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시 살해된 이정 부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정 부사는 삼척부사로 재임할 때에도 탐관오리의 악정을 폈다 하며 1870년 봄에 영해부사로 부임하자 전형적인 탐관오리의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羅巖隨錄"에는 “이정이 영해읍을 다스릴 때 비할 데 없이 부정하게 재물을 탐했다. 생일에 경내(境內)의 대소민들을 모두 불러다가 잔치를 베풀면서 떡국 한 그릇에 30금씩 거두어 들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탐관오리였던 이정을 "고종실록"에는 ”인부(印符)를 굳게 지키며 의로 항거하다 변을 당한 것”을 높이 사서 그에게 이조판서 벼슬을 추서했다고 하였다.
모처럼의 거사가 성공한 직후 고무된 이필제가 스스로 물러난 이유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영해를 차지하고 관군과 맞서 오래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영해부의 습격을 하나의 시험 사례로 벌여 보고 힘의 축적을 위해 후퇴했을 것이란 점이다.
동학도들은 당초부터 다른 군·현을 공격할 계획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嶠南公蹟" 박영수 문초에는 “형님(박영관)이 무리들을 이끌고 우리 집을 지나갈 때 나에게 말하기를 내일 영해읍을 떠나 태백산 황지(潢池)로 가려 하니 너는 식구를 거느리고 따라오라.”고 하였다. 거사 전에 이미 영해읍성만 점령한 다음 철수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동학도들은 영해 관아만을 습격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주력 무리는 험준한 일월산으로 들어가 추적하는 관군과 유격전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백성을 진정시키고 거사의 당위성을 알리는 중 돈은 떨어지고 식량은 바닥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필제에게 백성을 위해 일으킨 거사가 일반 백성을 약탈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이필제 무리가 영양 쪽으로 달아나면서 민가에 불을 지르고 약탈했다는 증언은 있지만 이는 대부분이 고을에서 악명 높은 악질 지주와 양반층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더욱이 날씨마저 나빠 연일 천둥을 동반한 폭우가 내렸다.
병력은 급격히 이탈하기 시작했다.
14일에 이필제가 해월이 은거하고 있던 영양 일월산의 윗대치에 도착했을 때의 숫자는 40여명에 불과했다.
해월은 이들을 위해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지만 곧 들이닥칠 관군에 대한 대비가 절박했다.
한편 정부는 이 소식을 접하자 14일자로 흥해군수 김홍관(金弘灌)을 영해부에 겸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영덕현령 정중우(鄭仲愚)로 하여금 영해부에 병력을 출동시키게 했다. 그리고 인근의 연일(延日), 장기(長髮), 청하(淸河) 세 고을의 현감도 출동시켰다.
16일에는 안동진영과 경주진영에서도 병력을 이끌고 왔다.
결국 해월은 이필제, 강사원, 전성문을 대동하고 일월산의 윗대치를 탈출해 대치(竹峴)를 넘어 봉화로 피신하였다. 주동자를 놓쳐버린 관군은 일월산에 숨어들었으리라 믿고 연일 샅샅이 뒤지게 하였다.
영양의 산골은 원래 험한 곳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순영은 각 고을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일월산 쪽으로 파견하였다.
정부는 16일에 비로소 영해부사에 이정필(李正弼)을, 영해부 안핵사에 안동부사 박제관(朴齊寬)을, 영덕현감에 한치림(韓致林)을 임명하여 현지에 급파하였다. 새로 임명된 영해부시와 영덕현감은 7일 만인 3월 22일에야 현지에 부임하였다.
영해부 안핵사로 임명된 안동부사 박제관은 3월 21일경에 안동진영에 국청(鞠廳)을 설치했다.
그리고 22일에는 각 고을의 동학 죄수들을 안동으로 이송하라고 명을 내렸다.
3월 24일부터 가혹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연루자가 새로 드러날 때마다 군 현에 명령을 내려 계속 체포하도록 하였다.
영해의 난으로 인해 5월 2일 현재 영해, 청하, 평해, 영양, 영덕, 청송, 경주, 밀양, 울진, 삼척, 전라도 남원 등지에서 체포된 동학도는 모두 93명에 이르렀다.
5월 초순께 안핵사는 안동진 옥사가 비좁아 여러 군·현에 죄인들을 분산하였다.
대구, 청도, 성주, 고령, 태곡, 경주 등지의 감옥으로 나누어 보냈으며 죄가 가벼운 23명은 해당 군·현에서 처분하도록 위임해 버렸다.
각 군·현별로 이송 수감된 인원을 보면 대구부 48명, 청도군 7명, 고령현 6명. 성주목 4명, 칠곡부 8명, 경주진 1명. 각해읍 환수자 23명이다.
6월 중순경에 일단 심문은 종결되었으며 정부는 6월 24일에 형량을 정하였다.
심문 중에 물고(物故)된 이는 12명이었으며, 형을 받고 효수된 이가 32명, 엄형 3차 후 원악도 정배간 이가 2명, 엄형 2차 후 절도(絶島)로 정배간 이가 5명, 엄형 1차후 원지(遠地)에 정배간 이가 14명이었다.
그리고 29명은 경상감사에게 위임하여 경중을 가려 처리토록 하였으며 나머지 15명은 방면하였다.
자진자와 물고자 그리고 참형되어 목숨을 잃은 자가 45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