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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로렌스의 좀비론
D.H. Lawrence's "the living death" refers to the state of modern, mechanized life, a spiritual and vital decay he contrasted with true, spontaneous living, often explored in his late poems like "The Ship of Death", which uses the imagery of building a small vessel for the soul's journey to oblivion, but ultimately finds rebirth from death, and in poems like "Let the Dead Bury their Dead" that decry industrial "corpses" and "lies" of the dead.
D. H. 로렌스가 말한 **「살아 있는 죽음(the living death)」**은 현대의 기계화된 삶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가 참된 자발적 삶과 대비시킨 영적·생명적 쇠퇴를 뜻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후기 시편들에서 자주 탐구되는데, 예를 들어 **「죽음의 배(The Ship of Death)」**에서는 영혼이 망각으로 향하는 여정을 위해 작은 배를 짓는 이미지를 사용하지만, 결국 죽음 속에서의 재생을 발견한다. 또한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들을 묻게 하라(Let the Dead Bury their Dead)」 같은 시에서는 산업 사회가 만들어낸 ‘시체들’과 죽은 자들의 ‘거짓’을 통렬히 비판한다.
It's about the process of dying within life, a spiritual stagnation that requires a rebirth through embracing elemental life and rejecting industrial falsehoods, as seen in his famous quote, "The dead don't die. They look on and help" (meaning the dead past hinders the living).
Key Concepts
Spiritual vs. Mechanical Life: Lawrence contrasted the vibrant, intuitive "living soul" with the sterile, machine-driven world, seeing modern society as a "bad process of dying".
"The Ship of Death": A central metaphor for accepting the inevitable journey of the soul, building a vessel to navigate the darkness of oblivion, but finding renewal (a "flood-dawn") and return to life, as described in this YouTube video.
Critique of Modernity: Poems like "Let the Dead Bury their Dead" attack the "great lie of the dead" – the false "life" provided by industry (cinemas, radios, engines) that enslaves people, demanding they serve the "gold-toothed dead".
Rebirth through Death: The "living death" isn't just an end; it's a necessary stage for a profound renewal, a shedding of the old self to allow for a new, more authentic existence, even out of oblivion.
In Essence
For Lawrence, the "living death" is the spiritual paralysis of contemporary existence, a state where people are technically alive but spiritually dead, trapped by materialism and false ideals.
True life, he argued, required a conscious, sometimes painful, journey through death (or the end of the old self) to achieve a deeper, more vital, and spontaneous way of being, as explored in this literary analysis.
이율배반적 문명비판의 성찰
- 詩에 대한 로렌스의 코멘트 -
"세상이 그토록 많은 거짓으로 뒤덮여 있지 않다면, 나는 작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황량하고 사랑스럽지 못한 현실의 시대에 우리 시의 본질은 전혀 거짓이나 빗나감이 없는 황량한 직접성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진술의 이 황량하고 헐벗은 거친 직접성, 바로 이것만이 오늘날 시를 만들 수 있다"
"젊은이는 자신의 악마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악마의 입을 자신의 손으로 막고 자기가 그를 대변한다. 그리고 젊은이가 말하는 것이 시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나는 악마가 자신의 말을 하도록 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젊은이가 끼어들은 구절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나에게는 유령들이 어딘가로부터 오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서 오는지 잘 알지는 못한다. 내가 모르고, 내가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나로부터 와서,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차라리 말하지 않았을 것들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거기에 존재한다. 나는 그것들을 다시 읽는 일이 결코 없다"
DH 로렌스(1885~1930)는 性적인 내용의 소설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詩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다. 사실 性은 곧 "약동하는 생명"이기도 하다. 현대에 와서 기계문명과 함께 이미 사람들은 자본의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렸고,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해서는 잊은지 오래이다. 깊은 숲속에서의 "자신의 영혼과 대자연에 대한 관조"는 사치로 여겨질 만큼 우리는 정신적으로 메마르다. 오로지 "생존"만 있는 것인가?
