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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익산향토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귀희
제136차 거제도 둘째 날 답사일정
바람의 언덕은 바람이 사는 곳
“바람의 언덕”은 띠가 덮인 언덕이라 옛 이름도 ‘띠밭늪’이었다. 길게 뻗어 청정해역으로 감싸여 있기에 언제나 바닷바람이 찾는 이를 맞는 곳이다. 푸른 바다와 갈매기가 어우르고, 저 멀리 학동 흑진주 몽돌해변과 수산마을이 펼쳐져 절경을 이룬다. 바다와 언덕이 조화로워 드라마 촬영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이곳에서 도로를 건너면 신선대가 있고, 해금강테마박물관이 있다.
신선대
바다가 시원스레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바닷가에 큰 바위가 자리를 잡고 앉아 주변의 아기자기한 경관들을 거느리고 신선놀음을 하는 형상이다. 다포도 천장산과 함께 오색바위 다도해 풍경 등을 조망할 수 있으며, 그 자락에 작은 몽돌해수욕장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해금강테마박물관
거제도에서도 남쪽 끝 해금강마을에 폐교된 초등학교에 있는 박물관이다. 이곳에서 전시하고 있는 물건들은 옛 물건들부터 영화 포스터, 세계의 범선, 베네치아 가면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1층에는 우리나라의 1950~1970년대 생활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이발소, 잡화점, 만화방, 교실 등을 드나들며 어른들은 향수를, 젊은이와 어린이들은 처음 보는 물건에 대한 신기함에 사로잡힌다. 2층에는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범선, 유럽 중세 시대의 갑옷과 투수, 베네치아 가면, 명화 등등 끝이 없다. 이 모든 것이 한 개인이 수집한 물건들이라고 한다. 장소가 협소해 소장품의 1/3만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가배량성[加背梁城] 경남기념물 제110호
경상남도 거제시 동부면(東部面) 가배리(加背里)에 있는 성지. 거제 노자산 기슭에 오아포(烏兒浦)라는 깊숙한 해안이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전략적으로 이용했던 요새지로, 현재의 가배량(加背梁)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가배량성(加背梁城)은 그 당시에 쌓은 성곽이다. 이순신은 우수영을 한산도 두억포에서 전라도 녹도로, 다시 진도경으로 옮겼다가 거제 오아포에 설치했다. 1601년(선조 34) 거제도 오아포의 통제영을 시찰한 체찰사 이덕향(李德響)이 오아포는 통제영을 두기에 마땅한 곳이 아니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따라서 통제영은 고성군 춘원포로 옮겼다가 3년 후인 1604년(선조 37)에 다시 통영으로 옮겼다.
오아포의 앞바다에는 한산도가 가로막고 있어서 풍랑을 막아주고 바람이 불어도 깊숙한 해안지형 때문에 거의 영향을 받지않는 곳이다. 원래 이곳은 까마귀 개(浦)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이 연유되어 오아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가배량성의 서쪽과 남쪽 두 곳에 해자가 있고 서남쪽 산봉우리에는 망대터가 남아 있다. 성 안에서는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 통제영의 관아자리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다. 이성은 거의 평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많이 무너져 밭농사가 이루어지고 있고, 주변에는 유자나무가 담을 이루고 있었다.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경남문화재자료 제99호)
거제도포로수용소(Geoje POW Camp)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당시 사로잡은 북한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배 밖에 없었던 거제도에 1951년부터 (현 거제시) 고현리, 수월리 등지를 중심으로 설치한 수용소이다. 거제포로수용소 입구1950년 11월 27일 유엔군에 의해 거제시 옛 신현읍, 연초면, 남부군 일대의 1,200헥타르 규모의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1951년 2월부터 포로수용소 업무가 시작되었다. 포로수용소는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구역으로 나뉘었고, 1개의 단위구역(enclose)에는 6,000명을 수용하였다. 각 구역의 하부 구조로 수용동(compound)이 있었고, 전체 수용소는 4개의 구역과 28개의 수용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 계곡에는 제6구역, 동부 계곡에는 제 7, 8, 9 구역이 설치되었다. 또한 이러한 시설과 규모를 자체 지원할 수 있는 비행장, 항구, 보급창, 발전선박, 병원, 도로, 탐조등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디오라마관 - 포로의 노역1951년 6월까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과 중공군 포로 2만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였고, 그 중에는 여자포로도 300명이 있었다. 그러나 강제징집 등의 이유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와 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 간에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고, 1952년 5월 7일에는 당시 수용소 소장이었던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 게 납치되었다가 석방되는 등 냉전시대 이념갈등의 축소판과 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다.
