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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재일기의 저자 지규식은 궁중에 쓰는 그릇을 납품하는 공인이었다. 조선시대 도자기를 대표하는 백자(국보 제261호 백자 유개항아리, 국보 286년 백자 사발)
"밥을 먹은 뒤 집리(서리) 집에 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종로에 내려와서 민상순에게서 돈 5냥을 갖고 와서 2냥을 주고 천유와 함께 냉면을 사 먹었다." (하재일기 1891년 5월 18일자)
냉면의 대명사는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이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북한 출신자들이 대거 내려 오면서 냉면문화가 남한에도 보편화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1800년대 말 서울에서도 냉면은 여름철에 즐겨먹는 음식이었다.
하재일기는 궁궐과 관청에 각종 그릇을 납품하는 공인 지규식이 고종 28년(1891)부터 1911년까지 20년간 쓴 개인 기록이다. 서울과 양평 분원(사옹원에서 사용하는 사기그릇을 제작하던 곳)을 오가면서 활동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당시 물가와 생활 풍속, 세태 등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요즘 서울 사람들처럼 냉면 마니아였다. 일기에 냉면 먹은 일이 자주 소개된다.
"~ 장동 신상인 집으로 돌아왔다. 2냥5전을 주고 참외를 사다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선물했다. (아주머니가) 냉면 한 그릇을 또 내와 배불리 먹고 이야기하였다. ~ " (1891년 6월 21일)
일기 곳곳에는 물건을 사고 판 가격이 제시된다. 냉면은 한 그릇에 1냥이고 참외는 어느 정도 양인지는 모르나 2냥5전 했다. 장례식과 잔치 등에는 부조금을 전달했다. 금액은 5냥에서 많게는 20냥에 달했다.
"상경한 강릉 이 생원 아들이 죽었다. 돈 5냥을 부조하였다." (1893년 5월 5일),
"석촌 김 교관 도문연(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고향집에 돌아와 친지들을 초청하여 베푸는 잔치)에 20냥을 부조
하였다." (1893년 6월 12일),
"윤 진사 댁 대상(죽은 뒤에 두 돌만에 지내는 제사)에 10냥을 부조하였다. 공방 일동이 20냥을 부조하였
다." (1893년 6월 12일)
두루마기 세탁비·다림질 가격은 16냥이었다.
"주인에게 10냥을 주고 두루마기를 세탁하여 다듬이질 한 품삯으로 6냥을 주었다. ~ 저녁 무렵 혜교(광화문우체국 부근 다리) 길가 가게에 가서 방약합편 1책과 술몽쇄언 1책을 샀는데 값이 7냥이다. ~ " (1891년 1월 29일)
저자는 그릇을 구워 궁궐과 관청에 납품하는 대신 약간의 운영비 등의 지원과 함께 서울에서의 시장 판매권을 보장받았다. 그릇 납품과 분원의 일을 총괄하는 공당과 그 수하들의 수탈이 극심했다. 정기적인 뇌물과 함께 각종 명목의 비용을 부담시켰다.
중앙, 지방관리들과 상궁, 대전 군사들도 반상기, 접시, 사발, 항아리 등 각종 그릇의 상납을 요구했다.
"내가 종일토록 애걸하였으나 도무지 들어주지 않고 기어코 며칠 안으로 마련해 바치라고 하였으므로 나는 몹시 분함을 견딜 수 없었다. 칼자루를 쥔 자와 칼날을 쥔 자의 형편이 같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1891년 11월 9일)
여기저기 선물 보내는 일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각 처에 고기 종류를 올려 보냈다. 하가덕, 김정윤, 조창식, 신창원에게 각각 보낸 것이 있다." (1894년 12
월 28일),
"역시 종일 곤욕 당한 것을 이루 다 기술할 수 없다. 박 판서 댁 대소가와 조 고양, 석촌 박운산·김 주서 댁에 각각 세의(연말선물)를 봉상하였다." (1894년 12월30일)
생활용품까지 갈취했다.
"집 아이가 남성에서 내려와서 말하기를 '박 이방이 무·배추를 사 달라고 청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집에 있는 무·배추를 하인을 시켜 전인하여 보내고 ~ " (1894년 11월 17일)
불과 100년 전이지만 명절과 기념일의 모습은 오늘날과 사뭇 다르다. 설이면 가족이 모처럼 한데 모여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나눠먹는 풍경이 연상된다. 당시엔 차례를 지내기는 하지만 마을 어른들에게 새해 인사를 한 뒤 직장인 공방에 출근했다.