로렌스는 현대 문명을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상태(the living death)"라는 형용모순으로 표현한다.
로렌스는 새롭게 떠오른 미국에 대한 문명 비판과 기울어져 가는 "대영제국"의 관습과 제도, 그 허울만 남은 윤리의식을 이율배반적 관점에서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의 조국 영국에서 철저히 탄압당하고 배제당한 그는 결국 프랑스에서 45세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죽는다. 그의 대표작인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첫 출판은 1928년이었는데, 영국/미국의 출판업자들이 인쇄를 거부하자 자신이 직접 제작하여 피렌체에서 출판하지만, 이 책은 영국과 미국의 세관을 통과할 때마다 외설물 단속에 걸려 압수당한다.
로렌스는 자신의 소설과 호색문학은 분명히 다르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호색문학은 성을 모욕하고 먹칠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용서할 수 없다. 이는 생명이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모독이다.” 로렌스는 자신의 작품이 바로 "생명이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존중"을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소설의 한 대목에서 로렌스는 이렇게 말한다.
“성은 모든 접촉 중에서 가장 밀접한 유일한 접촉이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접촉이지요. 우리들은 반쯤 의식하고 반만 살아 있는 셈입니다. 우리들은 생기를 띠고 또렷이 이해해야 해요. 특히 영국인들은 서로 조금은 섬세하고 부드럽게 접촉해야만 하지요. 이것이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하답니다.”
<제대로 된 혁명>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지나치게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이 미워서 혁명을 해서는 안 된다
그저 그들의 눈에 침 한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좇는 혁명을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을 하지 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어야 한다
사과 실린 수레를 뒤집고 사과가 어느 쪽으로
굴러가는가를 보는 건 얼마나 재미있는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작은 귀족이 되는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어쨌든 세계 노동자들을 위한 혁명은 하지 마라
노동은 우리가 이제껏 너무 많이 해온 게 아닌가
노동을 폐지하자,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
일은 재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일은 노동이 아니다
노동을 그렇게 하자!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디종의 영광>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면
난 그녈 바라보며 서성인다.
창문 아래 목욕수건을 펼치는 그녀에게
아침 햇살이 머물러
어깨 위에서 하얗게 반짝이고
그녀의 몸 선을 타고 흐르는 농염한 황금빛 그림자는
그녀가 스펀지를 집으려 허릴 굽힐 때
불타오르고, 출렁이는 젖가슴은 요동친다. 활짝 핀 노란 장미
'디종의 영광'처럼.
<미국 독수리>
새끼 양을 잃는
순한 얼굴의 어미 양 면전에서 거대한 날개를 펴고,
어린 피를 마시며,
세상에 대한 또 하나의 위엄을 상실하는 것.
그것이 너, 미국의 독수리인가?
아니면, 너는 고기를 요구하는 이에게 그저 돌멩이에 불과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가?
<미국 독수리, The American Eagle> 이하의 詩들은 문명 비판이기에 해석이 필요하다. 강용기의 해석에 따른다.(투사와 관찰: D. H. 로렌스와 개리 스나이더의 자연시학 비교, 강용기)...<미국 독수리>는 야생동물에 대한 작가의 문화적 의미의 투사가 강하게 배어있다. 시에서는 독수리의 실제 모습이나 생태에 관한 묘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독수리나 사조새(pelican)는 북미 인디언이나 유럽계 미국인의 국가를 표상하는 상징물에 불과할 뿐이다. 북미 인디언의 문화적 아이콘인 독수리는 죽고, 유럽인이 지배하는 미국의 독수리(‘another eagle’)가 태어났다. 시인은 새로 태어난 거대한 독수리가 추구할 것이 자명한 제국주의와 물질주의 문화를 우려하고 있다.
