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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끝에서 발견한 감사(박남규 지음)
제1부 영혼아, 영혼아 - 병상에서 만난 사람들
기다리시는 아버지
“무슨 일이 있으면 지체 말고 바로 연락을 주세요!” J씨의 가족들에게 신신당부를 해 놓고 병원 문을 나섰지만 ‘그래도 오늘은 견디시겠지’ 하고 생각했다. 다른 환자를 만나기 위해 인근 병원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J씨 아내의 음성은 긴박했다. 나는 즉시 모든 약속을 미루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J씨는 2년 전 간암에 걸려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나 각고의 투병 끝에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이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자신을 치료해 주셨다고 기뻐했는데, 회복된 지 반년이 조금 넘어 신장과 다른 장기에 암세포가 전이된 것이다. 우리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왜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것인가요? 왜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하죠? 왜?” 하고 분노하며 괴로워했다. 우리가 집으로 찾아가도 냉정하게 거절해 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우리 봉사자들은 그의 고통과 분노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인내의 한계를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봉사자들은 죽음에 직면한 당사자와 그를 돌보는 가족,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고 섬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얼마가지 않아 J씨는 분노의 감정을 버리고 예전의 평온함을 되찾았다. 가장이 변하자 가정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부인과 아이들이 안정을 찾았고, 그로 인해 식구들의 흩어졌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서로를 사랑하고 함께 투병하기 시작했다. 내가 급히 병실에 도착했을 때 J씨는 주님이 허락하신 길을 거의 다 달린 상태였다. “선생님! 이제껏 짊어지고 온 무거운 짐을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선생님을 기다리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선생님을 맞이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수많은 천군 천사가 선생님을 호위하고 밝은 빛을 향해 걸어가도록 인도해 주실 거예요.”
육신의 생명이 꺼져갈 때 가장 마지막까지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청력이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열려 있을 그의 귀 가까이에 서서 그가 평안 가운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J씨가 투병 중 즐겨 부르던 찬송가 <내 진정 사모하는>을 부르며 천국에 입성하려는 그를 응원했다. 그렇게 찬송과 말씀으로 위로하기를 세 시간이 흘렀다. J씨는 온몸에 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내쉬고 기진하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이 세상의 끈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J씨를 바라보는 것은 애가 타고 녹아 흐르는 것처럼 큰 아픔이었다.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임종을 보아 왔지만, 이토록 힘든 임종은 처음이었다. 찬송과 설교와 기도를 하도 많이 해서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이토록 세상을 향한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지쳐 쓰러져 있는 가족들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꼭 자리에 있어야 할 J씨의 자녀들이 보이질 않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J씨가 요양을 위해 강원도로 내려가 있다가 두 내외만 서울로 올라왔는데, 자녀들이 뒤늦게 연락을 받고 아직 도착하지 못한 것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지방에 있던 자녀들이 늦은 밤을 헤치고 달려왔다. 아들은 병실에 뛰어들자마자 “열심히 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아빠가 먼저 가 계신 천국에서 나중에 만나요! 아빠 약속해요.” 하고 말하며 울부짖었다. 아들의 말에 식구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한마디씩 전했다. 그리고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고, 들어야 할 말을 들은 J씨는 이내 평안해져서 자신의 52번째 생일을 3일 남겨 놓고 주님 앞으로 갔다.
J씨를 주님께 보내고 돌아오는 새벽하늘에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자식들을 보기 위해 끝까지 기다린 J씨의 모습이 마치 돌아오지 않는 자녀를 기다리며 문밖에서 애태우시는 하나님의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 저들을 찾으실 때 제가 더 충성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시옵소서. 주님이 찾으시는 저들을 위해...,“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나는 행복한 사역자
“징글벨, 징글벨.” 휴대폰 벨소리를 캐럴로 막 바꿨을 때 협력 사역을 하고 있는 장기기증운동본부의 한 형제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가 이상한 전화를 받았는데 아무래도 목사님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화를 해서는 자살한 사람의 시신도 받아 주냐고 물었거든요.”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자문을 구했다.