"차례를 마치고 곧바로 내곡으로 가서 관성제군(관우의 영)을 배알하고 추첨하여 19번을 뽑으니 상길(대길)이다. 돌아오는 길에 윤생원 분서 선생을 찾아뵙고 모시고 이야기하였다. 조금 있다가 인사하고 물러 나와 이웃 마을의 연세 많은 어른들을 두루 찾아 뵈었다. 공방에 들르니 자리에 시축(시를 적은 두루마리) 하나가 보였다. 바로 유초사의 설날 시였다. 곧바로 차운하여 가볍게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1891년 1월 1일)
무더위가 절정인 복날이면 삼계탕이나 보신탕 등 보양식을 먹지만 조선시대엔 술과 함께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다.
"초복이다. 일을 마치고 모두 본청에 모여서 술과 고기를 차려 놓고 취하도록 마시고 실컷 먹었다. 석양에 함경
빈과 못에 가서 목욕하고 돌아왔다." (1893년 5월 29일),
"말복이다. 공소(천주교 교회)에 모두 모여서 술과 고기를 차려 놓고 취하도록 마시고 실컷 먹었다." (1893
년 6월 30일)
저자는 천주교 교인이다. 따라서 성탄절은 그에게 최대 명절이었다.
"예수 탄신일이다. 남녀 교우가 다 같이 모여 온종일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외웠다. 밤에 또 찬송가를 부르며 성경을 외우고 국밥을 장만하여 함께 먹고 밤이 깊은 뒤 집회를 마쳤다." (1905년 11월 29일)
저자의 사적인 애정관계도 다룬다. 장춘헌이라는 기생집의 난인이라는 기생과 각별히 가까이 지냈다. 돈·귀중품이나 생필품을 기생에게 수시로 줬다.
"항라(견직물의 일종) 3필을 90냥에 사서 1필은 장춘헌에 보내고 2필은 본가에 보냈다." (1891년 5월 18
일자),
"장춘헌에 가서 귀걸이를 주고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돌아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우산동 묘소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1891년 8월 15일)
장춘헌 기생이 욕심이 지나쳤던지 이별과 재회를 되풀이했다.
"밤에 춘헌에 가서 영원히 절교하고 돌아왔다."(1893년 2월 27일), "밤에 춘헌에 가서 정담을 나누고 돌아
왔다." (1893년 3월 26일),
조카가 죽은날 애인에게 갔다.
"해가 저물어서 집에 돌아오니 조카아이가 이질로 죽어서 이제 막 내다 묻었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으나 어찌하겠는가. 흰 모시 1필과 참빗 2개를 춘헌에게 주었다." (1893년 4월 22일),
"춘헌에 가서 영원히 헤어지기로 하고 돌아왔다. 작별할 적에 쌀 1두를 청하기에 내가 그러겠다고 답하였다." (1894년 11월 25일)
다양한 사회상도 소개된다. 오늘날 청계천은 서울의 대표명소로 자리잡았지만 조선 말에도 밤늦게까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정권과 함께 옷을 걸쳐 입고 대문 밖으로 나가서 수표교(청계2가와 청계3가 사이 다리)에 이르러 달빛과 등불 빛 야경을 구경하고 돌아오다 청계천시장 앞에 이르니 달빛과 등불 빛이 서로 어우러져 비치는 속에서 북과 꽹과리를 치며 귀가 따갑도록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며 장안의 청춘 남녀들이 어지럽게 떠들어 대는데 구경할 것이 못 되었다. 그래서 즉시 숙소로 돌아오니 대략 삼경(밤 11~오전 1시)쯤 되었다." (1891년 1월 15일)
▲ 활쏘기 모습을 담은 엽서. 조선말 활쏘기는 국민스포츠였다. 민속박물관 소장
활은 무인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일반인들도 활쏘기를 즐겼다.