독수리의 모습은 독수리의 자연 생태와는 무관한 제국주의와 물질주의의 문화적 은유다. 그것은 시인의 반문화적 투사일 뿐이다. 시인은 독수리의 거대하고 힘센 이미지를 빌어 ‘의기양양한 새 공화국’(The new Proud Republic)의 오만을 계고하고 있다. 독수리의 실제 생태와는 무관하게 이 미국의 독수리는 ‘썩은 황금알’을 낳거나 아니면 자신의 영화(榮華, ‘a few golden breast-feathers’)를 약자에게 베푸는 ‘사조새’가 될 것이라는 지극히 인간화된 의미의 투사 대상일 뿐이다.
로렌스의 비판의 표적은 관념과 이성에 매몰되어 몸과 감성의 힘을 잃어버린 현대의 반생명적 산업문화다. 시적 화자가 독수리를 배척하는 것은 낮과 밤, 밝음과 어둠의 균형감각을 잃은 현대문명을 거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래서 화자는 피를 빨면서 사람들을 초조하게 하는, 목살이 늘어진(jowl-faced) 독수리나 “피에 목마른 너[독수리]의 태양”(your blood-thirsty sun)에게 굴복하지 않겠다고 단언한다. 시인은 “어둠의 제왕”(Lord of the dark)으로서 창백한 얼굴로 굳어진 여상주(女像柱, caryatids)들, 그녀들의 고매한 견해, 옳고 그름의 답답한 지붕에 갇혀 서있는 그들과 그들의 특별한 천국들을 부수겠다고 다짐한다. 여기에서 시인은 계층적 이원론에 빠진 문화를 재건하겠다는 혁명가에 다름 아니다.
로렌스는 독수리와 같은 특정한 동물에 부정적인 의미를 투사하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그의 시 속에서 찬미의 대상이다. 그만큼 야생동물들은, 마치 블레이크(William Blake)에게 서양의 전통적인 가치체계에서 규정한 악이 오히려 “진정한 인간성과 상상력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긍정적인 요소” 가 되듯이, 로렌스에게는 야생동물들이 인간이 상실해버린 건강한 속성과 덕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은유체이다. 그의 시에서 자유로운 어치(blue jay)는 끊임없이 노심초사하는 인간을 조롱하고, 인간에 의하여 쉽게 길들여진 암말과는 달리 고집쟁이 당나귀는 찬미의 대상이다. 급기야 한 마리의 “날씬한 황색 호랑이”가 수백만에 달하는 인간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 심지어 「붉은 늑대」(“The Red Wolf”)에서는 늑대가 화자로 등장하여 길을 잘 못 든 인간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붉은 늑대>
나는 황혼녘에 터벅터벅 걸었기에,
인간이 서쪽으로 떠난 이곳까지,
그리고 그를 이곳에서 잃었기에,
나는 바로 이곳에서 내 꼬리를 깔고 앉아
그가 새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나는 붉은 늑대다.’라고 그 어둠의 조상은 말한다.
그렇다. 붉은 새벽의 늑대가 나다.
‘인간이 서쪽으로 떠났다.’는 인간이 야생과 야성을 멀리하고 서구문명을 좇았다는 은유일 터이다. 그러나 숲속에 남은 붉은 늑대는 친구(인간)가 어둠의 문화와 조율된 ‘새로운 이야기’의 문화로 거듭나기를 기다린다. 늑대는 시인의 대리인으로서 “늪에 빠진 문명의 파편들”을 치우려 한다. 생태적 현실 속의 늑대는 어쩌면 인간이 영영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지도 모르지만, 시인은 늑대에게 이상적인 인간 교사의 이미지를 강하게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뱀」(“Snake”)은 인간적인 의미가 이중으로 투사된 시이다. 이 시에서는 아 마도 물을 마시기 위하여 물통 주변에 나타난 뱀의 생태가 비교적 생생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두 가지의 상충된 은유적 의미를 차례로 뱀에게 투사한다. 화자가 ‘볼품없는 나무토막’(clumsy log)을 뱀에게 던지기 전까지 뱀은 악마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뱀은 화자가 두려워하지 말고 죽여야 마땅한 존재이다(“If you were not afraid, you would kill him!”). 자연 상태의 뱀과는 무관한 인간중심주의적인 의미가 뱀에게 덧씌워진 결과다. 그러나 화자가 뱀을 해치려던 ‘쩨쩨하고’(paltry) ‘천박하며’(vulgar), ‘야비한’(mean) 행동을 뉘우치는 순간부터 이 뱀은 갑자기 왕관을 쓰지 않은 지하의 왕으로 돌변한다. 핀토(V. de S. Pinto)가 언급하듯이 뱀이 신비스러운 자연의 어둠을 은유한다면, 뱀은 어둠의 신이다. 작가가 이 시에서 “종교적 편견, 공교육의 한계, 금기 사항의 유혹” 혹은 “성적인 지식의 유혹”의 문제 중 어느 하나를 그의 주제로 다루든지 아니면 그 전체를 하나로 묶어 이원론적 밝음의 문화의 한계를 지적하든지(Sword 129), 그는 뱀에게 인간화된 의미를 교차하여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뱀>
뱀 한 마리가 내 물통으로 왔다
덥고 더운 날에, 나도 더위 때문에 파자마 바람으로 갔다,
거기에 물 마시러.