나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꼈다. 어쩌면 전화 속의 그 사람은 고통스러운 병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살을 결심할 만큼 고통받는 형제라면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 나는 받아 적은 전화번호로 계속 연결을 시도했지만 부재중이니 메시지를 남기라는 기계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벌써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전화번호의 국번을 통해 대략 주소를 알아내고 그 근방에 사는 봉사자와 동행했다. 형제가 살고 있는 동네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산동네였다. 길 가던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찾아간 형제의 집은 사람이 걸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그가 천장만을 응시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왜소하고 깡마른 체격의 그는 가끔씩 견디기 힘든 통증에 얼굴을 찡그릴 뿐 우리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쿠! 이거 헤매고 올라왔더니 다리가 엄청 아프네요!” 내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너스레를 떨었다. 방 안은 쓰레기와 음식 찌꺼기가 담긴 식기들로 가득했다. 형제가 입을 열어 “그래도 이곳은 저 아랫동네보다 공기도 좋고, 해를 서울에서 제일 먼저 볼 수 있어요.”라며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형제가 자기 집에 애착을 갖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직은’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 집은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판잣집이었다. 그래도 하늘을 볼 수 있도록 지붕을 뚫어 만들었다는 ‘지붕창’은 나름대로 운치 있어 보였다. “이렇게 좋은 집에 살면서 왜 죽으려고 해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제 나이가 마흔입니다. 한때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지요. 가구 공장을 운영하면서 아내와 단란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젊은 날에 무절제하게 산 탓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질병보균자란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모든 게 제 탓이었지만 아내에게 온갖 분풀이를 했습니다. 결국 이혼을 했고, 사업도 망했어요. 설상가상 어느 날부터 소화가 잘 안 되어서 병원에 갔다가 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손쓸 방법이 없다고 했지만 독하게 마음먹고 잘 버텼어요. 그런데 암이 골반으로 전이되어서 이제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합니다. 저로서는 이 고통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형제는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아버지 역시 위암으로 투병하던 중 골반으로 전이되었고, 가족들이 잠깐 집을 비운 사이 농약을 마시고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다. 고통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그 기억은 더 또렷이 되살아났다. 형제는 차분히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재혼한 전 부인이 어렵게 산다는 소식을 듣고 생명처럼 아끼던 서민아파트를 내주었고 자신의 몸은 기증하기로 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은 장례를 치러 주는 사람에게 주기로 유언장도 마련해 놓았다. 하지만 주변을 정리하면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죽음의 공포는 더해만 갔다. 그는 무섭고 떨려 가만히 누워 겨우 요기만 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그에게 가장 먼저 해 줄 일은 그가 다시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을 덜어 주는 일이 급선무였다. 통증 완화를 위해서 협력 병원들과 협의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형제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당장 끼니를 해결해 주어야 했기에 가지고 간 생식을 먹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형제에게는 낳아 준 어머니가 따로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한 분에게도 깊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자존감이 낮았다. 그가 지금까지 받아 보지 못한 사랑을 회복시켜 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특권과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을 주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사건을 전하고, 남은 삶을 사랑과 평안 가운데 보내도록 섬겼다. 그렇게 한 달이 조금 지난 1월 14일,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는 그가 듣고 마음을 열었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이루어져 있으리라 확신하면서 감사함으로 그를 떠나보냈다.
나를 사랑하는 성도들은 내가 조금만 피곤해 보여도 안쓰러워하며 “목사님은 왜 환자들, 그것도 가장 고통 받는 암 환자들을 위해 이 사역을 하십니까?” 하고 묻는다. 그 물음에 내가 “다른 사역자들이 힘들어하는 사역을 하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답하면 그들은 또 무엇이 그리도 행복하냐고 되묻는다. 이쯤 되면 나는 내가 왜 행복한 사람인지 반추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정서적, 사회적, 물질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가장 큰 고통은 죽음에 대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빈부의 차이와는 상관없다. 나는 죽음 앞에서 신음하는 수많은 사람을 소망 가운데로 인도하면서 감사와 기쁨을 느낀다. 그 속에는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오묘함이 있다. 이런 기쁨을 아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또한 나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여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도록 섬기는 특권과 함께 유가족들과 ‘우리’가 되어 삶의 변화를 통한 승리를 맛보는 현장에 서 있다. 어찌 내가 행복한 사역자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섬김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주께서 나에게 믿음과 사역을 통한 감사를 주셨기에 가능한 것이다. 고통받는 이들을 섬기는 사역은 하나님이 나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은혜의 비밀스러운 통로이다. 그렇지만 올 한 해 소망이 있다면 내가 행복하지 못해도 좋으니 더 이상 고통 받는 이들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소망일 뿐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 세상의 환경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우리 자신을 바꾸지 못하면 결국 나는 여전히 오늘도 ‘행복한 사역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맡은 일에 감사하며 그들을 섬길 것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예레미야애가 3:22, 23).
환자에서 호스피스로
환자의 명단을 펼쳐 놓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면 환자 명단과 호스피스 봉사자 명단에 중복되는 이름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환자이면서 자신보다 더 연약한 자들을 섬기기 위해 자원하여 봉사자로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다른 봉사자나 환자보다 더한 간절함이 베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들 중에 특히 마음을 더 아리게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임 선생이다. 그의 아내의 요청을 받고 처음 그의 집을 찾았던 것은 더운 여름이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그 원인은 모태신앙이면서도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던 임 선생이 자신의 그런 모습을 나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번창한 사업체를 거느린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러나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임 선생은 경제 사범으로 구치소에 수감되기에 이르렀다. 구치소에서의 삶은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그에게도 고통의 나날이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부터 소변을 마음대로 볼 수 없게 되어 검사를 받았는데 결과는 악성 방광암이었고, 치료를 위해 석방되었다.
