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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미아가 된 헌법정신
박인수 / 법학전문대학원
한남동 대통령 관저가 세계적인 관심지역으로 급부상하였다. 대통령 비상계엄과 국회의 탄핵소추를 이유로 한 일련의 헌법적 쟁점과 정치적 갈등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 대통령 탄핵소추 근거의 하나였던 내란죄를 수사하기 위한 공수처의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을 둘러싸고 이를 저지하려는 대통령 경호처와의 대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중심으로 공수처의 수사권한 유무와 경호처의 경호구역 주장에 관한 법적 논쟁이 아전인수격으로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이는 문제의 본질을 보는 핵심적 논쟁이라 할 수 없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이 문제는 결국 우리나라가 어떠한 해결방안을 가지고 어떠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사수해 나갈 것인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행 헌법은 민주주의를 토대로 하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제1조에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나아가 헌법 전문(前文)에서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상정하고 있으며, 통일정책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하도록 하고 있다. 헌법의 이러한 규정에 따라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정치적 해석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헌법전문과 통일조항에서 언급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현행 헌법이 지향하는 바의 민주주의 방향을 설정한 것이며, 현재의 우리나라에서는 복지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다양한 정치적 색채의 민주주의가 가능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도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헌법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논쟁은 결국 정치현실을 주도하고 있는 정당에서도 재현되고 있으며,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개념과 방법 나아가 수호에 대한 의지는 각 정당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고 하겠다.
현행 헌법은 자유민주주의 원리를 기본질서로 규정하고 있으며, 사회민주주의 원리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민주적 원리는 보충질서로 도입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통설적 견해에 해당한다. 자유민주주의를 기저로 함으로써 현행헌법에서는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신체의 자유, 학문의 자유, 직업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과 소수자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규정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정치는 다양하면서도 대립되어 있는 쟁점들을 대화와 타협의 방법을 통하여 합의를 도출해 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합의를 도출해 내는 방법이 대화가 아니라 다수결이나 과반수의 숫자에 의한 지배방법에 의존하고 있다면 이는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외형만 갖춘 것이며 실질은 이미 자유민주주의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라 할 것이며, 오히려 다수에 의한 수의 지배 내지 독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자유민주주의는 다수가 소수의 의견을 보호하고 대화를 통해 타협을 이끌어내어야 하는 원리라 하겠으며, 타협을 통해 정치적 합의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 다수에게 부여되고 있는 책무이자 굴레라 하겠다. 또한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소수도 내일의 다수로 성장할 수 있으므로, 국가에 대한 소수의 책무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즉, 다수에 대한 견제와 협력을 통하여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을 국민에게 보여줌으로써 소수도 국민적 신뢰성을 높여갈 수 있으며, 나아가 장래의 다수로도 성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국정운영의 책임있는 당사자로 참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정치적 역할이라 하겠다.
22대 국회에서 등장한 과반수의 거대 야당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적 보루라 할 수 있는 대화와 타협의 원리를 도외시한 채 수에 의한 입법 지배를 행하였으며, 나아가 의회주권주의 시대에 의회가 행정부를 불신임하며 전복시키던 행태를 재현하기라도 하는 듯이 탄핵제도·특검법 나아가 예산의결 등과 같은 정치적 무기를 활용하며 전대미문의 행정부 통제 또는 마비에 정치력을 집중하였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정치적 위협이자 침해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거대 야당의 정치적 행태를 이유로 하여, 현행 헌법상 위헌정당해산 사유에 해당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민주주의의 원리를 견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이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다.
