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라니요…제가 더 많이 배워요”
자폐아 음악 레슨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손인경
1999년 4월 1일 예술의전당,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씨가 부산 소년의집 교향악단과 화음을 맞췄다. 구김살 하나 없는 아이들은 진지하게 연주했고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그들의 얼굴에는 행복이 충만했다.
이 흐뭇한 음악회를 관람하던 바이올리니스트 손인경 씨(42)의 마음은 내내 불편했다. ‘이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친 사람은 과연 누굴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바로 신부와 수녀들이었다. 이들이 오랫동안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교육한 덕분에 아름다운 선율을 빚을 수 있었다. 크리스천인 손씨는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봉사를 외면하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됐다.
“그동안 제가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왔더라고요. 음악을 나눠야 한다는 개념조차 없었으니까요. 소년의집 연주를 본 후에야 내가 필요한 곳이 어딘지 알게 됐어요.”
한 달 동안 고심한 끝에 온누리교회에서 장애아들을 위해 레슨을 하기로 결심했다. 신체장애아들만 모집할 계획이었는데 목사와 의사소통이 안 된 탓에 자폐스펙트럼장애(ASD) 아이가 찾아왔다. 당황스러웠다. 몸이 불편한 장애와 정신 장애는 차원이 달랐다. ‘자폐아가 과연 집중해서 악기를 연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손씨는 “자폐증 아이의 어머니가 간곡하게 부탁해 거절할 수 없었다”며 ”돌이켜보니 하나님 뜻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렇게 장애 어린이 5명을 모아 온누리교회 사랑챔버오케스트라를 창단했는데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단원들이 50명으로 늘었고 자원봉사 선생도 35명에 달한다.
그는 장애아들을 가르치면서 자폐증에 대해 공부했다. 자폐증 원인과 증상, 치료방법 등에 대한 세미나에 참석하고 관련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자폐증 청소년의 음악교육을 지원하는 재단법인 덕영재단(이사장 전 휄리시아)의 `사랑의 음악회`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자폐아들은 반복하는 것을 즐기지만 너무 길게 연습하면 안 됩니다. 집중력이 20분을 넘기지 못해요. 시간이 지체되면 초조해 합니다. 계속 ‘선생님 언제 끝나요’라고 물어보죠.”
그런데 바이올린과 첼로 등 악기를 다루면서 아이들이 달라졌다. 차츰 인내심이 생겨 이제 1시간15분 동안 연주한다. 자연스레 세상에 적응하는 능력도 키워졌다.
99년부터 클라리넷을 배운 한 학생은 나사렛신학교 관현악부를 졸업하고 동사무소에 취직했다. 아이들이 조금씩 치유되면서 부모들도 큰 위로를 받았다.
“자폐아에게는 대학 입학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 어떤 유명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보다 대견했고 선생으로서 보람을 느꼈어요. 아이 때문에 자살까지 생각했던 어머니도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더군요.”
장애아 중에서도 재능이 뛰어난 아이도 있다.
“아주 어려운 연주 기법도 척척 해내는 아이들이 많아요. 영혼이 맑은 아이들이라 그런지 스펀지처럼 음악을 흡수해요. 항상 마음의 문을 열고 선율을 받아들이죠.”
이 아이들과 함께 무대에 서면 손씨는 ‘울보’가 된다. 50명의 아이들이 박자를 척척 맞추는 게 너무 기특하고 고마워 연주하면서도 운다. 관객도 덩달아 울어 음악회장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된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제가 배우는 게 휠씬 더 많아요. 순수한 아이들과 지내면서 세상 욕심을 다 내려놓게 되고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에요. 돈으로 살 수 없는 인생 수업을 받는 거죠.”
미국 예일대 음대 박사 출신인 손씨는 한국페스티발앙상블과 소마 트리오 멤버로 자선음악회 무대에도 자주 서고 있다. 연세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출강 중이면서도 장애아에 대한 무료 레슨을 빼놓지 않은 ‘음악천사’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예배자들>
의사소통도 어렵고, 진도도 나가지 않는 상황에서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내와 사랑으로 아이가 따라오기를 기다려 주셨다.