그는 항암제 후유증으로 머리털은 하나도 없었으며, 부종으로 퉁퉁 부은 얼굴에는 불만스런 표정이 가득했다. 나는 말씀을 전하며 소망을 가지고 투병하자고 권면했다. 처음엔 닫힌 마음을 열지 않던 그가 차츰 깊이 묻어 두었던 믿음을 회복하고 의미 있는 투병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차 치료가 잘 마무리 되는가 했는데 암이 재발했다는 연락이 왔다. 병이 재발했으니 전에 받았던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그것도 자주 해야 한다는 말에 그는 금방이라도 폭발해버릴 것 같이 화를 냈지만, 한 가닥 소망을 걸고 치료에 임했다.
하루는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그를 보고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임 선생, 그렇게 두려워하지만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 호스피스 봉사자로 섬겨 보는 것이 어떻소?”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목사님, 내가 환자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실 텐데 어떻게 그런 제안을 하실 수 있습니까?”
내 제안을 뿌리치고 돌아갔던 그는 1주일 후에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하루 이틀 고민을 거듭할수록 꼭 해야 할 일 같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며 호스피스 사역에 지원했다. 그는 지금 능력 있는 봉사자이다. 그의 투병 생활이 다른 환자의 투병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환자들을 섬기며 사역 내용을 보고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완쾌된 자의 넘치는 기쁨이 묻어난다. 다른 사람은 똑같은 병세로 수술과 치료를 여섯 차례나 받아야 했는데 그는 오늘도 “아무 문제없음”이라고 쓰인 진단서를 들고, 환자이자 봉사자로서의 삶을 활기차게 살고 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베드로전서 4:7-11).
어느 유학자의 병상 세례
영정 밑에 있는 성경책은 잠언서 3장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고, 5-7절 말씀엔 빨간 색연필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성경책에는 사이사이마다 손수 만든 색인이 붙어 있었고, 성경책 옆에는 기도문이 펼쳐져 있었다.
영정의 주인공인 윤 선생은 대쪽 같은 성품과 전형적인 유교적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었다. 얼마 전에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그는 담낭암이 간과 여러 장기에 전이되어 소천했다. 향년 68세였다.
윤 선생에게 암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설명할 수 없는 기분 나쁜 통증이 가슴 밑으로 지나가기에 동네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는 더 큰 병원으로 찾아가 볼 것을 권유했다. 윤 선생의 아들 내외는 종합병원에서 최종 진단 결과를 받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담낭에서 시작된 암이 이미 간과 전신으로 퍼졌고, 이 정도라면 통증이 꽤나 심했을 텐데 지금까지 병세를 모르고 있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아들은 지금까지 청렴한 모습으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온 아버지의 삶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아서 가슴이 몹시 아팠다. 더 걱정인 것은 지금껏 쌓아온 많은 업적들 앞에서 허무해 하실 아버지였다. 그는 생각 끝에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고통과 상실감을 해결해 드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평생 유교를 신봉해 온 도도한 선비 같은 아버지를 생각하니 그 일이 쉬울 것 같지 않았다. 고민 끝에 그는 내게 전화를 해 왔다. 나는 15년을 넘게 호스피스 사역을 해오면서 많은 사람의 임종을 지켜왔지만, 비할 데 없이 도도하시다는 윤 선생을 만날 일을 생각하니 자꾸만 염려가 되었다.
처음 병상에서 만난 윤 선생은 굉장히 당당한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고고하신 유학자 앞에서 나이가 적은 내가 연륜을 논할 수 없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워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하나님은 질병 속에서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는 잠언서의 말씀을 읽어드렸다.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윤 선생은 편하게 이야기하자고 하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윤 선생은, 이 땅에서는 모든 생명이 죽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힘입어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복음의 핵심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윤 선생의 마음에 말씀의 씨앗이 싹을 틔우자 그는 “내가 어찌할꼬, 이같은 죄인이었으니” 하고 애통해했다. 첫 만남에서 감격적인 고백이 이루어진 것이다. 얼마 후, 윤 선생은 병상 세례를 받고 싶다고 했다. 세례식을 준비하고 윤 선생 집에 도착했을 때, 그분의 가족과 자녀들, 손자손녀들이 온 집에 가득했다. 다같이 찬송가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를 부를 때 윤 선생은 크게 통곡하며 신앙을 고백했다. 윤 선생의 회개와 기쁨의 눈물을 본 식구들도 모두 함께 눈물을 흘렸다. 세례를 마치고 그 집을 나올 때, 내 가슴속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벅차올라서 감격과 감사로 차고 넘쳤다.