상병 포로의 교환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만 1년만에 휴전회담이 시작되었고, 이 때 포로 교환 문제가 논의되었다. 북한은 포로 전원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으며, 포로 교환의 방식이 서로 달라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였다. 1953년 2월에 부상당한 포로를 우선 교환하자는 유엔 측의 제안에 북한이 수용을 함으로써 《상병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에 북한, 중공, 유엔이 합의를 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4월 20일 부터 5월 3일까지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쌍방 간에 포로교환이 이루어졌다. 이때 교환된 포로의 숫자는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684명, 북한과 중공군을 포함한 북한 측이 6,670명이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의 일방적인 석방으로 27,389명이 탈출하였고, 친공 포로의 소환과 등 존재의 이유가 없어져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으로 인해 폐쇄되었다.
현재는 잔존건물 일부만 남아서 이곳에 당시 포로들의 생활 상이나 모습, 의복, 무기 등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최근 기존의 시설을 확장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전쟁의 역사와 산 교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은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고, 야외 캠프와 일부 유적 터만 남아 있던 포로수용소 유적지를 확장하여 1999년 유적관을 1차로 개관하였고, 2002년 11월 30일 유적공원을 준공하여 2차로 개관하였으며, 2005년 5월 27일에는 흥남철수작년 기념 조형물을 준공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청마생가와 청마기념관[靑馬記念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507-5번지에 있는 청마 유치환 기념관. 2000년 2월 청마(靑馬) 유치환의 문학정신을 보존·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전체면적 4,026㎡ 규모이며 문학관(전시관)과 생가(본채, 아래채)가 복원되어 있다. 시비와 유치환의 청동상이 있고, 전시관은 시인의 삶을 조명하는 ‘청마의 생애’, 생명추구의 시작과 작품의 변천 및 평가를 살펴볼 수 있는 청마의 ‘문학’, 유품들과 관련 평론·서적·논문을 정리한 청마의 ‘발자취’ 등의 주제로 구성되며 청마의 유품 약 100점과 각종 문헌자료 약 350점이 전시된다. 본래 청마의 생가는 태평동에 있었으나 현재는 번화한 중심부로 변하여 전시관 옆에 복원하였다. 집 안에는 소박한 방 2칸과 부엌, 창고, 화장실이 마당에는 우물이 있다. 기념관 앞에 자리 잡고 서있는 수령350년 된 느티나무가 인상적이다.
유치환[柳致環, 1908.7.14~1967.2.13] 한국의 시인이자 교육자. 교육과 시작을 병행, 중·고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통산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간행하였다. 호 청마(靑馬). 경남 통영 출생. 유치진의 동생으로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에서 4년간 공부하고 귀국하여 동래고보(東萊高普)를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하였다. 정지용(鄭芝溶)의 시에서 감동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 1931년 《문예월간》지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데뷔, 그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시작을 계속, 1939년 제1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간행하였다.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허무와 낭만의 절규 《깃발》을 비롯한 초기의 시 53편이 수록되어 있다. 1940년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만주로 이주, 그곳에서의 각박한 체험을 읊은 시 수(首)《절도(絶島)》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들을 수록한 것이 제2시집 《생명의 서(書)》이다.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돌아와서 교편을 잡는 한편 시작을 계속, 1948년 제3시집 《울릉도》, 1949년 제4시집 《청령일기》를 간행하였고, 6·25전쟁 때는 종군문인으로 참가하여 당시의 체험을 《보병과 더불어》라는 종군시집으로 펴냈다. 그후에도 계속 교육과 시작을 병행, 중·고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통산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간행하였다. 그의 시는 도도하고 웅혼하며 격조 높은 시심(詩心)을 거침 없이 읊은 데에 특징이 있는데, 이는 자칫 생경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기교보다도 더 절실한 감동을 준다. 제1회 시인상을 비롯하여 서울시문화상·예술원공로상·부산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사후에 그의 오랜 연고지인 경주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 중 200통을 추려 모은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가 있다. <출처 ; 백과사전>
우리는 이곳 마지막답사를 잘 마무리하고 일찍이 돌아왔다. 이틀 동안 이른 봄날 같은 날씨였는데, 답사를 마치고나니 어느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함양 쯤 왔을 때는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이고 고속도로 주변에는 눈에 미끄러진 차량들이 곳곳에 박혀있었다. 우리 차량 기사님께서 조심스럽게 운전해주셔 아무런 탈 없이 익산에 잘 도착했다. 사랑하는 향토문화연구회 회원님들 추위에 건강하시고, 가족과 함께 행복한 담소 나누며, 구정 잘 보내시고 다시 만나요. 나마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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