라는 동질성 하나만 믿고 남현동에 둥지를 틀고 함께 생활한다. 말이 좋아 국제 공동체이지, 사실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모든 장소, 모든 시대에 우리 앞에 진열되어 있지 않다.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점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이질적인 것에서 연결점을 발견하지 못하면 성장할 수 없다.
기념하기 위해서는 기억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억이 과거형이라면 기념은 현재형이다. 하느님의 창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기억은 현재의 성찬례를 통해 기념된다. 이를 두고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 혹은 성령의 역사라고 고백한다. 인간은 간혹 기억을 왜곡하고 역사를 왜곡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자기 합리화와 위증을 통해 얻게 된 명성은 인간에게 바벨탑을 쌓으라고 유혹한다.
이렇듯 인간의 기억은 기념과 깊은 관계가 있다. 25년 동안의 구속주회의 한국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우리 앞에 진열되어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찾아 나서지 않으면 찾을 수 없고, 두드리지 않으며 열리지 않는 현실이다. 우리 앞에 진열된 것이라면 팔을 뻗어 쉽게 얻을 수 있을 터인데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올바르게 기억하자! 그리고 이질적인 것과 연결점을 발견하자. 이질적인 것에서 연결점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미래에도 필요한 선교사의 자세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기억하기 시작하면, 평범한 일상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그리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올바른 기억은 우리를 설득하려 들지 않고, 대신 명백하지만 소홀히 다뤄지는 진리를 우리의 마음에 붙들어 놓고자 한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이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모든 분노와 좌절과 슬픔이 자리를 양보하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중한 진리들이 마음에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우리가 올바르게 기억하면, 평범한 일상들이 거룩함으로 변모된다. 그러니 올바르게 기억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가라!
두 번째 - 새롭게 희망하기 (부제 : 희망과 절망)
1991년 8월 1일 남현동 1071-15호에서 한국 선교가 시작된 후 11년이 지난 2002년 7월 22일, 장마와 더위가 교체되던 시기였다. 7년 동안 끌어오던 홍천 수련소가 완공되어 문이 열리고 한국에서 제 1차 지구총회가 수련소에서 개최된다. 지구로 승격되고 개최된 첫 지구 총회는 이제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의 법적 승격에는 그에 걸 맞는 권한 못지않게 책임도 뒤 따르기 때문이다. 10년 동안의 공동체의 경험들이 무르익기까지는 여러 가지 미숙한 일들도 많다. 마치 서품된 사제가 10년 차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슈퍼맨적인 환상에 시달리는 것과 같다. 사실 당시 토빈 총장 신부는 그렇게 급하게 지구 승격을 할 필요가 있는지 개인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12년이 지난 후 2014년 말에 제 5차 지구총회가 개최된다. 다섯 차례의 지구 총회를 거치면서 구속주회 한국지구는 용감하게 현실과 맞서기도 하고, 때로는 혼란과 두려움 혹은 절망을 대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것이 아닌 것에 몰두하려고 했던 순간, 올바르지 못한 것을 결정했던 순간, 용서하기를 주저했던 순간, 이질적인 것과 소통하기를 거부했던 순간마저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게 된다. 사실 “우리의 운명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희망의 부재에 의해 결정된다.”
사실 희망이란 단어를 사용하기가 주저된다. 사회적으로 희망 고문이란 단어가 회자하듯 자칫 거짓된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현실을 과장하거나 미화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익스피어는 “악마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경말씀을 읊조린다.”고 했다. 강요된 희망은 세뇌에 의해 주입된 마약과도 같다. 어떻게 하면 이런 거짓된 희망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참된 희망은 좌절의 시기에 발견된다. 아마도 좌절이라는 정화 장치가 거짓된 희망을 정화하는 작용을 한다. 좌절을 맞이하는 방법은 인내하는 것이다. “인내는 스릴과 거리가 멀다. 사실 인내는 흥분하지 않고 지내며, 욕구 충족을 미루고, 지루함과 무덤덤함을 견디는 능력이다.” 마치 우리가 영광의 신비를 묵상하기 전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듯 고통은 슬픔을 품위 있게 맞이하게 하고, 외로움과 혼란을 승화시켜 준다.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혼란이 아름다움으로 변화한다. 이것이 바로 승화이다.
우리가 직면하는 본질적인 슬픔을 잠시 바라보자. 모두를 사랑하기 위해 부르심에 응답했지만 한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 돈을 둘러싼 공포, 불행한 형제 관계, 사도직에서의 좌절, 양성기간에서 겪는 막막함, 중년에 들어선 회원들의 회한, 질병과 죽음 그리고 꺾여버린 꿈 앞에서의 고뇌.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슬픔을 제대로 수용해본 적이 있는가? 그저 값싼 위로와 동정에 의지하며 애써 이 슬픔을 우리의 것으로 보지 않고 싸구려 취급한 것은 아닌가? 이 근원적인 슬픔을 통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애써 외면한 것은 아닌가?
