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살 여아 성폭행범에게 15년형이 구형 되었다. 그것도 아직 판결 미정이다.
나는 사실 범죄란 어느 한 사람의 책임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니다. 어떤 행동이 일어나 죄를 범하기 이전에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탐욕이라는 무수한 죄들이 끓어 넘치고, 사람의 역할은 그 마음속의 죄와의 전쟁인지도 모른다. 어떤 패배자에게도 동정의 잔이 있듯,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은 잔은 있다. 그러나 사람, 아니 사람도 동물의 일종이기 때문에 생기는 죄가 있고, 사람이 어떤 동물일지라도 생기지 않는 죄가 있다. 그것은 죄가 아니고 병이다. 죄 지은 죄인은 그나마 사람들이 함께 거주하는 형무소에 감금하지만 병원균을 가진 병자는 격리 치료한다. 개 돼지도 아직 생식 능력이 완성되지 않은 어린 것들을 범하지는 않는다. 무슨 몹쓸병이 아니라면 욕망의 문제도 자연성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병이다. 거의 재발율이 50%를 훨씬 넘는 병중의 병이다, 일시적인 형무소 독방 격리로는 해결 되지 않는다. 완전한 생으로 부터의 격리가 필요한 것이다. 적어도 인간은 그러고도 인간일 수 없다고 외쳐주는 사회가 있어야 인간은 인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묵인은 열개 백개 천개의 묵인을 낳는다. 그가 인간으로서의 인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진정한 인권에 대한 포기다. 파상풍 걸린 손가락을 자르지 않으면 온몸을 버린다. 대통령의 딸이, 장관의 딸이, 국회의원의 딸이, 손녀가, 조카가 그런 일을 당하는가? 대부분 돌봐줄 손이 부족하고 여력이 없는 그야말로 없는 사람들의 딸이, 손녀가, 조카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왜일까? 단 한번이라도 그런일이 있었다면 우리나라 인권의 적용 범위는 달라졌을 것이다. 난 아마도 그들이 4살 여아에 대한 가해자가 될 수도 있기때문에 그렇게 관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마저 든다. 나도 그럴수 있다는 배려때문에 누구도 인권의 범주에서 누락 시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믿음 마저 든다. 실제로 법을 제어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 때문에 지켜진 그들의 인권이 한통속이였던 적이 많았다. 이 밤도 강남 제일의 성매매 업소를 단속하는 그 힘으로 자신의 딸보다 어린 여자들의 성을 유린하는 이중성이 있기때문에 나중에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인권의 이름으로 남겨 두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열여덟 청년이 속옷을 다 드러내놓고 잠든 이십대 여성을 범한 것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발가벗고도 벗은 줄을 모르는 4세 여아를 살 만큼 살고, 묘자리 볼 나이가 된 영감탱이가 범한 것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런놈은 풋사과도 먹지 않을 것이다. 시기 때문이다. 욕정도 눈이 있는 것이다. 욕정에 눈이 먼 것과 욕정이 눈이 먼 것은 다르다. 욕정 자체가 병든 것이다. 싱싱하고 병들지 않은 욕정은 대화가 되고 설득이 되고 제어가 된다. 욕정이 남의 입장에 서보기도 한다. 그것 자체로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에너지이기하다. 그러나 병이들고 눈이 먼 욕정은 질서가 없다. 질서를 벗어난다. 4살짜리 여아에게 모든 욕정이 발정하는지 남성에게 묻고 싶다. 병이 들었기 때문에 욕정이 이상 증세를 나타내는 것이다. 에이즈 환자가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면역체계를 잃어버리듯, 욕정이 욕정의 면역체계를 상실한 것이다. 에이즈 환자를 사형시키자는 말이 아니라 파상풍 걸린 손가락을 자르자는 말이다. 