다음 날, 그분의 가족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윤 선생이 내친김에 조용한 기도원에 가서 머물면서 생을 정리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었다. 그 후 2개월 남짓 기도원에 머문 윤 선생은 성경 색인표를 만들었고, 신약을 두 번 구약은 영정 앞에 펴놓은 곳까지 통독했다. 그리고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고통과 통증 속에서도 여러 기도문을 써 놓았다. 그 내용은 놀랍게도 윤 선생 자신의 고통보다는 기도원에서 만난 젊은 환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윤 선생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은혜로 치료해 주실 것을 간곡하게 기도했다. 기도문을 읽은 우리는 저절로 그 사랑 앞에 무릎이 꿇어졌다.
6월 말이 되자 윤 선생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혼수상태가 계속 되던 중 7월 3일, 갑자기 의식이 깨어난 윤 선생은 “예수님! 당신이 정말 살아 계시군요.”라고 세 번이나 똑같은 말을 했다. 자녀들이 무슨 말씀이냐고 묻자 윤 선생은 분명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예수님은 살아 계신다.”고 대답하고는 그날 밤 다시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7월 5일 아침 7시 50분에 온전히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다.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내 마음속에는 아쉬움보다는 감사가 더욱 크게 흘러나왔다. 한 영혼이 평생 동안 고수해 온 전통과 가치관을 내려놓고 몇 개월만에 예수님을 만나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된 감격을 뭐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밑줄이 쳐진 성경을 대할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 것이 고인과 가족에 대한 무례는 아니리라.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언 3:5-7).
제2부 남겨진 자들을 위하여 - 사별 관리
유가족을 돕는 실제적인 방법들
호스피스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가 환자의 가족을 돌보는 것이다.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가 남겨 놓은 가족의 사별로 인한 고통까지도 보살펴야 환자를 실질적으로 돕는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유가족을 위한 사별 관리는 말기 환자가 호스피스에 처음 가입하는 순간부터 계획되어야 한다. 환자가 임종하고 나면 이 땅에서의 모든 관계는 그와 상관없는 것이 된다. 사회적인 책임이나 의무, 부채 등은 이제 그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제 남은 가족들이 대신 짊어져야 할 몫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유족들은 배우자나 부모, 자식, 형제자매를 잃은 상실감과 아픔을 겪는다. 유족을 돌봄에 있어서 정서적인 측면을 우선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유족들의 감정은 단계적으로 변화한다. 우선, ‘거부와 분노, 직면, 조종’의 세 단계로 진행되는데, 이는 퀴블러 로스가 제시한, 죽음을 향해 가는 다섯 단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과 유사하다.
(1) 거부와 분노
이 단계는 처음 가족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나타나는 반응으로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지속된다. 유가족들은 충격과 혼란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해 장례식을 진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런 시기는 사별 직후 2주 안에 가장 심하게 나타나며, 기일이나 고인과의 기념일에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회복되기 위해서는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린다.
이 단계에서 회복되기 위해서는 먼저 억지로 상황을 바꾸려고 하는 것보다 사별자의 자조적인 한탄을 경청하고, 그들이 섬김을 받아야 하는 상처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 자녀들에게도 고인과 이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피곤을 쉽게 느끼는 시기이므로 긴 만남보다는 한두 시간 가량의 만남이 적당하다. 이야기의 주제는 돌아가신 분의 투병 생활 혹은 임종 당시의 상황, 장례식, 장례식 후 주위의 변화(감정적, 신체적, 경제적인 면) 등이 적절하다. 다음 약속은 한 달 뒤 정도로 하는 것이 좋다. 빈번한 접촉은 때로 유가족이 지나치게 봉사자를 의존하게 만들기도 한다.
실제로 유가족은 대화를 나눌 상대가 별로 없다. 특히 돌아가신 고인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그런 면에서 호스피스 봉사자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봉사자를 만나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봉사자는 유가족에게 좋은 친구인 셈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유가족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비밀스런 이야기를 할 때도 있는데, 이럴 경우 유가족에게 동화되어 같이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조용히 들어 준다. 마음에 상처가 있다면 따뜻하게 감싸주고, 중요한 사항은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2) 직면 단계
이 단계는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유족들은 현실에 적응하고자 하는 적극성을 보인다. 현실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하지만 포기보다는 노력과 시도를 행한다. 이 단계는 대부분 1, 2년 정도 걸리지만 그 이상 걸리기도 한다.
이 단계에서 봉사자는 유가족에게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산책, 수영, 쇼핑, 외출 등 가벼운 여가 활동을 하도록 격려한다. 만약 유가족이 혼자 할 수 없다면 날을 정해 함께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만약 유가족이 혼자 사는 처지라면 반찬을 만들어 주거나 집안 살림을 도와줄 수 있다. 혼자 사는 경우 제때 식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신체적 쇠약함이 사별에 대한 슬픔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적절한 도움을 준다. 만약 경제적으로 빈곤하다면 담당자와 의논하여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이 시기는 고인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생활을 위해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게 되는 때이다. 사별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이를 표현하며 고통의 정도가 점점 약해진다. 유가족에게 가족과 함께 상실의 슬픔을 나누도록 격려하고 대외적인 활동을 권한다. 이 과정에서 봉사자는 늘 수용적 자세를 갖고 유가족이 느낌과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기회를 준다. 또 미래의 계획을 세워 나가도록 적극적으로 조언하고, 소망을 심어 주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이겨낼 수 있음을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시편 42, 43, 121편, 요한복음 15장 1-11절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바라보게 해야 한다. 찬송은 그리스도, 인도와 보호, 거듭남의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 적절하다.
