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꽃물
묵은 수첩과 편지와 꽃
☆ 묵은 수첩
한 해를 보내는 마음가짐과 새로 맞이하는 들뜬 전환 점에서 누구나 수 많은 생각
들로 꽉 찬다 더러는 잘 살았던 못 살았던 후회와 희망이 교차되는 시점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자성의 시간을 갖게되는것이 대부분이다~난 참 바보처럼 살았구려~를 부른
제법 나이가 그럴싸한 가수가 그 노래를 부르면서 다가오는 세월은 바보처럼 살지
말자 라고 다짐 했던 때가 20년 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여전히 바보처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세월을 다 돌이켜보면서 잘살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난 세월과 다가오는 시간을 흡족하게 받아드리는것도 이 순간 현명하지 않으면 결국
지난날들을 후회할 수밖에 없다. 년말에 묵은것들을 정리하는 것은 마음을 비우는
일과 같고 몸 구석구석 대청소하는 기분으로 새로운 다짐 일 수도 있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시행착오를 하지 않기 위해 습관처럼 하는것도 남은 삶의 뾰족한 모서리
를 다듬는 일이다.
바늘과 실처럼 내가 움직이는 곳에 일상 처럼 가지고 다니는 수첩을 송구영신하려고
펼쳐본다.수첩의 가장자리가 스쳐간 세월을 읽어내듯 반질거리는 모양새가 분신처럼
여겨진다.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 알게 모르게 손때가 묻어나면서 약간 추저분해진
내 인연의 총집합체지만 무엇보다 귀중한 나의 필수품이다. 희미한 내 기억을 정확
하게 손 짚어 주는 나의 충직한 보조자이기도 하다.
새해에 가장 먼저챙기고 정리하는 것이 또한 수첩속의 주소와 전화번호다.
작년 이 맘때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하나 새롭게 적어넣었든 기억들이 일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속에서 그 동안 기억에서 지워지고 또한 낡고 퇴색되어 버린
것들도 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도 그러하거늘 남의 마음에 그 동안 자리 잡았던
나의 존재라는것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한해를 지냈을까. 어느날 귀에 익숙하면서도
어렴풋한 목소리를 듣고 기억해낸 20수년전의 동인 그가 오히려 놀래며 그간의 목소리
를 어찌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느낌만으로 단번에 알아들었노라고 하니 그도 묵은
수첩을 정리하다 그 전화번호로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전화를 했단다.전화를
받지 않으면 삭제해 버릴 양으로 한사람 한사람 확인하는 과정이라 하길래 전화통화
를 못하게 되었다면 나도 역시 그 분의 수첩 에서 떠돌이별 신세가 되었을것이다.
수첩을 살펴 보다보면 참 죄송스런 마음이 들 때도있다. 일년동안 단 한번의
안부조차도 챙겨 본 적이 없는 분들도 수두룩하다. 그 또한 미안한 마음으로 새 수첩
으로 옮겨 적어면서 올해는 단 한번이라도 안부를 물어야지 하면서 새 수첩으로
예전 그대로 이사를 시킨다. 365일이라 는 유효 기간을 늘인것에 다소 흡족해 하면서
인간의 관계라는것도 사실 묵을 수록 돈독해지는 사이도 있지만 어느날 크리스탈
유리잔처럼 맑은 소리를내며 금이가는 인년도 허다하다 허접스런 말 한마디에 맘
갈라지는 일은 자신의 욕심 채우는 일에 급급했기 때문이고 남을 배려하는 맘이 적
었기에 서로간에 균형이 맞지 않은 것뿐이다.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는것도 욕심이다.과연 내 마음처럼
상대방도 최선책이라고 믿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자신과 남을 찬찬하게 돌아볼 여유를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참으로 따스하고 살만한 곳일텐데 어쩐지 살아갈 수록 살벌
해지는지 이 현실을 누가 누구에게 탓 할것인가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벌려놓은 자업
자득인것을 묵은 수첩에 눌러앉은 이름 주소 전화 번호등 새 수첩으로 옮겨지지 못
하는 것들은 그 순간 소멸의 불랙홀로 진입해야하는 것이다.이런친구도 있었다.
묵은 인연들을 차례로 전화 확인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 들으면 그냥 남겨두고
누군지 모른다고 애매한 말을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삭제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어느 누구의 수첩에 작은 흔적으로 남는다는것은 삶의 고운 매듭하나 매어진것 처럼
과연 행운인가.
