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 많은 이 세상엔 눈물 없이는 못사는거냐
어느 때나 이 노릇 면하고
눈물 없이도 잘 살아보나
언제나 참사랑을 만나서
요 노릇 면하고 잘 살아보나
3.)
님 아니 볼 적에는 할 말도 많더니만
당신을 대(對)하고 보니
어안이 벙벙 심중(心中)만 답답
답답한 이 내 마음을
어느 사람께 하소를 하나.
이화자(李花子, 1916~1950)는 인천 권번 출신의 유행가 가수라는 이갸기가
있지만. 평양권번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지만 부평의 작은 술집에 노래
잘하는 기생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가수 김정구의 형인 김용환이 발굴했다는
이야기가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권번출신이지만 사회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이화자에 대해서는 1938년 8월호 잡지 "삼천리"에 실린 이서구의 "유행가수 금석
회상"에 나오는데“요사이 신인으로 이화자,조영심 두 미희가 전속진에
가담되어있다.
이화자의 신민요는 선우일선에 비하야 선이 굵다. 그 대신 깊은 맛이 있다.
이 점에 이화자의 새로 개척할 길이 있지나 않을까 한다.”
이밖에 1940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의‘춘계 독자 위안회’출연 기사에서는 손목인,
장세정, 이난영, 김정구 등 쟁쟁한 가수들과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
이화자는 1935년 "초립동"이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데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1938년 “백만 번의 갈채를 거듭한 이화자 독점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꼴망태목동"이 대히트하면서 마침내 ‘민요의 여왕’으로 군림한다.
“선이 굵은 구수한 목소리의 넋두리 같은 표현과 콧소리의 간드러지는 흥얼거림 등
독특한 창법이 특징”이었던 이화자는 이어 1940년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 듯한
"화류춘몽"과 오늘 소개한 "살랑 춘풍"등을 내놓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또 한 곡, "자서곡"이라고 이름 붙여 그 1년 전인 1939년에 발표한 "어머님 전 상백"
노래 또한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이화자의 최후는 비참했다. 아편에 손을 대, 끝내 아편 중독자가 되고
광복 후 서울 종로 단성사 뒷골목 단칸방에서 만신창이로 혼자 생활하다가
1950년, 30대의 나이에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