크고 잎이 무성한 캐롭나무의 짙은, 이상한 향기가 나는 그늘 아래로
나는 주전자를 들고 층계를 내려왔다
그리고 기다려야, 서서 기다려야 했다, 왜냐면 거기에 그가 나보다 먼저 물통에 있었기에.
그는 어둠 속에 있는 흙담의 갈라진 틈에서 아래로 내려와
부드러운 배 지닌 황갈색 늘어진 몸을 아래로 끌고 내려와, 돌물통 가장자리 위에 걸치고
그의 목을 돌 밑바닥 위에 쉬게 했다,
그리고 물이 꼭지에서 떨어져, 작고 맑은 곳에서,
그는 곧은 입으로 홀짝거렸다,
부드럽게 곧은 잇몸을 통해 마셨다, 그의 늘어진 긴 몸속으로,
조용히.
누군가가 나보다 먼저 내 물통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뒤에 온 사람처럼, 기다렸다.
그는 마시다가 머리를 쳐들었다, 소들처럼,
그리곤 나를 막연히 바라보았다, 물 마시는 소들처럼,
그리곤 두 갈래진 혀를 입술에서 날름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몸을 구부려 좀 더 마셨다,
지구의 불타는 창자에서 나온 흙-갈색, 흙-금색 뱀이었다
시실리의 7월의 날에, 에트나산은 연기를 뿜고 있었다.
내 교육의 목소리는 내게 말했다
그는 죽여야 한다고,
왜냐면 시실리에선 검은, 검은색 뱀들은 무해하지만, 황금색 뱀은 해롭기에.
그리고 내 내면의 목소리들은 말했다, 만일 네가 남자라면
막대기를 집어 들어 지금 그를 때려야 한다고, 그를 죽여야 한다고.
그러나 고백해야하나 그가 손님처럼 조용히 와서 내 물통에서 마시고,
평화로이, 만족스러이, 그리고 감사도 없이,
이 지구의 불타는 창자 속으로 떠나기에
얼마나 내가 그를 좋아했는지, 얼마나 내가 기뻤는지를?
비겁 때문이었나, 내가 그를 감히 죽이지 못한 것은?
괴팍함 때문이었나, 내가 그에게 말하고 싶어한 것은?
비굴 때문이었나, 그리도 영광스럽게 느낀 것은?
나는 지극히 영광스럽게 느꼈다.
그러나 그 목소리들:
네가 두려워 않는다면, 너는 그를 죽일텐데!
진정 나는 두려웠다, 나는 매우 두려웠다,
그러나 그래도 더욱더 영광스러웠다
그가 은밀한 지구의 컴컴한 문 밖으로 나와
내 환대를 찾은 것은.
그는 실컷 마셨다
그리곤 고개를 들었다, 꿈꾸듯, 술 취한 사람처럼,
그리곤 갈라진 밤같은 혀를 공중에 날름거렸다, 아주 검은,
입술을 핥는 듯이 보였다.
