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위해
유아기부터 소년기까지의
기억을 조심스레 불러내 보았지만,
긴 여행 끝에 깨달은 것은
내가 돌아가 머물고 싶은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텅 빈 손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것은 열여섯 살의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삼 년상을 마친 뒤부터,
이부형은 숨겨왔던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동생과 저를 집 안에 가둔 채
집 문서에 도장을 찍으라며
때리고 협박했습니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어린 처지에
가혹한 운명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집 내놔라.
양도서에 도장 찍어라.”
아버지를 빼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저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동생들 앞에서도 폭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일들은 늘 문 닫힌 방 안에서,
이웃이 모르게 이어졌습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땅을 판 돈으로
화물차 세 대를 가로챘고,
우리가 살던 집마저 팔아
큰 화물차를 장만하며 사장이 되었습니다.
저와 두 여동생에게 남은 것은
갈 곳 없는 현실뿐이었습니다.
열여섯 살의 나이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던 시절,
당장 오늘과 내일의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어린 두 여동생의 눈에는
말하지 않아도 두려움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때 동네 형이 툭 던지듯 말했습니다.
“야, 공무원보다 기술이 낫다.
손재주 있으니 기술 배워라.”
그 말은 조언이 아니라
제가 붙잡을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손에 쥔 것은 없었지만,
손재주만은 믿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대방동 돈보스꼬 직업훈련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기름 냄새가 가득했고,
기계 소음이 하루 종일 멈추지 않는 곳이었지만
그곳은 제게 고통의 장소가 아니라
잠시라도 현실을 잊을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저를 살게 했습니다.
차가운 쇠붙이를 깎고 다듬는 동안만큼은
집 걱정도, 앞날 걱정도
머릿속에서 멀어졌습니다.
도면 속의 선들이
손끝에서 형상으로 바뀌어 나올 때,
저는 막연하지만 분명한 예감을 느꼈습니다.
이 기술이
지금의 나를 살려줄 뿐 아니라,
언젠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예감이었습니다.
1년의 과정을 마치고
저는 기능공 증서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종이 한 장이었지만,
그것은 세상에 내밀 수 있는
제 첫 번째 이름표였습니다.
증서를 들고 들어간 첫 철공장은
멋진 곳이 아니었습니다.
낡은 피대걸이 선반기계 몇 대가 전부인,
시끄럽고 거친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공장에 꼬마가 들어왔다는 소문에
형들과 기술자들이
어린 제 얼굴을 한 번씩 보러 오곤 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기술학교를 수료했고
기초 이론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들의 태도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현장에서 몸으로만 배운 형들이
오히려 제게 질문을 던졌고,
이론이 정리되지 않았던 계산 앞에서
저는 처음으로
기술이 사람을 지켜줄 수 있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저는
기술을 수료하고 공장 실습 2년을 거친 뒤,
열아홉의 나이에
두 여동생의 손을 붙잡은 채
완전히 빈손으로 사회 한복판에 서게 되었습니다.
불안한 소년이었지만,
손에는
놓지 않을 무기가 하나 생겨 있었습니다.
—✨Tipster✨나는 주체성을 찾아가고있다✨—
깨달음이란 스스로 얻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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