(3) 조정의 단계
섬김의 대상자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찾아 적극적으로 적응하는 단계이다. 고인을 회상해도 괴롭지 않고 어느 정도 정상 생활을 꾸려갈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고 발전시킬 수 있는 에너지와 능력이 생겨난다. 이 시기는 개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유가족이 고인의 추도식 1주기를 잘 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1주기가 되면 유가족은 고인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할 수 있다. 봉사자는 기일을 기억했다가 유족을 만나서 그 동안 변화된 생활과 만족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 시기의 유족은 동일한 상실감에서 회복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불면증도 없어지고, 쇠약해진 몸도 회복되며, 자신의 삶을 재조직하는 데 의욕을 보이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실에 당면했음을 느낀다. 긍정적으로 삶을 구성하고 독립된 삶을 시작하는 한편, 고인과 관계된 일들을 정리하고 이사를 한다거나 고인이 연상될 만한 물건을 정리한다.
호스피스는 이 단계에서 유가족에게 새로운 생활에 대한 의욕을 고취시켜야 한다. 직장이나 직업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고인과의 관계를 추억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조급하게 대상자를 재촉해서는 안 된다. 봉사자의 배려와 사랑이 담긴 카드를 보내거나 생일 등 기념일을 기억했다가 조촐하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자리를 만드는 것도 좋다. 사별이 가족의 새로운 삶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그들을 섬겨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인내심이다. 이 시기는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길면 2, 3년간 지속되기도 한다.
성경 말씀 예레미야 33장 1-9절, 이사야 53장, 시편 90, 103, 112, 119, 121편 등을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이 항상 우리의 길을 인도하심을 인정하게 한다. 찬송은 소명과 헌신, 인도와 보호, 분투와 승리의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을 부른다. 기도는 가능하면 섬김의 대상자가 하도록 유도한다.
제3부 호스피스가 되는 길
호스피스란 무엇인가
호스피스(hospice)란 라틴어 호스페스(hospes; 손님)와 호스피티움(hospitium; 손님 접대,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에서 유래한 단어로, 주인과 손님이 서로 돌보고 따뜻하게 맞아 준다는 의미에서 시작된 단어이다. 오늘날에는 임종을 앞둔 환자와 그의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행위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환자는 얼마 남지 않은 삶 동안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영적 돌봄을 받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호스피스이다. 또한 오늘날에는 환자 본인뿐만이 아니라 환자가 죽은 후, 고통과 슬픔에 잠겨 있는 유족들이 가족을 잃은 슬픔을 잘 극복하도록 섬기는 부분까지 확대되었다.
호스피스는 중세기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성지순례자나 여행자가 쉬어가던 휴식처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으로, 아픈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숙박을 제공하고 간호를 베풀면서 시작되었다. 십자가 운동 당시에는 호스피시아(hospicia)에서 여행자에게 휴식처와 음식과 옷을 제공했고, 파리의 수도자들은 호텔듀(hotel-dieu)를 운영하면서 임종 직전의 환자를 돌보았다.
독일에서는 1863년 프리드너 문스터 목사가 첫 프로테스탄트 병원을 설립하고 여집사단을 창립하여 소외되고 병든 자와 임종자를 돌보았으며, 영국에서는 1967년 시실리 손더스가 설립한 성 크리스토퍼 호스피스가 현대 호스피스 운동의 체계적 모태가 되었다. 성 크리스토퍼 호스피스는 초기 호스피스에서 제공했던 간호의 영적인 지지 및 정서적 지지를 바탕으로 말기 질환과 관련된 증상과 통증 조절에 초점을 두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5년 누가 병원에서 진통제의 제공을 치료법으로 실시하여 현대 호스피스의 통증 조절 지침의 기초를 마련했고, 1965년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수녀들이 강릉의 갈바리의원에서 처음으로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1981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학과 학생들 중심의 호스피스 활동이 시작되었고, 1988년에 세브란스 병원에 호스피스 제도가 도입되었다. 1992년부터 병원 중심의 호스피스 활동이 활발하게 시작되었고, 사랑의 교회와 이화여자대학교 간호과학대학이 가정 호스피스 사역을 시작했다.
이후 현재까지 신촌세브란스병원, 여의도성모병원,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성바로오병원, 전주예수병원, 고신의료원, 부산대학병원 등이 호스피스과를 두어 호스피스 환자를 관리하고 있다. 호스피스의 유형은 독립형 호스피스와 병원 내 산재형 호스피스, 병원 내의 병동 호스피스, 가정 호스피스로 나뉘어진다.