그리곤 신처럼 둘러보았다, 보려고 하지도 않으며, 하늘을,
그리곤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그리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치 세 겹의 꿈을 꾸듯,
느리고 긴 몸을 둥그스럼하게 구부려 당겨
내 담 표면의 무너진 둑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머리를 저 무시무시한 구멍 속으로 넣었을 때,
그리고 그가 끌어올려, 어깨를 뱀답게 느슨히 하고, 더 멀리 들어갔을 때,
그가 저 무시무시한 검은 구멍 속으로의 물러남, 고의로 암흑으로 들어감,
그리고 천천히 몸을 끌어들임에 대한 일종의 공포, 일종의 항의가
나를 압도했다 그의 등이 돌려졌을 때.
나는 둘러보았다,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모양없는 나무조각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물통에 던졌다 찰싹 소리가 나도록.
내 생각엔 그것이 그를 맞추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 남아있던 그의 부분이 위엄없이 서둘러 움찔하고,
번갯불처럼 몸부림치며 가버렸다
그 검은 구멍, 담 표면의 지구의 입술같은 갈라진 틈 속으로,
그것을, 강렬하고 고요한 한낮에, 나는 매혹되어 응시했었다.
그리고 즉각 나는 그것을 후회했다.
나는 생각했다 얼마나 시시하고, 얼마나 저속하고, 얼마나 비열한 행동이었나를!
나는 경멸했다 나 자신과 내 저주받은 인간교육의 목소리들을.
그리고 나는 알바트로스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바랐다 그가 돌아오기를, 나의 뱀이.
왜냐면 그는 내겐 또다시 왕처럼,
이제 다시 왕관이 씌워져야 마땅한,
왕관을 못쓰고 하계에 있는, 추방당한 왕처럼 여겨졌기에.
그리하여 나는 놓쳐버렸다 생명의 귀족들 중의 한 분과의 기회를.
그리고 나는 속죄할게 있다.
좀스러움을.
문화적 은유의 투사는 식물을 묘사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특정한 식물의 생태적 특성을 들어 그것을 자신이 이원화한 문화적 특성 중 어느 하나와 연상시킨다. 예컨대, ‘활짝 피어 하늘을 향하여 웃음 짓는’ 장미는 관념과 이성 중심주의에 도취된 서구문화의 상징이라면, “어둡고 꽃이 없으며, 덩굴손이 있는” 포도나무와 “여음상”을 닮은 “잘 익은 무화과” 그리고 여성의 음부 혹은 하데스(Hades)가 지배하는 지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연상시키는 석류 등은 만물의 감성과 생명성이 보장된 또 다른 문화의 제유들이다. 시인의 눈에는 관념과 이성에 취한 현대문명은 마치 술에 취한 알콜 중독자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의 서구인들에게 문화적 절주(節酒, sobriety)를 요구한다. 그 방법은 어둠의 포도주를 마시고 지 하의 세계로 내려가라는 역설이다.
양치류는 꽃이 피지 않는 식물이지만 2억 6,000만 년 전에 시작된 석탄기 때 육지에서 가장 번성하였던 식물이다. 따라서 시인은 이성 중심의 문화가치를 편식한 현대문명이 포도주의 거리와 양치류가 은유하는 어둠의 요소를 그 해독제로 취하여 건강한 문화로 재탄생하기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시에 등장하는 포도나무와 양치류 혹은 장미는 인간에게 아무런 충고도 하지 않는다.
포도주의 거리는 어둡다.
그리고 우리는 넘어가야 한다,
양치류 냄새가 나는 잃어버린 세계의 변방을,
우리가 그러지 못할지라도.
양치류의 씨앗을 우리의 입술에 물고,
눈을 감고 내려가라
덩굴손으로 뒤덮인 포도주의 거리와 다른 세상으로.
D.H. Lawrence Ranch
Lawrence's memoria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