장애인 주간 주일 예배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연주했을 때 선생님과 나는 서로 끌어 않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손 인경 선생님을 비롯한 자원봉사 선생님들, 아이들 그리고 그 엄마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예,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의 고통엔 의미가 있었군요”하며 '장애우 음악교실'에 대해 물어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장애우들에게 무료로 악기를 가르쳐 주는 모임이 아니라 '예배 드리는 모임'이라고 강조한다.
선생님들은 소외되고 무력감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우리 아이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아부음으로 감동적인 음악을 만드는 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은 그 부모들에게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부모들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입증하듯,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 연주하며 예배를 드리고, 우리 엄마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섭리에 동의하며 감사의 예배를 드린다.
- 박 혜신 모 김 명희 -
<가이드포스트 2009년 12월호>
발돋음하는, 발돋음하는 너의 몸짓은
손인경|바이올리니스트, 사랑챔버 오케스트라 지휘자
담장 아래 핀 꽃은 담장 너머를 동경한다. 산골짜기 아이들은 저 산 너머 대처大處를 꿈꾼다. 누구나 자신의 경계 너머에 대한 호기심이 있게 마련이다. 홍콩에서 살던 네 살 된 꼬마에게도 저 너머의 세계가 손짓했다. 원래는 고물고물 작은 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짚었던 그였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기타 치는 사람을 처음 봤다. 가느다란 몇 가닥 줄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에 매료된 것일까.
"그 후 제가 하드커버 책에 고무줄을 칭칭 감아 튕기고 다니면서, 계속 엄마에게 나 이런 거 사 줘 라고 졸랐대요. 그때 엄마는 기타가 제 몸에 비해 너무 크다고 생각하셨죠. 대신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인 중국인 할아버지에게 바이올린 레슨을 받게 해 주셨어요. 그때부터 줄곧 바이올린을 손에 놓지 않았고 천직으로 여기며 박사학위까지 받게 되었어요."
그는 재능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차곡차곡 밟아나갔다. 스탠포드대학 음대를 우등 졸업하고 예일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음악박사학위D.M.A(1995)을 받은 그는, 세계의 유수한 무대에 여러 차례 섰다. 이제 대학에 자리 잡아 후학을 가르치는 일만 남았다. 그것이 마땅히 가야할 길이라고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삶의 비밀의 문이 열렸다. 1999년,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독주회 앙코르 공연에서였다. 마지막 순서로 장영주 씨가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연주했다. 알고 보니,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 이었다. 깊은 감동에 자리를 뜨기도 어려웠다.
그 후 이런 상념들이 두서없이 파고들었다. 누가 저 아이들을 가르쳤을까? 나는 이제껏 무얼 하고 살았나?
소아마비를 가진 이작 펄만Itzhak Perlman 같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는 누가 처음에 가르쳤지? 한국의 장애인들은 음악 교육을 받고 있을까?
며칠 후였다. 교회 장애인 부서에 전화해 장애인에게 음악 레슨을 해주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어제 꿈을 꿨는데, 네가 성베드로성당 같은 건물의 큰 무대에 서 있었어. 그런데 커튼콜 뒤에 휠체어가 있더구나. 너 장애인들 위해 뭐라도 하면 좋겠다."
"……."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소년의 집 관현악단의 공연, 그로 인해 열린 비밀의 문은 그를 저 먼 곳으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자투리 시간을 내어 몇몇을 소규모로 가르치려 했는데 일은 예상 외로 커졌다. 「나비야」를 칠 줄 아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지원이, 뇌수술로 지적장애인이 되었지만 사라사테의 「지고이너바이젠 Zigeunerweisen」을 피아노로 너끈히 연주하는 어령이, 학습장애아 혜신이, 자폐증을 보이는 완이, 다운증후군을 가진 네 살배기 성민이…. 그의 첫 장애인 학생들이다.
하지만 음악 선생 노릇은 예상보다 더 어려웠다. 자폐증 아이들이 질서와 규칙에 집착하는 것을 몰랐던 그는 약속을 안 지켰다가 낭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또 아이들마다 장애의 정도와 특성이 달라, 한 아이 한 아이마다 개별화된 교수법으로 가르쳐야 했다. 자폐증과 시각장애를 함께 가진 민수와의 레슨이 끝날 때면 한바탕 스케줄 확인 의식을 치르곤 한다.
* 더 많은 내용은 가이드포스트 2009년 12월호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