기독교 호스피스 봉사자가 봉사해야 할 대상은 일차적으로 말기 환자이다. 말기 환자는 투병 중에 대개 치료, 죽음, 미래 등 세 시기를 맞는다. 따라서 이들을 대하는 호스피스 정신은 바로 예수님이 주신 사랑이어야 한다. 말기 환자가 임종하는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을 지키도록 도와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남은 삶을 풍성하고 의미 있게 살도록 섬기고, 환자에게 찾아오는 극심한 정신적, 신체적 통증을 조절하고 경감시키는 보살핌에 이르기까지, 호스피스의 섬김은 주님이 주시는 사랑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사역이다.
호스피스 대상자가 죽음을 엄숙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죽음이 인생의 최후가 아니라 다음 삶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수용하게 할 뿐만 아니라 평안히 사후 세계에 대한 소망을 소유하도록 하는 일 역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호스피스 사역이다. 호스피스의 섬김은 예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훈련이다. 호스피스는 환자가 임종하는 순간까지 환자를 위해 환자와 함께 기도하고, 복음을 제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권면하고, 영적 소망과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한다.
그러나 호스피스 사역이 전도의 목적이 되어야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호스피스 사역의 수단은 환자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이면 충분하다. 예수님의 사랑을 통한 섬김은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의 가족들도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접하게 한다. 호스피스 봉사자는 환자에게서 예수님을 발견하여 섬기고 또 섬겨야 한다. 중요한 것은 영혼 구원을 궁극적인 목표에 두는 것이다. 따라서 봉사자 훈련에 기독교 상담 교육과 인간 이해의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병의 증세와 정도가 다른 것처럼 말기 환자의 모습도 각기 다르다. 환자의 성별과 교육 수준, 경제력, 환경, 나이가 모두 다른 만큼 환자의 요구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호스피스 봉사자도 이에 상응하는 다양하고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 한다.
김(Kim)의 대인관계 돌봄 기법
강의: 김수지 교수(이화여자대학교 간호대학)
근거 이론적 연구방법으로 개발된 김수지 교수의 ‘대인관계 돌봄 기법’은 사랑에 근거하여 환자를 돌보는 열 가지 대인관계 기술이다. 본래 만성 정신질환자를 위해 개발된 기술이었으나, 사랑의 돌봄을 제공하는 호스피스 사역에서도 환자와 그 가족에게 이 기법을 도입함으로써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도울 수 있다. 각 대인관계 돌봄 기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알아봐 줌 -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을 이용하여 대상자의 표정, 목소리, 기분 변화, 애증의 대상, 가족 관계, 고통스럽거나 염려가 되는 점 등을 광범하고 깊이 있게 파악하는 기술이다. 상대방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의 표현으로, 마치 어머니가 사랑하는 어린 자녀의 필요를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 특히 죽음이라는 인생의 특별한 과정을 지나고 있는 환자는 불안과 두려움, 응어리진 사건이나 인간관계 등에 얽힌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어 자신이 거기 있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고 지켜주기를 원한다. 이런 돌봄은 환자가 자기연민, 비애, 우울, 분노, 쓸쓸함 등으로부터 벗어나고 자신이 귀한 인격체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동참 - 상대방이 경험하는 문제에 관심을 보이거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함께 참여하는 행동을 일컫는다. 혼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대상자를 옆으로 눕히거나 일으키고 닦아 주고 마사지 해 주는 행위 등은 환자로 하여금 힘들고 어려운 상황 중에서도 자신의 삶에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음식을 혼자서 먹을 수 없는 대상자에게 ‘먹어 보라’고 말하는 것보다 음식이 담긴 수저를 입에 넣어 주는 것은 동참의 좋은 예이다.
나눔 - 상대방과 함께 가진 것, 느낀 것, 경험한 것, 배운 것 등을 공유하는 기술이다. 특히 환자와 한 마디 말과 한 번의 미소를 나누는 것은 대단히 소중한 돌봄이다. 이러한 나눔을 통해 환자와 함께 울고 웃으며 의미 있는 관계를 지속해 나갈 수 있고 인격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다.
적극적인 경청 - 환자에게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귀 기울임으로써 언어뿐 아니라 상대방의 생각이나 느낌까지 듣고 문제를 파악하는 기술이다. 마치 세상에 그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집중하여 이야기를 들어 준다.
칭찬 - 상대방의 장점 및 잠재력을 찾아 인정해 주는 행동이다. 사소한 의사결정, 음식을 잘 삼킨 것, 잘 참은 것, 잘 돌아누운 것,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한 칭송 등이 칭찬의 구체적 행동들이다. 이러한 칭찬을 통해서 대상자는 죽어가고 있다는 슬픔에서 벗어나 죽음을 지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어 삶을 의미 있게 창조해 나갈 수 있다.