☆ 묵은 편지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묵은 수첩에서 새 수첩으로 잊지 않고
옮기는 것이 하나있다. 나르를 지키는 부적처럼 수첩 제일 앞장에 끼워넣는 것은
시집간 여식에게 보낸 엄마의 낡은 편지 한 장 새 수첩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안착하는 순간부터 나는 엄마와 늘 함께 호흡하고 있는 첱없는 딸이다.
살림을 차려도 가보도 못하고 미안하구나,
엄마 생일 어버이날도 잊지 않코 글을 보내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고나 너의 두 몸이 별일 없다하니 마음이 놓인다.
어려운 살림살이 굿세게 마음먹고 살아야 하너니라
부탁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부모에 효도란다.
너거 육남매 키워서 부귀영화 누릴랏더니
동서남북 다 허터놓고 우리 둘이 고향에 와서 농사일을 하니
자식들도 우리 심증 어찌 다 알것냐,
날이 갈수록 허송하다
허송세월 보내다가 나머지 삼 남매 성취만 시켜 노코 나면
우리 갈 길 가야지
가지마는 나무가 바람 잘 날이 있겠나마는
나의 소망은 자식들이나 다 잘되면 그 무엇을 바라리
막상 붓을 들고 보니 할말을 다 몬하고 글씨도 재대로
되지않는다.
김서방 진급되기를 노력하야 후방으로 내려와서 자주 ~ ~
만나자
울산에서 짐은 왔는지 궁금타,
얼마 되지 안아도 엄마의 성의니 받아 두거라
엄마 ~ ~ 몇 번 우리 희야~ ~ ~
우리 희야 ~ ~ ~ ~ ~ ~ 희야 ~ ~ ~
1987.5.15일(시집간 지 6개월 되던날)
지금도 여전히 자식 사랑에 애잔함으로 팔순을 맞이한 엄마 난 여전히 엄마
앞에서 철없는 딸이 되는 요즈음이 더 좋다. 문화연필심에 침을 묻혀서 꾹꾹 눌러
쓴 엄마의 편지다. 엄마의 마음이 묻어나는 여식에게 대한 애절한 모정이다.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어미의 마음을 어찌 자식이 알까, 내가 엄마의 그 때 나이가
되어도 아직 철부지인것을,
가끔 수첩을 뒤척이다 보면 읽게 되면 엄마의 체온을 느낀다. 울적 해 질때
마다 꺼내서 읽어본 세월이 벌써 이십 수년이 넘는다.읽을 때마다 새록새록 마음이
뜨거워진다. 엄마가 꼭 지금 내 나이에 쓴 글이지만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내 시야
에서 엄마가 안보이면 그냥 울고 싶어지는 너댓살의 딸아이로 돌아가고 만다.
밤낮 사시사철 내 가방 안에서 바늘과 실인 양 나를 지키는 수호신이 된
지도 한 세대가 다 되어간다. 편지의 모서리가 닳아갈수록 되살아나는 엄마의 정이
지는 저녁 노을로 산등성이를 넘어가려하니 은근히 다급해진다. 언제 어느 때 한
순간 노모의 생명 줄을 놓아버릴지 걱정이다. 하지만 어떤 때는 나에게 해당사항이
없을 것처럼 착각을 할 때도 있다.
생명이 가고 오는것이 자연의 이치라지만 나도 장성한 아들이 제 살림을
하게되면 마음으로 보내는 긴 장문의 편지 한 장 정도는 내 부모가 한 것처럼
아들의 마음에 다정 함으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는데 장담 못할 일이 바로 미래의
일이다. 객지생활을 시작한 아들은 늘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란다. 나도 그 나이
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엄마는 걱정도 팔자라면서 소귀에 경 읽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런 잔소리가 오히려 듣고 싶어진다. 이제는 아무리 들어도
엄마의 남은 사랑을 얼마나 더 듣겠는가,
☆ 묵은 꽃잎
끈끈한 조우의 끈으로 잔서리 품은 바람과 함께 매화 축제를 느끼고 즐기는
여유에 동감하는 동인 셋이서 올해도 작년의 약속을 지키려고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흘러 변하지 않는것이 어디 있으리. 먹 냄새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갈
즈음 사군자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중에서도 매화의 당당한 자태에 젊음을 다 쏟아
붓던 시절참 곱디고운 스물 두 살 즈음었던가,
매화 향기에 심취하던 그로부터 삼심 오년이 지났다.그 사이 노목이 되어버린
것 고사한것,보기 좋게 제 모습을 다하고 있는 중년의 자태같은 층층의 모습들이
어쩌면 인간이 살아온 여러 계층의 삶과 다를바 없는 모습들이다.