국가도 개인이나 단체와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변화하고 있는 국가의 모습은 국민의 시대정신으로 표출되며,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정신을 규범으로 전환한 것이 바로 헌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헌법의 규범력은 헌법 자체가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있다는 국가적 신뢰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대정신과 괴리되어 있는 헌법은 더 이상 규범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 되며, 장식적인 선언이거나 과거의 유물에 불과한 것으로 변모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대통령직선제에 대한 시대적 요청이 국민적 정당성으로 형성됨에 따라 우리 헌정사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현행 헌법은 대통령 장기집권의 폐해로부터 벗어나고자 대통령 단임제를 도입하였으며, 비상조치권과 같은 대통령의 국가 긴급권은 축소한 반면 국회의 권한은 대폭 강화하여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나아가 언론의 자유와 지방자치의 시행을 보장하였을 뿐만아니라, 국가기관간 권한의 존부나 범위에 대하여 다툼이 발생할 경우 등을 대비하여 헌법재판소도 창설하여 심판하도록 하였다. 즉, 1988년 2월 25일 효력을 발생한 현행헌법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최대한 수용하여 이를 성문화한 것이었으므로 국민의 지지와 환호에 의해 출생한 기대의 옥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국민적·민주적 옥동자로 환호받으며 출생하였던 현행 헌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시행 이후 변화하고 발전한 국가와 사회의 시대정신을 차근차근 반영하면서 헌법의 규범력을 제고해 나아가는 정치적 합의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거의 40년 가까운 시간을 흘려 보내버림으로써, 오늘날 우리는 대통령 관저에서의 국가기관간 대치 모습과 같은 기형적 정치현실을 직면해야 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40년간 다양하게 표출되었던 시대정신을 헌법이 스스로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헌법 자체의 규범력은 상당 부분 훼손 또는 마비되어 정치현실을 규율하는 능력을 충분히 보여줄 수 없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정치권에서는 아전인수식으로 헌법을 왜곡 해석하는 헌법적 갈등과 충돌을 극대화하여 마치 내란이나 전쟁과 같은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국민적·국가적 정당성을 대변하고 있는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명백히 하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시대정신은 특정 개인이나 사회단체, 언론기관 또는 정당과 같은 정치적 집단이 정의하거나 규명할 수 없으며,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만이 표명할 수 있는 주권행사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국민의 실체는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단체로서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의 의사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의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일상에서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국민투표를 들 수 있으며, 주기적 확인 방법으로는 국가적 범위의 선거인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총선을 통하여 가능할 수 있다. 어느 개인이나 정당도 국민의 이름으로 시대정신을 참칭하거나 왜곡하여서는 아니되는 것이므로, 주권자인 국민의 이름을 표방하여 행사하는 주권적 행사는 강력히 규제하거나 금지하여야 하는 것이 헌법적 필연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국민주권주의 국가의 헌법이 규범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적 원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프랑스 헌법에서는 이를 명문화하여 제3조에서 ①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와 국민투표를 통하여 이를 행사한다. ② 국민의 일부나 특정 개인이 주권의 행사를 특수하게 부여받을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현재의 시대정신을 규명하는 것은 국민만이 할 수 있겠으나, 지나간 과거를 타산지석으로 하여 새로운 모습의 헌법을 찾아가기 위하여 과거의 시대정신을 유추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가능한 영역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하여 현행헌법 이후의 사회변화와 시대정신을 유추하면 대체로 여소야대의 정치적 현상에 대한 대응, 글로벌 시대가 전개됨에 따른 국가경쟁력 제고, 수도권과 지방의 양극화에 따른 지방분권, 빈번하게 발생하는 재난에 대비하는 안전국가로의 이행, 생성형 AI의 출현과 고도 기술사회를 규율할 수 있는 지능정보사회로의 변화 등을 들 수 있다. 대통령과 국회가 앞장서 이러한 내용을 반영하는 헌법개정작업을 이미 여러차례 시도한 바 있었지만, 정치권과 국민들이 소극적으로 반응하거나 또는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시대정신을 도출하여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시대와 함께하는 국가로 나아가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과 거대 여당을 견제하기 위하여 형성된 여소야대 현상은 현행 헌법 시행 이후 초기부터 나타난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소야대 현상을 정치적 개혁 또는 정계개편 등과 같은 정치적 영역에서만 해소하려고 하였을 뿐 국민의 주권행사인 헌법개정을 통하여 헌법으로 수용하려고 하는 해결 의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시대정신을 애써 외면한 정치권의 행태는 결국 국민의 정치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고, 헌법의 규범력만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소야대의 시대정신을 헌법이 수용하지 못한 결과는 혹독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례로서는 22대 국회에서의 거대야당에 의한 입법독재와 행정부에 대한 불균형적 통제와 같은 정치적 패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소야대의 정국에서는 야당이 정치의 중심에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국민의 정치적 선택을 존중하는 길이라 하겠으나, 우리는 이를 제도화하는데 눈을 감아버렸던 것이다.