대부분의 아동 성범죄자들이 아동이나 유아를 대상으로한 프로노를 즐겨 보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학습에 의한, 반복적인 학습에 의한 가능성의 인지인 것이다. 그들이 겨우 15년형을 받고, 생존을 허락받는다면, 그 죄의 사회적인 허용치를 전혀 그럴 생각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인지 시키는 것이다. 그래도 살 수 있다는 말은 그래도 된다는 말 아닌가? 삶은 무엇인가? 희망을 가질수 있는 시간이다. 4살 여아의 희망을 모두 짓밟아놓고 자신은 희망을 가질 시간을 국가로부터 사회로부터 허락받는 것이다. 15년 감옥에 썩으면서 자신은 떳떳해질 것이다. 죄가를 치룬다고 믿을 것이다. 4살 여아가 열아홉살이 될때다. 아이는 성에 대해 극심하게 예민해져서 그 때야말로 피해의 절정에 달할 것이다. 아이는 결혼을 할 것이다. 범죄자와 같은 성을 가진 남성과 결혼을 하고 범죄였던 그 성으로 말미암아 아이를 낳을 것이다. 내가 유치원 버스 태우러 잠깐 문을 열어놓고 간 40대 여성이 그 동안 집에 숨어서 기다리던 남성에게 성범죄를 당하지 않기 위해 반항하다 칼에 찔려죽었다는 뉴스를 전하며 분개하자 함께 커피를 마시던 남자 동료가 말했다."이해가 않간다. 나이도 먹고, 애도 낳았는데, 한번 당하면 죽나? 한강에 배지나가긴데, 내것으면 함 주고 목숨 건지겠다" 이것이 보편적인 우리 사회 남성들의 생각이다. 그들중에 힘센 자들이 법을 만들고 법을 판결하는 것이다. 이런것을 보면 남성들이 여성보다 정신적으로 진화가 덜 된 것이다. 40이나 백살이나 내 몸이 함부로 대해지는 것에 대해 반항 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한 인격체로서 끝장이 아닌가? 우리 사회에 4살짜리 여아의 편에서 분노하고 싸워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힘 없으면 당해도 싸다는게 보편적인 가치관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보여라. 힘 있어서 짓밟은 놈이 15년 감옥 살고 힘 없어서 당한 사람이 평생을 정신적인 감옥에서 지낸다면, 사회는 힘 있는 범죄자인것이다. 12년을 콩밥 먹으며 죄값을 치룬다고 믿으며 정신적으로 당당해진 조두순이 감옥에서 나와 그 더러운 침에 두부를 섞을때 스무살 나영이는 그 흔한 사랑한 번 못해보고 (젊은이들은 사랑 때문에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텔레비젼 드라마에 사랑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채널을 돌리며, 제대로 소화가 될지 몰라 정해진 양만큼 밥을 먹으며, 수영장에도 해수욕장에도 가지 못하고 하루 하루 어서 어서 청춘이 지나가길 십년 후의 달력까지 미리 찢으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 혹시 그놈 술자리에서 남자들이 흔히 하는 말 " 따 먹었다. 영계 한번 따 먹고 콩밥 십이년 먹었다. 콩밥 12년 먹어도 한번 먹어볼만하다"고 말하며 "이번에는 제대로 해야지" 제대로 하기 위해 마시던 술 단단히 한 잔 더 마실 것이다. 난 사람이 욕망에 눈이 멀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욕망이 눈이 멀어서는 않된다고 생각한다. 욕망 자체가 눈이 먼 것은 자연계의 질서 자체가 고장 난 것이다. 욕망은 성숙한 남성이 성숙한 여성에게 또 그 반대로 끌리는 것이다. 네살짜리 아이에게 성욕을 느낀 것은 참을 수 있던지 없던지, 이미 병인 것이다. 그럴수도 있겠구나하고 여겨지면 지구 저편의 남성에게도 옮을수 있는 치명적인 전염성을 가진 불치병인 것이다. 그런 놈들이 신포도 신사과 설은 밥은 더 먹지 않을 것이다. 법은 유연성을 필요로 할 것 같다. 절대라는 것은 절간에도 없다. 부처가 가운데 토막이 자꾸 일어서면 장가를 보내야한다. 그에게 인권이 적용된다면, 우리가 잡아먹는 개 소는 적어도 우리에게 피해 한 번 입힌 적이 없는데 우리의 식권을 포기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는 유아강간의 합법적인 길을 터는 선구자로 남을 것이다. 그는 15년간 꿋꿋이 살아남아, 후세에게 옳은 자가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은 자가 옳은 것이다라고 외칠것이다.