만일 세상이 좀 더 따뜻한 곳이라면 희망이 필요 없다. 반면, 인생과 세계를 지나치게 낙천적인 눈으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터무니없는 희망에 갇혀 살게 된다. 새롭게 희망하기 위하여 두려움 없이 우리의 본질적인 슬픔을 직면하자. 이런 슬픔들이 오히려 우리를 정화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인내하자. 그래서 인생의 의미를 성취하고, 용서를 기억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 그러니 새롭게 희망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가라!
3. 더 사랑하기 (사랑과 두려움)
2015년 1월 16일 광주 공동체가 나주에 소재한 봉황공소에 파견된다. 공소사목과 이주사목 그리고 광주지역 노베나를 주관하기 위함이다. 새롭게 형성된 막내 공동체는 비록 공소의 구성원이 대부분 어르신이지만, 활력있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전적 의미에서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다. 하지만 나는 사랑의 반대는 두려움으로 규정하고 싶다. 그래서 부덕한 지도자는 두려움과 공포를 이용하여 통치의 수단으로 삼는다. 사랑으로 통치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중을 통치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살아있는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는다.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이용만 한다. 우리는 모든 인간을 사랑하라는 불리움을 받고, 부르심에 응답했다. 하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혀 한 영혼마저도 사랑하지 못하는 현실은 마음속에서 메아리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사랑과 용서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용서 없는 사랑은 여전히 미숙하며, 독선이기 때문이다. 용서를 위한 사도직 그것은 바로 고해성사다. “사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세상 전부를 구원하는 것이다.” 한 영혼을 마주하며 인내롭게 경청하고 지혜롭게 조언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것은 자기기만과 자기도취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 고해소는 마음과 양심과 현실을 통해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께 귀 기울이는 자리이다. 그 곳은 바로 용서와 구원의 자리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도록 불리움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앞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책무나 의무가 아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를 비난할지언정 벌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초래한다. 사랑받지 못할 때 그의 영혼과 인격은 병들고 자신과 이웃을 공격하고 피해를 입힌다. 그래서 알폰소 성인은 자신이 그린 그림에서 성삼위에서 출발하는 사랑의 화살이 인간의 각 영혼에 뿌리박히는 그림을 즐겨 그렸다. 사랑받은 자만이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과 용기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사도 바오로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응대하라고 한다.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고, 그것은 하느님의 몫이라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말씀처럼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마저 내주라는 것이다. 이는 용기가 있을 때 가능하다. 용기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을 성취하고, 궁극적으로 자신이 확장될 때 가능하다. 로마의 희극작가 테렌티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이다. 인간의 그 어떤 것도 나에겐 낯설지 않다.”
중요한 교훈이라고 반드시 복잡한 건 아니다. 사실 중요한 교훈일수록 단순하다. 사도 바오로는 믿음, 희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고백한다. 향주 삼덕이라고 불리는 이 덕들은 하느님을 향하게 하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한다. 우리가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되는 순간, 더 이상의 믿음도, 더 이상의 희망도 필요하지 않다. 하느님과 우리가 누리는 사랑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으로 가득하다면 믿음과 희망은 그저 자신들의 자리를 내어주고 퇴장할 것이다. 그러니 더 사랑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가라!
결론 : 하느님과 함께 길을 나서며
그 수도회가 어떤 수도회인지는, 그 수도회가 어떤 수도자를 배출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떤 수도자들을 예우하고 기억하는가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그것은 개개인의 인물이 그리고 그들이 누구를 예우하고 기억하느냐가 그 수도회의 수준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예우하는 알폰소 성인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아, 네가 나를 사랑하기 전에 내가 먼저 너를 사랑했다는 것을 생각하라. 네가 태어나기 전, 세상 그 자체마저 아진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도 나는 너를 사랑했노라. 내가 존재할 때부터 너를 사랑해 왔노라.”
한국 구속주회가 걷는 길에 하느님의 축복을 청한다. 그리고 동행해 주시기를 청한다. 나만 옳고 나만 성취했고 나만 깨달았다는 독선에서 벗어나 깊은 신원의식과 동료의식으로 하나되기를 청한다. 하느님과 함께 걸어온 시간들에 대해 감사드린다. 앞으로도 걷게 될 낯설고 이질적인 길을, 하느님과 함께 걸을 수 있는 영광을 청한다. 오늘 25주년을 기념하면서 우리 안의 기억과 희망과 사랑을 담아 주님께 드린다. 그러니 하느님과 함께 길을 다시 나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