동행 - 외로운 인생 여정에 동반자가 되어 주는 것으로, 환자와 호스피스 봉사자가 온전히 함께 있는 것이다. 말과 행동, 마음, 몸으로 함께 있어 줌으로써 정서적 지지를 제공한다. 봉사자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환자와 함께 드라이브나 쇼핑, 관람, 여행을 하는 일들은 동행의 실례들이다. 동행의 돌봄 행위는 환자가 어려운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 준다.
안위 - 상대방이 좌절하고 힘들어할 때 그의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인정하고 위로해 준다. 이러한 행위들은 환자에게 정신적인 안정감을 준다.
희망 불어넣기 - 환자에게 현재 상황이 개선될 것임을 꾸준히 알리고, 현재 당하는 고통이나 질병의 의미를 승화시킨다. 특히 죽음을 무섭거나 부정적인 것이라기보다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 정기적인 방문, 최선을 다해서 사랑으로 돌보는 행위 등은 희망을 불어넣는 데 대단히 효과적이다.
용서 - 과거에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고 화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행해져야 하는 중요한 돌봄의 행위이다. 특히 환자의 경우, 지난 삶에 대한 후회로 자신을 질타하며 계속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구체적인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수용 - 당면한 상황이나 사건,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죽음이라는 현상을 계속 거부하며 싸우기보다 누구나 맞는 인생주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말기 환자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에서 타인의 사랑이 담긴 도움을 감사해하는 태도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논한 대인관계 돌봄 기법들은 환자에게 죽음에 대한 바람직한 대처 능력을 갖게 하고, 죽음을 승화시켜 나가며, 궁극적으로 편안한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다. 편안한 임종이란 신체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서적, 사회적, 영적으로 연계된 모든 관계가 잘 정립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호스피스 대상자와의 의사소통
강의: 황해란 교수(연세대학교 간호대학)
관계 형성에 기본이 되는 원칙들은, 개별성(인간에 대한 독특성과 고유성을 존중한다), 개방성(대상자와 교류할 때 진실한 자세로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활짝 열어 놓는다), 대등성(상대방을 존중하면서 그의 삶을 경청한다), 무조건적인 수용(상대방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한다), 공감(대상자의 사고와 감정의 세계에 함께 거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간다)이다.
대화를 위해서 봉사자가 숙지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유머를 활용한다.
*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 이야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곧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적 표현이 일치하는지 관찰하고 상징적 언어, 자주 반복되는 동작, 회피하는 태도 등을 관찰한다.
* 감정 표현(감정의 언어화작업)을 돕는다.
* 충고나 판단, 비난, 비판을 하지 않는다.
* 상투적인 말로 대응하거나 대상자의 경험을 경시하지 않는다.
*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하지 않고, 여러 질문을 동시에 하지 않는다.
* 말을 중간에서 끊지 말고 주의 깊게 경청한다.
* 질문할 때는 일반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구체적인 것으로 들어간다.
* 중성적인 어조로 쉬운 용어를 사용하여 묻는다.
* 대상자가 소외받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주의한다.
* 의식이 없어지는 순간까지도 대상자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음을 명심한다.
* 대상자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며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하면서 지켜줄 것을 확신시킨다.
호스피스에서 잘못 사용된 말들의 구체적인 예와 수정은 다음과 같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예요.”
- “이런 아픔이 끝도 없이 지속될 것처럼 느껴지시지요?”
“이런 상황에서도 좋은 측면을 보도록 해요.”
- “너무나 참기 힘드실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게 더 잘된 일이에요.”
- “이제 그분은 고통에서 벗어나셨지만 당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이 저에게도 전해지네요.”
“울지 마세요.”
- “우셔도 됩니다. 울고 싶은 만큼 우세요.”
“모든 일이 다 잘 해결될 겁니다.”
-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할 수 있는 한 돕겠어요.”
“지금 어떻게 느끼실지 압니다.”
- “지금 얼마나 힘드실지, 제가 어떻게 그 아픔을 다 헤아릴 수 있겠어요. 그러나 저는 지금 당신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분량만큼의 시험만을 주시지요.”
- “지금 많이 힘드실 거라 생각합니다.”
“모든 일은 하늘의 뜻이지요. 그러니 담담히 받아들이시고 따르셔야 합니다.”
- “이런 일이 왜 생겼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마음이 답답하시지요?”
“호상이에요. 살 만큼 사셨지요.”
- “그토록 사랑하시던 아버님(어머님)을 잃으셔서 얼마나 상심이 되시겠어요?”
“그래도 다른 자녀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이를 잃어서 얼마나 마음에 상심이 크시겠어요.”
“아직 젊으시니까 또 아이를 가지면 되죠.”
- “너무도 소중한 아이였는데,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그 아이를 먼저 천국으로 데려가셨나 봐요.”
-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왜 병에 걸리는가? - 대체 의학과 호스피스 케어
강의: 김수경 박사
“왜 하필 나입니까?” 중병에 걸린 사람들은 한번쯤 이런 자문을 한다. 물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을 펴들고 병에 걸리는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살펴보자. 성경은 질병이 생기는 이유를 세 가지로 구분해 놓았다.