"한 소사, 박광천, 홍옥포를 불러 함께 삼관정 옛터에 올라가 시를 지었다. ~ 쓰기를 마치고 아이들에게 비빔밥과 막걸리를 소나무 그늘 아래로 가져오게 하여 함께 먹었다. 나는 우천(경기도 광주)에 나가서 활쏘기 연습을 10여 순 하고 들어왔다. 4전은 담뱃값이요, 2냥8전은 나물과 두부값이다." (1892년 4월 28일)
무뢰배들은 늘 있게 마련이다. 조선시대 노소의 구분이 뚜렷했지만 불량배들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어젯밤 이웃 서시운이네 집에서 무뢰한 불량 소년들이 북을 치며 시끄럽게 노래를 불렀다. 광릉 소년 두서너 명도 와서 함께 놀았다. 이에 이웃에 사는 노인이 '국상(신정왕후 기년상)을 만나 국법에 저촉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타일렀지만 그들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여전히 소란을 피우고 시끄럽게 떠들었다. 몹시 통탄할 노릇이다. 그들은 밤중에 그 노인 집으로 몰려가서 몽둥이로 문짝을 두들겨 부수고 욕지거리를 많이 하였다 하니 괴이하고 밉살스럽다." (1891년 1월 5일)
재난도 이어져 백성들이 고통받았다.
"금년 8월 초에 우역(牛疫)이 크게 창궐하여 각처의 소들이 거의 모두 죽었으니 이는 근래에 보기 드문 변고이다. 이로 말미암아 쌀 1되에 2냥 8~9전이요 땔나무 1짐에 5냥이 넘으니 이는 근래에 보기 드문 변고이다. 금년 보리 파종은 모두 사람이 갈고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자연히 많이 심지 못하였으니 내년 보리농사가 크게 걱정스럽다." (1891년 10월 5일)
일기에는 당시 쓰이던 구급 민간요법도 나타난다.
"스스로 목매어 높이 매달려 있는 자는 ~ 한 사람이 발로 그 양 어깨를 밟고 손으로 그 정수리 머리카락을 움켜잡아 혈관이 팽창하여 맥박이 급하게 하라. 다른 한 사람은 손으로 그 가슴을 문지르고, 그 팔다리를 굽혔다 폈다 하라. ~ 익사한 자는 사다리에 그 사람을 태워 거꾸로 놓고 소금으로 코를 막아 가득 채운다. 소금이 녹으면 곧 깨어난다. 소금으로 배꼽 위를 문지른다. 동사로 숨결이 조금 있는 자는 ~ 쌀을 볶아 뜨거운 것을 주머니에 담아 가슴 위를 다림질하고 식으면 즉시 바꾼다. 혹 뜨거운 아궁이 재도 괜찮다. ~ 다치거나 혹 타박상으로 갈비뼈가 부서지고 창자가 나왔으면 급히 기름을 발라 들여보내고, 인삼·구기자를 끓인 즙을 뿌려라. 양신죽(산양의 콩팥을 쑨 죽)을 계속 먹으면 10일이면 낫는다. ~ 비상 중독에는 산 양을 찔러 나온 피를 복용하라. ~ 복어 중독에는 호마유(참기름), 대두즙, 감람즙이 모두 해독할 수 있다. ~ 침을 잘못 삼켰을 때는 잠경(고삼)을 달여 부추와 함께 먹으면 저절로 내려간다."
▲ 청일전쟁 서해해전 판화.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를 몰아내기 위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안산어촌박물관 소장
정치적 사건도 언급된다. 청일전쟁은 일본과 청나라 간 조선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싸움이다. 일본은 조선조정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이자 이를 빌미로 군대를 파견해 충돌했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청나라에 압승을 거두면서 한반도 침략을 본격화한다.
분원에 있던 저자에게도 전쟁은 인지됐다.
"청나라 사람이 통역을 데리고 와서 앞 점방에 머물고 있다. '아산에 주둔한 군사가 상경하려고 하는데 좁은 길로 행군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상황을 탐문하러 왔다'고 하였다. 동정을 자세히 살펴보니 저들은 왜병을 피하여 지름길로 올라오려고 계획한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이곳으로 길을 정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자면 소동이 없지 않을 것이니 여기 사람이 어찌 편안히 지낼 수 있겠는가. 우려할 일이다." (1894년 6월 3일)
"원경이 말하기를 '오늘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일본 병사 몇 천 명이 광화문 밖을 막고 진을 치고 궁성을 포위하였다. 총포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데 뜻밖에 생긴 변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 도성 안 백성들은 남녀노소의 곡성이 땅을 진동하고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이끌고서 성문을 나서는 참혹한 형상은 이루 말로 형용하기 어렵다. ~ ' 하였다. 몹시 한스러우나 어찌하겠는가." (1894년 6월 21일)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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