수많은 풍파에 시달린 나무일수록 멋스럽다. 주름지고 상처난 흔적들이 결국은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고 생각하니 인간보다 잔인한것도 없을 성싶다. 그런 매화
가지를 찾으러 얼마나 헤매고 다녔던가, 세월의 각박함에 시달린 인간은 자연과는 영
반대다. 포용력이 없다. 결코 멋스러움이 아닌 세상만사를 혼자서 다 짊어지고 사는
것처럼 보이니 자연과 인간은 결국 정반대의 현상으로 흔적을 남긴다.
그 시절에는 꽃잎하나 꽃술 한 개에도 각별한 애정을 퍼붓던 때였다. 봉오리
에서 화들짝 놀라 핀 것까지 섬세한 열정으로 겨우내 추위를 참고 견딘 인내를 닮느
라고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던가,
그림에 대한 열정도 참 대단했었다. 젊다는 것은 통통 걸음을 걸어도 식지않는
힘이 늘 발산되기 때문에 정녕 지칠 줄 몰랐다.모양 좋은 매화가지 하나 발견하면 또
얼마나 흡족했던가 꽃잎하나에 애정을 품었고 묘한 가지 하나를 발견하면 순박한
청춘이었던 그 마음에 매화 향기가 뭉실 뭉실 피어올랐지 배움이란 것이 때가 있다는
말 지금 생각하니 그때가 순수한 열정의 순간이었다.
매화를 함께 좋아한 그 아이의 마음이 아직까지도 내 수첩갈피에 얌전스레
자리보존하고 있다. 30여 년 이상이나 나와 함께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뭔가 나와
같은 세월을 동행했다는 뿌듯함이 시부적 가슴에 자리잡는다. 꽃은 시간을 망각하고
흐르는데 인간은 세월 탓하며 졸갑증을 내니 말이다. 비록 꽃잎은 탈색되지만
오가는 세월은 결코 무심하지가 않다.
마음 맞는 동인 셋이 멀리 살면서도 그 날을 맞추어 매화향기에 취하려고 모
인다. 몇 년 동안 연레행사로 이어온 우리들의 돈독한 만남이다. 미쳐 벌들도 날아
들지 못하는 찹찹한 날씨지만 코끝에 와 닿는 싸아한 향기에 눈감고 취하는 매화
향, 이 도도한 향에 취하고 또 취한다. 무엇이 우리를 이리도 취하게 할까,
새 매화꽃잎을 수첩갈피에 차곡차곡 재운다.매화그림에 심취하던때 유난히
매화꽃을 함께 좋아한 꽃봉오리 같은 아이의 마음을 품듯 함께 먹물울 갈면서 채색
보다 먹물의 각양각색을 음미하던 그런 마음에서 우리는 예쁘게 피어나는 매화꽃
같은 세월을 사랑하며 그 고운 시절을 보냈다.
꽃잎에,향기에 스며들 듯 빛 바랜 추억처럼 누런 문풍지 빛을 하건만 꽃잎에
베어있는 작은 추억들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아름다운 흔적들이다.
책갈피에 20년도 훨씬 넘은 매화꽃이 탈색된 채 눌러져 있다. 세월이 그리
흘렀어도 꽃잎빛깔은 여전히 제모습 그대로다. 향은 어디론가 이미 자리를 떨고 일어
나버린 상태지만 곱게 숨겨놓듯 옹골진 옛 추억이 아직도 살아있다 .꽃의 자태는
여전히 당차다. 새봄을 맞이 할 때 마다 매화는 피고지는 순서를 잊지않고 있다.
숫처녀 같은 매화 사랑도 십 년 이십 년 낡고 퇴색되어가지만 그 향기만은 여전히 내
수첩 안에 머물고 있다.
서울 사는 동인이 매화 보러 부산까지 온다는 전갈을 보냈다. 미리가서 부채
질이라도 하여 남풍울 머물게 할까보다, 동인에게 고귀하게 풍겨오는 매화의 고운
향과 꽃매무시를 보여주고 싶어서다. 매화를 사랑하는 내 사랑이여!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