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타에서 마리아로 - 고집부리기와 기꺼이 하기
우리가 잡을 것은 하나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큰 하나다.
앞에서 말한 '새 안경'을 우리 재주로 만들어 쓸 수는 없는 일이다.
세계의 모든 지혜의 전통은,
지혜는 우리가 취하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요,
요구해서 얻는 게 아니라 기다려서 얻는 것이요,
자기 뜻을 관철하기willfulness보다
시간을 두고 기꺼이 하기willingness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겪기undergoing다.
대부분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불의 굴레rings of fire를 통과한 사람만이
기꺼이 함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어두운 길, 그늘진 곳을 통과하는 여정,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참으로 드물다.
서구의 제도화된 종교들은
(자신의 에고를 고집하지 않는) 기꺼이 하기보다,
(영웅적으로 에고를 관철하는) 강한 의지력을 더 강조해 왔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자기 뜻을 관철하는 고집부리기를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최근에 나는 미국 군인의 80퍼센트가
자폐나 심한 장애를 가진 자녀가 태어날 경우 이혼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우리는 힘 앞에서 강해지는 훈련은 많이 받지만,
'나약함'을 상대하는 데는 너무나 미숙하고 오히려 두려워한다.
기꺼이 함의 필요성은 대부분 서구인들,
특히 지성과 의지로 영성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강하고 많이 배운 사람들의 직관에 반反하는 것이다.
실제로 기꺼이 함은
당신이 자신의 지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엄격하게 이탈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당신은 노력으로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에게 그것은 습득하기 어려운 교훈이고,
아마도 그래서 예수는 그것을 가리켜,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어'(마태 7, 14)
좁은 문이라고 했을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영성은 왠지 모르지만 놓아버리기와 연관된다.
이 결정적인 지점에서 나를 믿어달라.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원적 사고방식과 집착을 끊어버리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큰 사랑의 길과 큰 아픔의 길이 그것이다.
이 둘은 어떤 방법으로도 프로그램화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으며
자기 뜻을 세워 실천할 수도 없다.
사랑과 아픔에는 특별한 기술이 없고 정해진 형식도 없다.
사랑과 아픔 자체가 선생이고
제가 정한 때에 제가 정한 방식으로 사랑과 아픔을 가르친다.
하지만 당신이 만일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면,
'아픔을 겪은 후' 새롭게 변화된 몸으로 고래 배 속에서 나오는 쪽보다
머리로 배우는 쪽을 선호할 것이다.
우리는 운명, 하느님과 그분의 섭리 그리고 은총 안에 있다.
지혜와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며,
고래 배 속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선물로 주어 졌음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야말로 역설이다.
루카복음 11장 29절 에서
예수는 자신이 줄 수 있는 유일한 표징이 '요나의 표징'이라고 말한다.
일반 종교인들이 보고자 하는 표징에 견주어 얼마나 엉뚱한 말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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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음박질로는 아무도 나귀를 잡지 못한다.
그러나 달리는 사람만이 나귀를 잡는다"는 옛말이 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사랑과 아픔만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께 갈 수 없다.
그러나 사랑과 아픔을 겪은 사람만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마르타가 더 훌륭한 마르타가 되는 것으로는 그 자리에 갈 수 없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겪는 마르타의 분주함, 좌절, 서툰 짓, 헛된 시도들이
마침내 마리아로 바뀔 실마리가 된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