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 다섯 번째 법문(행위와 태어남)
법구경 316장과 317장에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치스럽지 않은 일을 수치스러워 하고,
마땅히 수치스러워 해야 할 일에 수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잘못된 견해로 가득 찬 이런 존재들은 비참한 세계로 가리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에서 두려움을 보고,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에서 두려움을 보지 않는 사람들,
잘못된 견해로 가득 찬 이런 존재들은 비참한 세계로 가리라.”
부처님의 이 같은 말씀들은 현대사회를 반영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가난한 이들이 자신들의 가난을 수치스러워하고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를 자랑스러워합니다.
외모가 보잘 것 없는 이들은 스스로의 못남을 수치스러워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은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돈과 외모가 수치스러움과 그렇지 않은 것의 잣대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경우이건, 그 사람이 덕이 있다면 수치스러워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비도덕적이라면 그가 엄청난 부자이건
아무리 잘생겼건 자랑스러워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여러분은 언제나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그것이
선한 것인지 불선한 것인지를 항상 잘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옳고 그름의 차이를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하는데 도움 되었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그르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옳고 그름은 싫고 좋은 것으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한 것은 그 자체로 선한 것이고 불선한 것은 불선한 것입니다.
개인적 취향은 그것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경전으로 돌아가서, 그 천인의 두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멈추지도 않고 애써 몸부림치지도 않음으로써
건너기 어려운 그 홍수를 건너셨습니까?”
부처님께서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십니다.
“가만히 있었을 때 나는 가라앉았다.
애써 발버둥 쳤을 때는 쓸려 내려갔다.
친구여, 멈추지도 애써 발버둥치지도 않는 방식으로
나는 건너기 어려운 그 홍수를 건널 수 있었다.”
“가만히 있었을 때 나는 가라앉았다”는 말씀은
만일 어떤 사람이 옳지 못한 행위를 저질렀다면
그는 네 가지 비참한 세계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써 발버둥 쳤을 때는 쓸려 내려갔다”는 말씀은
만일 그가 건전한 행위를 한다면 그는 다시
인간이나 천인이나 브라마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멈추지도, 애써 발버둥치지도 않는 방식을 통해
그 분께서는 건너기 어려운 그 홍수를 건너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마음 그 자체는 근원적으로 순수하지만
탐욕, 증오, 망상, 오만, 질투, 인색함 같은 불선한 정신적
요소들과 연계되어 더러워집니다.
마음은 거의 언제나 불선한 행위들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연계되어있는 불선한 정신적 요소들 중 갈애라고도 하는 탐욕이 세상을 이끌어 갑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며
길거리를 행진하는 세상 사람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보다 나은 보수를, 어떤 이들은 복수를,
어떤 이들은 잔혹하고 비상식적인 체벌을, 또 다른 이들은 사형이나 정치적
변화를, 어떤 이들은 교육정책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낙태를 선택할 권리나 시술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요구는 감각적인 욕망에 대한 굶주림과 우리의 개인적
시각이나 의견이 수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명백히, 이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은 화를 내고 괴로워합니다.
반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기뻐하면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성공에는 종종 질투를 일으킵니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성공에는 어떻게 합니까?
자만심에 차게 되지요.
아침부터 밤까지 사람들은 온종일 행동으로 말로 생각으로
건전하지 못한 행위를 저지르며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가 수많은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 게 이상합니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대부분 탐욕, 증오, 망상, 오만, 질투
그리고 인색함이라는 집에서 살아 왔습니다.
이들은 진실로 우리가 기거해서는 안 되는 나쁜 집입니다.
우리가 비록 "집‟이라 불리는 물리적인 가옥에 살고 있으나
우리 중 거의 모두가 기거하는 진짜 집은
탐욕, 증오, 망상, 오만, 질투, 인색함인 것입니다.
이 같은 근본적인 번뇌들은 우리의 탄생에서부터 같이하여 일생동안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 대부분이 불행하게도 그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우리의 진짜 집이 됩니다.
법구경 주석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는 이들에게,
그 네 가지 비참한 세계는 마치 영원한 집과 같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우리는 손님으로 간 집에서 오래 머무르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지요.
이와 같이, 인간계와 천상계는 단지 때가 무르익어 우리가
임시적으로 방문하는 곳일 뿐입니다.
머지않아 우리의 번뇌들과 더불어,
우리는 진짜 우리 집인 네 가지 비참한 세계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사경 서적 - 레와따 사야도 법문 "깨어나라, 오 세상이여!" 중에서 / 레이 옮김
참 조
삿된 견해를 지닌 이는 악처에 태어난다.
☸ 법구경 316ㆍ317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에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삿된 견해를 지닌 이는 비참한 곳에 이른다.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에 두려움을 보고
두려워해야 할 것에 두려움을 보지 않는
삿된 견해를 지닌 이는 비참한 곳에 이른다.
바른 견해를 지닌 이는 선처에 태어난다.
☸ 법구경 318·319.
그릇된 것을 바른 것이라 알고
바른 것을 그릇된 것이라 아는
삿된 견해를 지닌 이는 악처에 태어난다.
바른 것을 바른 것이라 알고
그릇된 것을 그릇된 것이라 아는
바른 견해를 지닌 이는 천상에 태어난다.
의도한 업은 동일한 과보를 가져온다.
☸ 의도(산쩨따니까) 경, Sañcetanika-sutta, 앙굿따라니까야 10.206
의도하여 지은 업은 동일한 과보를 가져온다.
괴로움을 불러오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불선한 의도와 함께 몸·말·마음으로 행한
세 가지 모욕과 성냄으로 인하여
존재들은 몸이 쓰러져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불행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행복을 불러오고, 행복한 과보를 가져오는,
선한 의도와 함께 몸·말·마음으로 행한
세 가지 성취로 인하여
존재들은 몸이 쓰러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에 태어난다.
아리야 승원
010-7189-6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