(1) 하나님의 영광
요한복음 9장 1-3절에 보면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가리켜, 이 사람은 누구의 죄로 소경이 되었는지 예수님께 물었다. 이에 예수님은 그를 치유하여 예수님과 하나님을 이 땅에 전파하기 위해 소경이 되었다고 설명하셨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질병을 얻었다. 그는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으나 하나님께서는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린도후서 12:7-9) 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생긴 병이라면 세상의 어떤 기도도 질병을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2) 회개하지 않은 죄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악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11:30-32). 이런 경우는 자신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 병에서 낫게 된다. 그렇게 했는데도 병이 낳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음의 이유임에 분명하다.
(3) 잘못된 생활
병에 걸리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법칙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7).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보존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 몸을 파괴하실 것이다. 관습, 현대 의학, 약물 남용 등 인간의 잘못된 관습과 행동은 가랑비가 옷을 적시듯 우리의 건강을 서서히 해치고 있다. 영양이 파괴된 화식(火食)과 농작물을 재배할 때 들어가는 화학물질, 패스트푸드 등은 우리가 매일 접하는 위험 요소이다. 부작용은 생각하지 않고 약을 맹신하는 자세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몸을 해치는 일이다. 반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하는 중독성 알코올, 열여섯 가지 독극물이 들어 있는 담배, 카페인이 들어 있는 커피, 청량음료, 초콜릿 등은 현대인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이다. 흰 설탕 역시 중독성이 매우 강하여 우리 몸과 정서에 문제를 일으킨다. 소금은 치명적인 독극물로 인류에게 가장 무서운 살인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어떻게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이미 수천 년 전에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자연법칙을 준수한다면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성경에 마련해 놓으신 건강에 이르는 법칙들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의 비결은 뜻밖에도 매우 간단하다.
(1) 하나님이 주신 천연 법칙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지 대략 1,000년이 지났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멸하리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살지 않고 타락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의 방법과 천연 건강 법칙에 대해서 성경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자.
첫째, 자연 - 에덴 동산의 공기는 무공해 청정 공기였을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영양의 96% 정도가 공기에서 나오기 때문에 깨끗한 대기는 건강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따라서 더 나은 건강을 누리려면 오염된 공기를 피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순수한 물, 즉 천국의 물을 인간에게 주셨다. 우리 몸은 물로 독을 씻어내고 윤활유처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은 지구를 오염시켜서 이제 지구상에서는 순수한 물의 근원지를 거의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시간을 집이나 사무 공간에서 보내는 사람들은 가능한 야외에서 신선한 공기와 햇볕을 받는 것이 좋다. 태양은 비타민 D의 공급원이며, 태양이 없으면 우리 몸은 칼슘을 흡수하지 못한다.
둘째, 음식 - 하나님께서 주신 천연 건강 법칙의 또 다른 요소는 바로 ‘깨끗하고 살아 있는 음식’이다. 적절한 음식을 바른 조리법으로 만들어 먹지 않으면 활력 있는 세포를 만들어 내지 못해서 건강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어렵다. 인간이 먹었던 최초의 음식은 생야채, 생과일, 익히지 않은 씨앗과 곡류, 견과류였다. 물론 이런 식물들은 농약도 치지 않았고 가공하거나 첨가물을 보태지도 않았으며 불로 익히지도 않았다. 음식을 조리하면 효소와 비타민 등 각종 영양소가 파괴된다. 오늘날 누구든지 아픔과 질병을 피하고 최상의 건강을 누리려면 유기농으로 재배한 음식에 첨가물을 넣지 않고 익히지 않은 채로 먹어야 한다.
셋째, 운동 - 우리는 근래에 와서야 운동의 소중함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부터 육체적 활동을 하라고 지시하셨다. 창세기 3장 19절에는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고 했다. 심지어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데살로니가후서 3:10)라는 말씀도 있다. 몸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건강을 누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운동을 해야 한다.
넷째, 휴식 - 운동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적당한 휴식이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휴식은 아니다. 낮 시간에 열심히 육체노동을 한 사람은 밤에 숙면을 취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깊이 잠들기가 어렵다. 인체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선하고 깨끗한 공기가 풍부한 야외에서 잠을 청하거나 창문을 활짝 열어 놓는 것도 도움이 된다.
다섯째, 긍정적 사고 -부정적 사고는 육체를 쇠약하게 한다. 성경은 수천 년 전에 벌써 우리의 사고방식과 정서와 몸 상태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가르쳤다. 많은 질병은 우리의 부정적인 사고와 불안한 정서에서 나온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아픔이나 질병은 결코 태초부터 계획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들을 위반할 때 치르는 중벌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을 기쁘게 살기를 원하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신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복음3:12). 누구든지 건강하지 않으면 인생을 즐길 수 없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건강하고 행복하며 성령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풍성한 복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달려 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한복음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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