또한 현행 헌법이 출현하였던 당시에는 제왕적 대통령의 강력한 권한에 대응하여, 행정부와 국회의 균형을 위하여 국회의 입법권 등의 헌법적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었으나, 미국패권주의로부터 확산된 글로벌 시대에 대응하기 위하여서는 국가의 경쟁력 제고라는 새로운 시대적 명제가 출현하였다. 설상가상 격으로 여소야대 국면에서 강력한 야당은 입법 및 재정적 활동을 통하여 행정부가 제안하는 민생위주 법안이나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을 볼모로 하여 정치적 당리 당략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급기야는 식물국회 또는 동물국회와 같은 볼쌍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는 결국 국가의 대내적 추진력과 대외 경쟁력을 약화하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글로벌 시대의 출현은 행정권의 강화에 오히려 비중을 두고 있으며, 이는 결국 의회에 의한 입법독점주의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주지하여야 할 것이다.
지방자치의 도입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대단하였다. 대통령 직선제와 함께 나타난 “이장부터 대통령까지 내 손으로 선출하자”라는 정치적 구호는 국민들의 지방자치에 대한 욕구를 한껏 끌어 올렸다.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 교육감과 교육위원에 대한 직선제가 도입되어 지방자치가 현실화되는 착시 효과가 있었다. 기관위임제도를 폐지하고, 지방을 통제하고 후견하던 중앙정부 권한을 지방자치단체로 이양하였으며, 특별자치도와 특별자치시를 신설하고 지방에 혁신도시를 설치하는 등의 가시적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교육위원 직선제의 문제가 상당 부분 노출되면서 교육위원 직선제가 폐지되고, 수도권과 지방의 양극화는 오히려 심화되고 심지어 지방소멸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서 지방자치는 한계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현행 헌법에서의 지방자치는 단체자치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단체자치는 우리나라의 형성에서 연유되는 역사적 유물에 해당하는 것으로 법률로써 폐지할 수 없는 제도보장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겠다. 지방자치의 성격을 주민자치로 전환하기 위하여 법률을 활용할 수는 있겠으나, 현행 헌법에서 조례제정과 같은 자치입법권의 행사는 헌법상 단체자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실질적인 자치입법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적 단일국가의 성격을 지방분권국가로 전환하여야만 가능하며, 지방정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의 자치입법권의 보장은 법치행정을 보완하는 자유행정제도가 도입되어야만 가능할 것이라 하겠다.
재난과 재해를 예방하고 대응하며 극복하기 위한 안전국가로의 문제, 생성형 AI를 넘어 추론형 AI 가 출현하고 나아가 기계인간이라 할 수 있는 AI 로봇이 등장하는 사회를 대비하는 지능정보사회로의 이행 등이 우리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시대정신을 외면한 헌법규범의 현실은 우리에게 심각한 고통과 퇴보 나아가 침체를 경험하게 할 것으로 본다.
여소야대의 시대정신을 수용하지 못한 결과가 여야간의 대화와 정치를 실종하게 하고 있으며,식물국회나 동물국회, 야당의 입법지배와 대통령의 거부권행사, 나아가 수차례의 대통령 탄핵소추, 대통령 체포영장 청구 및 발급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결국 자유민주주의의 존립까지 위협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행 헌법이 시행된 이후 36년이 지났다. 이 기간은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세계가 변화하였으며, 과학과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하였으며, 경제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된 기간이라 할 수 있다. 변화와 성장에 따른 시대정신을 현행 헌법이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우리의 헌법정신은 시대적 미아가 되어 정착하지 못한 채 방황하면서 우리의 주위를 맴돌고 있기만 하다. 시대정신을 적극적으로 제도화하는 헌법적 결실이 있어야만 우리의 미래를 예측 가능한 사회로 보장할 수 있을 것이며, 규범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창출해 갈 수 있을 것이라 하겠다. 미래는 항상 준비하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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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옥고 감사드립니다. 지금 정치 상황이 한창 흔들려서 이런 주제의 원고를 쓰기가 어렵다고 하시더니 손 터시게 됨에 축하드립니다. ..... 또 연말연시라 여러가지 분주한 행사들이 있었을텐데도 불구하고 글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시사논단>이 완벽하게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책 예쁘게 만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